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물고 물리는 싸움(2)
"그래서.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으니 이제 그 다음은 뭐야?"
"조금 지켜봐야지."
나는 순수한 궁금증을 담고 있는 이브의 질문에 곧바로 답해줄 수 없었다. 완전히 승리를 거둔 마계 전역을 둥지화 하는 것, 솔직히 시간이 조금 걸린다 뿐이지 적대 세력들을 다 쫓아낸 이상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억단위에 가까운 병력들도 지금 모조리 휴면상태에 들어가 대기중이었다.
"뭐야. 따로 할거 없으면 나좀 도와주면 되겠네. 행성 하나급 전력이 가세해 준다면, 지금 노리고 있는 연합놈들의 방위에 금을 낼 수 있을거야. 고향을 버리고 도주한 마족 잔당까지 싹 쓸어버리자."
이브가 툴툴거리며 자신을 도와달라하자 나는 괜히 움찔했다. 물론 이브를 도와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만약 내가 가세해서 이브에게 힘을 실어주고 그 힘으로 균형을 무너뜨리게 된다면 큰일이니까.
"너도 조금 천천히 생각하는게 낫지 않겠어? 지금 양면전선이잖아."
"하! 나는 잃어도 상관 없는 병력만 보냈지만 퍼랭이들은 아무것도 못하고 맞고만 있을 뿐이야.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네."
내가 카사라스들과의 전선을 언급하자 이브는 코웃음을 쳤다. 차지연의 합류 이후 그녀를 앞세워 카사라스를 선공한 이브는 지금도 연맹을 공격하던 그들과 전쟁을 벌이며, 사실상 삼파전인 상태로 서로 싸우느라 위축된 양측 모두를 공격하는 중이었다.
"연맹과 연합, 두 인류 중심 세력이 손을 잡기 전에 어느 한쪽은 끝내버리고 싶었지만...뭐 상관 없어. 이쪽도 아직 할 일도 있고."
"에볼루션은 완전히 끝이지."
이브의 자신만만한 말에 나는 시야 한켠의 화면을 흘끔거렸다.
이브가 카사라스와, 아니 정확히는 카사라스 중 하나인 상대 플레이어와 벌이는 전쟁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었으니까.
레아나도 강도연도 나에게 넘긴 이브는 현장지휘 및 특수종으로 다룰 서브마인드 전력을 증강할 목적으로 차지연을 서브마인드로 만들었고, 그 이상도 욕심내고 있었다.
그 대상은 바로 차지연과 같은 에볼루션 소속의 헌터들. 상대 플레이어의 유닛들을 하나하나 저격하고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어 전력으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온, 온다! '검은 번개'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화면 속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
"저 돼지 자식을 대신 죽여준건 고맙지만, 순순히 죽어줄 순 없지!"
[반드시 살아라!]
실로 오랜만에 유닛과 플레이어, 두 사람의 뜻이 합치했다. 지구에선 에볼루션 소속의 스텝 업 헌터로, 나름 S급에 준하는 강자로 불린 헌터 모리스는 자신의 이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그가 손에 든 검이 단숨에 수십, 수백개로 불어나 허공에 흩뿌려졌다.
카사라스 플레이어 라스 역시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적들의 내부에 첩자를 만드느니 마니 하는 계획은 집어 치우고 모리스가 살아남기를 강하게 빌었다.
[영혼 공진]
"크훕..."
그러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자신의 혼을 연결된 동료들과 공진시킨 모리스가 눈을 뒤집고 덜덜 떨더니 수십개에서 수백개로 불어난 검을 전방을 향해 쏘아내었다.
그들이 이렇게까지 해서 상대해야 하는 적은, 마치 슈트와 같은 검은 갑각으로 굴곡이 드러나는 전신을 덮고 있는 여성체.
나선을 그리며 휘둘러지는 검들을 향해, 자신이 이끌고 온 병력들과 함께 소수의 연맹군을 맹렬히 공격하던 카사라스 지상군을 기습해서 궤멸시킨 그녀가 파직거리는 검은 뇌전을 쏘아냈다.
[이, 이 놈들...]
플레이어 라스는 차지연의 번개에 환영으로 만든 수백자루 검들이 와장창 부서지는 모습에 침음했다.
군단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던 연맹군에게서 '가장 강한' 특수종이라는 별명을 얻은 존재 답게, 영혼공진까지 사용한 모리스는 결국 뇌전에 직격당해 옆에 있던 건물을 무너뜨릴 정도로 쳐박혔다.
"안돼...헌터님을 지켜라!"
이 지역의 유일한 희망이자 영웅인 모리스를 지키기 위해 연맹군이 마지막 화력을 그녀에게 퍼부었다.
성향상 연맹군을 죽이지 않는 차지연은 자신의 곁에서 계속 둥둥 떠다니고 있던 생체 병기를 사용했다.
검은 갑각으로 방어력을 확보하고 큼직하고 뭉툭한 머리 부분의 부유장치로 몸을 띄우는, 마치 거대한 스포이드를 세워둔 것 같은 이 살아있는 부유체는 그 내면에 그녀의 전격과 공명하는 강력한 소형 증폭기를 수십개 내장하고 있다.
이 추가무장 시스템은 당연히, 이브가 리하르트의 작품을 보고 그대로 적용해 온 것.
"으아악!"
"자기폭풍이다! 교신 불가!"
