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물고 물리는 싸움(7)
물론 내 휘하의 군단병들은 내가 직접 조종하는게 아니지만, 어쨌든 이브와 함께 군단으로서 싸우는건 상당히 오랜만이다.
그만큼 오랜만에 힘을 합친 우리의 힘은 분명 강하다. 특히 서브마인드들과 상위종을 집중 투입한 지역에선 한순간에 적들을 밀어낼 정도였다.
'흐음. 내 생각엔 괜히 그쪽으로 몰아넣은 것 같은데. 술사들을 죽여야 한다. 문제는 철통 같은 경호를 받고 있는 술사들을 잡으려면, 그쪽으로 집중한 고급병종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내 참모 리하르트는 전장을 살피더니 서둘러 상위종들을 후퇴시키라 말했다. 오직 전쟁의 승리만을 위해서 전장을 분석하던 그는 군단의 양산형 병력들이 서서히 밀리고 있음을 경고했다.
'완전히 칼을 갈고 나왔다. 어떤 병종으로 반격해도, 그에 맞춰 완벽히 카운터를 쳐서 대응하고 있다. 그러니 힘싸움으로는 밀어낼 수 없다. 술사를 저격해야 한다.'
'그렇게 보이네.'
나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연합이 가져 온 무기는 대량의 흙인형을 부리는 소환술. 보나마나 언데드를 일으키는 사령술을 포함 여러가지 수단이 뒤섞인 저 기묘한 술법은 당연하게도 핵심으로 보이는 술사들이 포진해 있었다.
손에 든 지팡이를 끝도 없이 허공에 휘적거리며 흙인형들을 일으키는 그들을 철통 같이 지키는 기갑 군단과 정예 전사들.
대체 저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어떻게 공급하는건가 봤더니, 지면에 가까이 내려 앉은 함선에서 연결한 무언가가 죽 늘어져 있었다.
'레이나. 뒤로 물러서서 저놈들을 저격해.'
'알겠습니다.'
나는 그곳에선 수백km 떨어진 곳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싸우고 있는 레이나에게 목표지점을 타격하라 명령했다.
화면 속에, 자신의 모든 무장을 동원한 그녀가 지팡이를 들어 저 먼 지평선을 향해 겨누는 모습이 나왔다. 곧 그 지팡이에서 뿜어져 나온 광선포가 하늘을 가르며, 복잡한 전장을 뚫고 우리 모두가 관측한 지점에 정확히 착탄하기 직전이었다.
'역시 이정도는 부족하다는건가?'
'더 강한 포격을 날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포격은 적들이 띄워낸 에너지 쉴드에 그리 어렵지 않게 막혔다. 물론 나도 이것 한번으로 끝장낼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계속 포격해 레이나. 그리고 이곳에 와서, 좀 뚫어줘야겠어...라몬.'
'그렇게 하지.'
나는 분해하는 레이나에게 지속적인 공격을 명령하고 적들의 방어를 뚫기 위해 새로운 서브마인드를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어쩌면 지금 선봉에서 말그대로 땅과 하늘을 갈아버리며 미친듯이 날뛰고 있는 강도연에 필적할 전력일지도 모른다.
관절구에 박힌 동력기관이 빛나는, 검은 피막으로 된 한쌍의 날개가 펄럭였다. 전신을 감싼 검은 갑각은 군단의 트레이드 마크지만 서브마인드가 된 마왕 라몬의 가장 큰 특징은 가면을 쓴 머리에 돋은 한쌍의 큼직한 뿔이었다.
그 전체가 신목이 만들어낸 광석, 강한 형상력을 품고 있는 군단의 동력기관으로 된 뿔이 빛나며 그가 음속을 초월하는 속도로 하늘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역시 옳은 선택이었다. 좁디 좁은 세상에서 벗어나 이렇게 재미있는 전장을 계속해서 다닐 수 있다라.'
그날 이후, 틈만나면 심심풀이라며 강도연과 서로 어디 한군데가 부서지고 절단될 때까지 치고박던 그는 지금 상황을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다.
'내 생각에 우리는 이 황홀한 절경을 영원히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투쟁과 사투, 생각만 해도 피가 끓지 않나? 군단과 하나가 된 이제는 나도 안다. 우리는 오직 전쟁을 위해 존재하는 생물이다. 싸우지 않는다면 존재 이유가 사라지는 불쌍한 생물체,'
'그럴 수도 있지.'
즐겁다는 듯한 라몬의 말에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내가 하이브마인드가 된 그 순간부터, 나 스스로도 절대 싸움을 멈추지 않기로 결정했으니까.
하지만 끝내 의문이 떠오른건 막지 못했다. 정말로, 지금 내가 하는 이 행동들이 정말로 그만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
"이런! 또 날아온다!"
"우리가 이제 한두번 막아보나! 다시 한번 방어막!"
슬슬 석양이 져가는 하늘을 가로지르는 한줄기 섬광. 양산형 2번대, 포격형 군단병들의 포격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함선포급 위력의 포격이다.
하지만 똘똘 뭉친 그들은 미리 준비한 주문을 발동시켜, 포격을 막아내고 현장에서 반쯤 정신을 놓은 술사들을 지켜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밀어내면 된다. 세계수 묘목을 심는데까지 성공하면, 우리가 역으로 이 행성의 힘을 끌어오는 것도 가능해진다,'
타 지역의 주문과 마법을 결합하고 연구하여 주도적으로 방어주문을 설계하고, 새롭게 발전시킨건 엘덴의 요정들.
적극적으로 연합에 가담하고 있는 엘덴의 요정 슈리아 역시 지난번 이든 방어전 이후 이 전투에 참여했다.
"또 다시 날아옵니다!"
"침착하게 받아치면 돼. 침착하게..."
