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물고 물리는 싸움(6)
"빈자리들이 늘었군....뭐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일이지만. 이번엔 얼마나 남을까?"
"이미 달라지고 있고 이제는 더욱더 모른다. 전처럼 더 비어나가서, 끝내 하나만 남을지. 아니면 전혀 다른 결과로 끝날지."
스리슬쩍 찾아 온 이 덩치 큰 동료의 말에, 그는 언제나처럼 펼쳐놓은 수많은 화면들에서 눈을 떼지 않고 답했다.
동료의 말대로 이 게임이 계속해서 진행되며 그들 역시 하나 둘 자리가 비어갔다. 목숨을 함께하는건 플레이어와 유닛 뿐만이 아니었으니.
"물론 아주 작았던 변수가 전례 없이 크게 구르고 있다는건 인정해. 하지만, 하지만 나는 아직 불안하다. 이런 노력들에도 전과 똑같은 결말이 나올까 불안한건 아니야. 이쯤되니 그냥 모든게 불안하다. 앞으로 벌어질 미지의 결말도 그 과정도."
"한두번도 아닌데 아직도 불안해 하는군. 우리에게 선택지는 없다. 그냥 쏘아진 살처럼 앞만보고 달려가는것 뿐."
그는 동료의 말에 천천히 얼굴에 쓴 가면을 벗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두 눈은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화면 속에는 지금의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자신의 플레이어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허공에 띄운 화면을 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무너졌던 균형이 얼추 맞아가며 세력간 전쟁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격해지고 있는 가운데, 이제 넌 어떤 선택을 내릴까.'
그가 할 수 있는건 지켜보는 것 뿐. 지금부터는 어차피 그도 미래를 알 수 없었다. 내리는 모든 선택이 최초다. 다만 이 미지의 미래가 그들이 바라는 방향일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더 파멸적인 방향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럼 네가 보기엔 어때. 이번엔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대의를 이룰 수 있겠나."
"...아마도. 지금껏 만난 그 어떤 '나'보다 높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다만 동료의 질문에는 희망적으로 답했다. 거짓을 말한건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의 플레이어를, 또다른 자신을 믿었다.
"이미 전례 없는 방식을 선택하여 결국 스스로 군단과 하나된 상태. 나는 그가 끝내 군단의 고삐를 쥐는데 성공하여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장막 밖에서 몰려 올 외우주의 아귀들도 몰아내어 이 게임 시스템의 마지막을 찍을 수 있을거라 확신한다."
"너무 낙관적인 말이지만, 그 경우가 아니라면 다시 리셋이라는게 끔찍하군."
그의 말에 몸을 부르르 떤 동료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를 떠났다. 가만히 그 자리를 보고 있던 그는 다시 화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스텝 업 이후 언제나 최강으로 군림하던 이브가 양면전선과 미처 예측하지 못한 상대방의 비밀병기에 의해 위기에 빠졌다. 우주에 진출하기 전, 우주함대의 포격에 당해 척박한 험지 레드리움으로 도망친 일 이후로 겪는 가장 큰 위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던 그때와 달리 지금의 네게는 스스로 정복해낸 행성 하나분의 강한 힘이 있다. 따르는 수많은 서브마인드와 군단병도 있다. 그럼 네 선택은 뭐지...?'
화면을 보는 그의 눈이 반짝였다.
*
'죽여버릴거야 죽여버릴거야 죽여버릴...'
'조금 진정해 이브.'
나는 미쳐 날뛰는 이브를 진정시켰다. 이브가 이다지도 화난 이유는 그리 거창하진 않았다.
카사라스들이 숨겨둔, 행성 파괴급 비밀 폭탄? 연달아 투하하지 않는걸 보면 놈들에게도 부담이 큰 폭탄이고 무엇보다 그 폭탄이 아니더라도 솔직히 이정도 피해는 어느정도 감수한 것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브가 싸우는 빈틈을 노린 연합의 전면적인 공세? 이것도 예상한 범주 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브를 완전히 화나게 만든 것은 결국 기습 공격을 시도한 연합이 가져 온 비밀병기들이었다.
'너무...많아.'
이브가 이를 박박 갈며 짓씹듯 내뱉었다. 너무 많다? 내부시스템 개선 이후 이제는 기본으로 억단위의 병력을 굴리는 이브가 상대방을 보고 많다는 평가는 지금껏 거의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지금은 달라보였다.
동시에 공격 받은 포인트들. 분명 그곳에 강습한 적 병력은 예상치만큼이었고 군단병들에 비하면 한줌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들의 숫자는 강습 직후 급격히 늘어났다.
"일어나라!"
"서둘러! 보급이 끊기면 뒤가 밀린다! 인형들에게 무기를 보급해!"
적들의 고함과 함께 거친 흙바닥에서 파스스 떨어지는 흙과 함께 몸을 일으키는 적들은 전신을 흙과 돌로 만든 해골병들이었다.
심지어 연합군은 그 해골병들에게 개인 무기를 들려보내 단순 소모용 병력으로 써먹었다.
'저 조잡한 흙인형들에게 도대체 몇가지의 형상력이 뒤섞인건지 감도 안와. 적어도 6개, 아니 8개 이상.'
'아주 칼을 갈고 왔군.'