수십km단위로 터져나온 강력한 EMP가 일대의 모든 전자기기를 다운시켰다.
차지연은 통제를 잃고 추락하는 헬기나 타깃을 잃고 방황하는 미사일을 바라보았다.
이제 자기폭풍이 남아있는 이 권역에선 그나마 생물체들만이 자유롭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속한 군단은, 이 우주에서 생물의 정점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커허억..."
단숨에 연맹군의 방어선을 돌파한 그녀는 반파된 건물의 잔해에서, 이미 무력화된 모리스의 목을 잡고 들어올렸다.
"잘...된거다..죽여라. 차라리...이게 낫다.."
눈을 가늘게 뜬 이 중년의 백인 사내는 그녀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결국 장기말 수준으로 조종당하는 신세인건 그도 마찬가지였으니, 삶에 미련이 없던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귓가에 울리는 플레이어의 목소리 따위 이 순간엔 무시할 수 있었다. 어차피 이런 상황에서 플레이어인 라스가 가지는 강제력은 아무 의미가 없었으니까.
"...이, 이럴...수.."
그러나 차지연은 그를 죽이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을 덮은 검은 가면을 조금씩 해제했다.
하늘빛 머리칼만으로 의미심장했던 상태에서 드러난 그녀의 얼굴을 모리스가 모를리가 없었다. 지구에서도 유명했고 이곳 연맹에서는 더 유명해진 진정한 영웅. 현지인들에게는 신앙에 가까운 믿음을 받는, 자신을 희생한 영웅의 얼굴이 떡하니 있었으니까.
"끄윽...커헉.."
차지연은 목을 졸라가며 그를 소원대로 죽여주었다.
숨이 끊어져가는 그의 눈에 너무나 냉혹해진 그녀의 눈이 비쳤다. 물론 차지연은 그를 보는게 아니었다.
[...]
그의 뒤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라스를 겨냥한 것이다. 말 한마디 없으나 그 차가운 눈에 담긴 살의는 정확히 전해지게 되었다.
'우리와 이야기 한번 할까, 억울하게 이용당한 불쌍한 유닛.'
동시에, 숨이 끊어진 모리스의 몸에 침투한 감염균들은 희미해지는 그의 정신을 일깨우며 히죽이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전했다.
"하지만 저곳에서도 퇴각하게 된다면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인간놈들을 상대로 우위를 잡을 수 없소!"
"지금! 그게 중요하오?"
차지연이 더 이상 유닛이 아니게 된 모리스를 쥐도새도 모르게 회수한 사이.
카사라스의 본성에서는 제대로 한방 맞은 라스가 역정을 내며 동료들인 카르코스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아니 왜?! 하지만, 이제 그런건 중요한게 아니게 되었다.'
지금 그도 냉정한 사고를 하기가 힘들었다. 차지연을 잃어버리고, 군단의 난입으로 전선의 판도가 아예 바뀌어버린데 이어 적들의 의도를 진짜로 파악하게 되었으니까.
'일단 내 유닛들도 다른 곳으로 모으고, 전열도 재정비 해야 한다.'
다른 동족들이 군단을 향해 분기탱천할때 그는 식은땀을 흘렸다. 자신을 보는 차지연의 살의 가득한 눈이 선명했다.
유닛이 전멸하면 자신도 죽는다. 물론 지구에도 훗날 써먹으려던 유닛들이 있었지만, 이지경이 된 이상 이제 안전한건 없었다.
"전략을 처음부터 다시 짜야 하오. 저 우주괴물들의 습격으로 결국은 인간놈들만 득보고 있는 것 모르오?"
"그건 당연한 소리지. 가장 중요한건 어디를 어떻게 공격해야 하는지 정해야지. 저 괴물들의 본거지가 어딘지 알지 않소!"
그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졸지에 삼파전의 양상이 되어버린 이상, 섣부르게 움직였다가는 다른 상대에게 빌미를 줄 수밖에 없었다.
'일단 그 괴물놈들부터 공격해야 한다. 놈들은, 높은 확률로 유닛이다!'
이 와중에 라스는 이미 자신의 노선을 확실히 정했다.
자신의 유닛들을 사냥하고 심지어 역으로 이용해 자신의 숨통을 죄려는 덫으로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절대, 조금의 망설임도 타협도 없이 빠르게 정리해야 했다.
"어차피 연맹의 인간놈들은 큰 타격을 입어 당분간은 복구하기 힘들 것이니, 날뛰는 괴물들의 싹을 자르기 위해서라도 놈들의 본거지를 공격하는게 좋겠소."
아직까지는 회의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라스는 군단의 본거지를 공격하자는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피력했다.
이미 칼을 빼든데다 자존심에 큰 상처도 입은 카사라스들은, 딱히 흠잡을 구석은 없는 계획이기에 그의 계획을 승인했다.
"그렇다고 지금 전선에 투입한 병력을 뺄 수는 없으니, 이곳 본성을 지키던 군을 보내야겠군."
"어쩔 수 없소 그건."
그들은 본성의 방위 병력을 차출해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상식적으로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그만큼 몰린 그들의 사정이 좋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적들이 이곳의 좌표를 모른다고 확신하기에 내릴 수 있는 결단이었다.
그만큼 그들의 모두의 유전자에 새겨진 비밀 엄수 명령은 강력하니까. 문제는 상대가, 그 유전자마저 조작할 수 있는 거대한 생물체라는걸 아직까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