228화-물고 물리는 싸움(8)
게임이 계속해서 경쟁과 전쟁을 부추긴 이유가 지금 나오고 있다.
연합군이 분명 단결과 협력의 힘을 보여주었지만, 마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이.
'아무렴.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이, 따뜻하고 배부른 상태에서 가당키나 할까.'
최전선에서 싸우던 라몬은 전투를 즐겼다. 내가 보기에도 극도로 분노한 것 같은 요정의 화살 폭격은 그 공격에도 짙은 감정이 꾹꾹 눌러 담겨진 상태였다.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다. 한계를 넘는데 필요한 것은 단 한걸음. 그 한걸음이 나오기 가장 쉬운곳이 바로 전장이지.'
'많이 봐 왔지.'
나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그동안 군단을 상대하던 이들, 혹은 나와 함께 인간으로 싸우던 이들에서도 간혹 마지막의 마지막인 순간 불가사의한 힘을 보여주는 이들이 있었다.
비록 그 끝은 대부분 마지막 불꽃이 되어 사라졌지만 살아남는다면 그만큼 성장하고 강해진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지금 그런 것 하나하나 감탄하고 봐줄 여유는 없다. 지금 그곳에 돌진시킬 수 있는 양산형 군단병들은 단 1번. 어서 저 끔찍한 흙인형들을 치워.'
'어쩔 수 없지. 즐기는건 나중에 해 라몬.'
'그렇다면 이 뾰족귀 여자는 죽이지 않겠다. 언젠가 다시 만나길 기대하며.'
리하르트의 재촉에 라몬에게 서두를 것을 지시하니, 뿜어낸 출력으로 단숨에 화살들이 가득 채운 공간을 가로지른 그는 검을 휘둘러 화살을 쏴대던 요정을 검면으로 내리쳤다.
"아악!"
뼈가 부러지고 살이 으깨지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요정은 피를 뿌리며 그대로 바닥에 추락했다.
...내 생각엔 그냥 깔끔하게 죽여서 후환을 없애는게 좋을 것 같지만, 생각해보니 별 상관은 없을 것 같았다.
'이놈들은 전부 죽이겠다.'
그는 멈추지 않고 방어선을 마구잡이로 돌파해, 주문을 외는 술사들의 코앞까지 쳐들어갔다.
무기를 들고 덤비는 마지막 호위병력들이 있었지만 라몬은 그들을 향해 한손으로 잡은 태도를 휘둘러 일격에 토막내고 베어냈다.
'응?'
"반드시 지켜라! 쏴!"
그러나 정말 마지막의 순각 그의 전진을 방해하는 공격이 있었다. 정확한 조준으로 쏘아지는 레일건은, 주문과 마법으로 강화된 특수한 탄환.
'끝났어.'
물론 신경쓰진 않았다. 어차피 라몬이 난입해서 방어 병력들을 짓밟은 이상 이번엔 공중 방어가 무력화 되었다는 뜻이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아직 지키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겠지만 직후 떨어진 레이나의 포격이 스트레이트로 꽂히며 대폭발을 일으켰다.
'놈들의 병력이 사멸한다. 이대로 돌진해서 잔당들을 끝낼 기회다.'
강자들끼리의 일기토가 이기든 지든 오매불망 기회만 노리고 있던 리하르트가 대기하고 있던 명령어를 곧바로 하달했다.
대기하고 있던 병력들은 물밀듯이 몰고 오는, 죽여도 죽여도 계속 몰려오는 흙인형들을 피해 물러서던 군단병들.
술사들의 사망으로 절반 이상이 사라진 적들을 향해 초거대종들을 앞세운 군단의 병력이 일제히 돌진하기 시작했다.
'봐도 봐도 끔찍한 주술이긴 하다. 순전히 우리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주문 아닌가. 나는 이쪽 분야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분석할 가치가 있다'
동시에 리하르트는 적들이 비밀병기로 준비해온 주술에 대해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가능하다면 해야겠지만, 이번만큼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일단 지금은 이 땅에서 저들을 밀어내고 고민해.'
숫자로 버티던 이들이 사라졌으니 그들은 더 이상 군단병들을 막을 힘이 없다. 초대형종들을 앞세워, 나머지 저항을 부수고 짓밟을 뿐.
황급히 떠나는 함선의 모습이 보였다.
이미 균형이 무너졌으니 이런 식으로 다른 지역들도 반복하면 그만이다. 이번엔 상당한 위기에 몰렸었지만, 그래도 지키는덴 성공한 것이다.
딱 내가 원하던 정도의 전투였다. 서로 치열하게 치고박고 싸우며 데이터와 경험을 쌓고 정작 어느 한쪽으로 힘의 균형은 넘어가지 않는 이 절묘한 상태.
아마 연합측도 패퇴하긴 했지만 마냥 절망하진 않을 것이다. 본인들의 비밀병기가 우리를 상대로 효과가 있다는걸 입증했으니까,
"약속은 지켰어 이브."
"칫..."
나는 어느정도 여유를 찾은, 바로 곁에 있던 이브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이브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딘가 마음에 안든다는 듯 꿍한 상태였다.
"한군데에서 완전히 밀리니까, 놈들도 더 큰 손실을 보기 전에 일제히 철수했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야. 분명 다시올거야."