'제발. 이 끔찍한 싸움이 어서 끝나기를.'
대륙을 횡단하는 레이나의 포격이 다시 한번 떨어졌다.
슈리아는 주변 동료들을 격려하며 이를 악물고 버텼다. 전쟁은, 그 자체만으로 정신을 갉아먹고 훼손시켰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어서 이 전쟁이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막, 막았어요..."
"잘했다 엘라."
그럼에도 버틸 수 있는건, 이 지독한 공포와 위압감을 이길 수 있는건 그 이상의 사명감, 절박함, 그리고 곁에 함께하는 이들과의 연대 덕이었다.
슈리아는 진이 빠진듯한 눈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요정을 보고 애써 웃었다. 이든 출신의 어린 요정인 엘라는 이든 방어전 이후 슈리아가 거둔 제자이자 그녀의 새로운 가족이었다.
"이제 조금이다. 조금만 더!"
레이나의 분노에 비례하여 떨어지는 포격도 점차 위력을 증강해갔지만 그들은 합심하여 계속해서 방어하는데 성공했다.
이제 사방에서 몰아치는 공격에서 힘겹게 버티던 연합군 사이에 희망이 번져갔다. 군단을 상대로 이렇게 크게 몰아붙이기 시작한건 처음이니까.
'가능성만 보아도 충분하다고 했지만, 어쩌면 정말로 승리의 실마리를 잡은 것일지도 모른다.'
슈리아도 마찬가지였다. 군단이 지금 양면, 아니 에덴을 공격한 카사라스 함대까지 삼면전선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희망은 더욱 커져갔다.
"저기, 적들이 옵니다...! 생김새로 보아 특, 특수종으로 추정. 그것도 데이터에 없는 신종입니다!"
"뭐라?!"
하지만 그 순간. 불안한 눈으로 현장을 보고 있던 지휘부에서는 새로운 관측 결과에 경악했다.
"뭐야...!"
"피해라!"
상위종 몇과 함께 아군의 공격을 가뿐히 뚫고, 지상으로 내려앉은 존재가 착지만으로 거대한 충격을 만들었다.
흙먼지와 함께 충격파가 터져나오며, 가장 가까이 있던 연합의 기갑 군단이 밀려나 쓰러질 정도였다.
기겁한 슈리아 역시 엘라를 감싸고 마나를 끌어올려 충격파를 상쇄했다.
"검은 마도사와 같은, 특수종..."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가장 강력한 적, 가장 주의해야 할 네임드들.
하지만 지금 모습을 드러낸 2m를 넘기는 큰 키와 뿔을 가진 존재는 처음 보는 존재였다. 게다가 그 손에 들린건 한때 마왕의 마검이었던 보검을 군단식으로 개조해 만든 5m짜리의 커다란 태도.
"마..왕."
태도를 빗겨든채 날개를 펼치고 하늘로 날아오르니 누군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가 손에 쥔 태도를 들어올린 순간.
"전부 공격해라!!"
경악한 슈리아가 최대한 힘을 끌어올렸으나 끝내 늦었다.
라몬이 발산하는 거대한 마력풍이, 수천 수만가닥의 칼날풍이 되어 일대를 휘갈겨 말그대로 갈아버리기 시작했다.
'이런. 이곳엔 그리 강한 강자가 없는가.'
자신의 마력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새로운 육신을 얻음과 동시에 모든 제약과 부상을 초월하고 용사와 싸우던 전성기 시절의 두배 이상의 위력을 보며 히죽인 라몬은 제대로 반격조차 못하고 터지고 갈려나간 연합군을 보며 혀를 찼다.
이제 그의 눈은 방어선 너머. 술사들을 향했다. 함선으로부터 에너지를 공급 받는 저 술사들을 죽이면, 지금 엄청난 숫자로 땅 위를 휩쓸고 있는 적 병력은 모두 사멸한다. 그렇게 되면 뒤에 대기시키고 있는 초대형종들을 돌진시켜 싹 쓸어버릴 생각이었다.
"안 돼! 주술사들을 지키시오!"
절박한 고함소리. 동시에 들리는 삐이이 하는 이명. 슈리아는 흐릿한 시야로 겨우 눈을 떴다.
전투. 아니 일방적 학살이 한창이다. 라몬은 가볍게 휘두른 검으로 일으킨 검풍으로 자신에게 덤벼들던 이들을 고깃조각으로 짓이겨버리며, 동시에 마법을 쏘아내 포대를 무력화시켰다.
"아아..."
하지만 지금 큰 충격을 받은 슈리아에게는 그런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분명 휘말리기 직전 함께 바닥을 나뒹굴었을 엘라. 그러나 지금 그녀의 곁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안 돼..."
남은건 꽉 움켜쥔 손 하나 뿐. 손목 위로 뜯겨나가 전부 사라진 엘라의 시신은 다른 이들의 육편과 뒤섞여, 알아보는 것도 불가능했다.
절망한 그녀는 땅에 얼굴을 묻고 오열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 얼굴은 끔찍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잔악무도한 적들을 향해 증오하고 분노한건 처음이 아니지만 사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참전한 용병의 입장. 그러니 지금껏 이만큼의 절망감과 상실감을 느낀적은 없었다.
'이제 진정으로 알 것 같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바람으로 휘감았다.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뜨거운 증오와 분노가 몸을 잠식했다.
동시에 몸을 앞으로 발사하며 자신의 활을 꺼내들었다.
'전쟁의 꽃. 그래. 슬픔? 분노? 증오? 그 원인은 모르겠지만, 전장에서는 늘 자신을 초월하는 이들이 나오게 되지. 결국은 그게 이 게임의 목적 아닌가.'
라몬도 오직 자신만을 보고 달려드는 그녀를 보고 웃더니, 기꺼이 검을 겨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