어찌보면 연합이 드디어 자신들의 결실을 맺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들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서 결합하고 극대화한 시너지.
그것도 오직 군단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졌을 기술이다. 그만큼 효과가 좋다. 총기를 비롯한 무장까지 갖춰 화력도 확보한 이 흙인형들은 미친듯이 숫자를 불려가며 군단의 양산형 병력들과 몸을 사리지 않고 자폭하듯 싸웠다.
언데드의 특성도 가지고 있는지 신체 일부가 결손되어도 금방 재생하고, 필요에 따라 신체를 키우거나 강화하는 것마저 가능했다.
'방법 있어?'
그 위력을 실감한 나는 진심으로 이브를 걱정했다. 지금 이브의 아바타, 거신병은 어느새 나타난 수많은 연합의 강자들에게 둘러싸였다.
마족도 있고, 요정도 있고, 인간도 있다.
거신병 아바타를 사용하는 이브의 강함은 군단 내 단일개체 최강일정도. 하지만 아무리 이브라도 프로토 타입에 불과한 저 거신병을 여럿 굴리는건 지금 당장 불가능하다.
'아무래도 카사라스 쪽 일을 해결하고, 바로 이곳으로 돌려야겠어. 저 건방진 놈들이 더 단단히 결속하기 전에 다 죽여버리게.'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은?'
'읏...뭘 자꾸 묻는거야. 빨리 도와달라고. 난 네 유닛이잖아.'
결국 현재 이용 가능한 병력이 없었던 이브는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나는 그 요청을 받고 피식 웃었다.
처음 이브에게서 벗어난 독립적인 군단을 키워냈을 때. 그 목적은 다름 아닌 이브의 견제. 하지만 지금은 그 예상과 달리 이브를 도와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나는 오히려 이게 좋다고 판단했다. 내가 비튼 미래의 영향일지 모를 연합군은 내가 이브를 견제할 필요도 없이 강해졌고, 그덕에 나는 이브에게 적대감 대신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동시에 빚을 지게 할수 있게 되었으니까.
'리하르트. 게이트 열어.'
'우리는 그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설마하니 이대로 영원히 이곳에 대기시킬까봐.'
나는 하이브마인드로서, 마계에 있는 내 군단의 참모 리하르트에게 움직일 것을 지시했다.
리하르트는 곧바로 게이트를 열어젖혔다. 가장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건 강도연과 레이나 등을 비롯한, 우리 군단의 서브마인드들과 상위종들.
그리고 그들이 게이트를 도착한 곳은 다름아닌 이브의 아바타 바로 옆이었다.
'당황했나?'
거신병을 포위하고 있던 이들은 갑작스레 차원문을 열고 등장한 새로운 적들의 등장에 놀랐는지 술렁거렸다.
솔직히 아직도 둥지 확장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내가 가진 수천만의 군단병을 더한다고 행성 전체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큰 영향을 끼칠 것 같지는 않지만, 적들의 강자들을 저격할 수 있는 상위종 전력은 다르다.
'날 알아보는 것 같아.'
거신병의 머리 바로 위에서 나타나 허공에 떠있던 강도연이 날개를 펼친채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들에 섞여 있던 마계 출신의 마족들은 그런 강도연을 보고 유독 더 크게 반응했다. 당장 얼마잔까지 자신들과 피터지게 싸웠던 존재가, 이곳에서 다시 나타났으니 놀랄 수밖에 없겠지.
'따로 거창할게 지시할게 있겠어. 전부 쫓아내.'
나는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가 한몸인 것처럼 움직일 수 있다.
단숨에 앞으로 치고나가는 강도연을 시작으로, 잠시 멈칫했던 아군이 다시 앞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검, 검은 날개!"
'오크놈.'
강도연은 성향답게 가장 먼저 자신을 보고 기겁한 마족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미 한번 고향땅을 버리고 도망친 놈들이었다. 뼛속까지 공포감을 새긴 놈들이, 제대로 덤빌 수 있을리가 없다.
"..."
"살았다...!"
그러나 강도연의 날개가 우두머리 오크를 베어버리기 직전. 이번엔 서슬퍼런 도끼날이 막아었다.
"그 이명은 지금까지 숱하게 들었다."
도끼를 든 기계 의수를 회수한 그는 거친 인상의 덩치큰 사내다. 연합의 일원인 인간종 가이샨 족이 틀림 없었다.
"내가 상대하지. 알아들을지 모르겠지만 난 전사장 가르라고 한다. 이 팔이 보이냐, 네 동족을 베고 얻은 영광스런 무기니라!"
씩 웃은 그가 붉은 기운이 서린 도끼를 휘두르자, 뿜어진 에너지를 강도연은 베리어를 강화시켜 막아내었다.
'이...'
순간 동생의 분노가 확 끓어오르는게 느껴졌다. 강도연의 입장에서는 마족 따위를 감싸는게 좋게 보일리 없으니까.
"...어?"
동생이 이전부터 재미를 봤던 자신의 무장을 사용했다. 날개의 깃털 일부가 뾰족하게 자라나오기 시작하더니, 떨어져 나오며 허공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 끝을 겨눈 뾰족한 송곳들이, 검붉게 타오르며 전방을 향해 연쇄적으로 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