"당연히."
"개자식들...가만 안두겠어. 일단 나머지 부분 정리만 끝나면 반드시 손봐주겠어."
이브는 꿍얼꿍얼 중얼거리며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묘한 기분으로 지켜보았다.
과연, 지금 이 순간 나는 기존의 흐름을 얼마나 비트는데 성공했을까. 관조자의 언행이나 게임의 흐름으로 추론하자면 이브는 파괴적인 무력으로 압도적인 승자가 되어 자신의 본성대로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지금은? 나는 조금 다르다고 판단했다. 과연 내 도움 없이 이브가 이번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브가 약화된 것인지 다른 이들이 강해진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어찌저찌 밸런스를 맞추고 있다.
"이미 나는, 군단은 단순한 의미의 성장은 한계에 다다를 정도로 이루었다고 생각해. 생물종을 잡아먹고 유전자를 분석해서 새로운 몸을 만들어내는 때는 지났어. 지금 시점에, 이 우주에 군단의 양산형 병력들처럼 만능이고 강한 생물체가 존재할리 없으니까. 그러니 진정한 진화를 위해 남은건 따로 있어."
그덕인지 이브는 계속해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이 부족하다 느끼며 더 과격한 성장을 갈구했다.
"그게 무슨 성장인데?"
"나 자신의 성장이기도 하지. 예를 들면...이런것."
이브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들었다. 동시에 검에 검붉은 불길이 확 타올랐다.
자신의 장점을 십분 살려 군단을 움직임과 동시에 지금 인간을 연기하는 이브는 남는 시간동안 말그대로 모든 것을 배웠다. 각종 무술도 그중 하나였다.
다양한 세상에서 찾아 온 다양한 강자들이 가진 오의. 자신의 초월적인 지능을 이용해 그것들을 고스란히 복사하고 자신만의 무기로 만드는게 이브의 힘이었다.
"여기 있는 헌터 이브가 강해지면 군단병들도 그만큼 강해져. 군단병들이 데이터를 쌓으면 나는 다시 그만큼 강해지고. 선순환이지."
"..."
그 무엇도 될 수 있다.
이브는 자신의 근본을 착실하게 응용했다.
"그래. 그럼 나머지 두곳은 어때. 잘 정리될 것 같아?"
"...조금 더 걸려. 센젤에서 입은 둥지 타격이 적지 않아."
나는 화제를 돌렸다. 화제는 내가 지금 화면으로 보고 있는 두개의 전장으로, 지금 미친듯이 워프하며 도망치는 카사라스 함대를 쫓는 군단의 병력과 그들의 본성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본대의 모습이었다.
"감히 에덴을 폭격한 놈들은 우리에게 뒤를 잡힐까봐 자기들 본성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고, 지금 전력을 다해 두들기고 있는 놈들의 본성은 게이트가 열리기 직전이지."
"내가 보기엔 좀 아슬해 보이는데."
이브는 지기 싫어하는 특유의 본능인지 슬쩍 현황을 부풀려 말했지만 비밀병기를 대동한 연합군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타격을 입긴 한만큼 지금 당장 백중세인 현황을 뒤집을 힘은 없다.
"...나도 알아.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도 전공을 세워 놈들을 압박해야지."
내가 그점을 지적하자 움찔한 이브가 손으로 창 밖을 가리켰다.
지금 우리가 탄 함선이 푸른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는 이곳은 카사라스가 점령한 연맹의 행성.
본격적으로 시작된 반격의 선봉에, 우리는 또다시 앞에 서게 되었다.
"곧 임시 기지에 착륙합니다!"
때마침 방송을 통해 도착을 알려왔다. 긴급한 지원 요청을 받고 이곳에 온만큼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저, 정말 지금 열어도 됩니까!?"
"몇번을 말해! 열라고!"
심지어 큼직한 함선이 착륙하고 현장으로 차량을 타고 출동할 시간도 아깝다고 이브는 지금 즉시 문을 열라고 소리쳤다.
결국 이브의 요구대로 문이 열리고, 거센 돌풍이 우리를 휩쓸었다.
"바로 가자."
그리고선 망설임 없이 허공에 몸을 던졌다. 혀를 찬 나도 그 뒤를 따라 뛸 수밖에 없었다.
'연합쪽은 내가 도우면 된다. 하지만 카사라스가 완전히 밀려나면 이브는 곧바로 연맹을 공격하려 들턴데, 지금 큰 타격을 입은 연맹은 주요 행성들의 좌표를 모조리 알고 있는 이브에게 쓸려나갈 것이고 그러면 급격히 덩치를 불린 이브에게 나머지 세력도 쓸려나간다.'
떨어지는 와중 나는 머리를 굴렸다.
따지고보면 이건 이브와 나의 두뇌싸움이기도 했다.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이브를 적대하지 않으면서 이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일단 확실한건 카사라스들은 여기서 이렇게 허무하게 밀려선 안 된다. 연맹도 계속해서 싸울 수 있는 저력을 유지해야 했다.
'거슬리는 카사라스 소속 플레이어를 쳐내고 난 이후에, 그들이 복수심을 불태울 수 있게 만든다거나.'
그동안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 몇가지 계획들이 머리를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