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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휴대폰에서 군단이 자란다-222화 (222/254)

222화-물고 물리는 싸움(1)

"...?"

"하나 묻고 싶은게 있어서 살려뒀어. 제안할 것도 있고."

전투가 끝난 자리, 마족들이 자신들의 고향땅을 버리고 모두 도주한 이후 이제는 군단병들만 잔뜩 남게 된 황무지.

커다란 구덩이에 기댄 상태로 정신을 차린 라몬은 분명 치명적인 일격을 맞은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존재가 완벽한 고위 마족의 언어를 구사한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꼴은 좀 너무하는군."

피식 웃은 그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았다. 지금 상반신 일부와 머리만 남은 몸은 대체 어떻게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지 신기할 정도.

다만 자신의 가슴을 관통해 벽에 고정하고 있는, 그녀가 쏘아낸 이 뾰족한 송곳을 통해 터져버린 심장 없이 자신의 생명이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굳이 많은 자원을 투자할 이유가 없었거든. 당신의 대답 여하에 따라 완전히 되살릴지, 이대로 죽게 내버려둘지 결정할거니까."

"좋다. 들어는 주지. 솔직히 궁금하기는 하니까. 가면 속에 들어있는 얼굴이, 나름 반반한 인간 계집일줄은 몰랐다."

그는 전투 중 부숴진 가면을 벗고 자신을 내려다 보는 강도연의 얼굴을 보며 쓰게 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의 목소리와 얼굴을 모두 보여준 그녀의 눈엔 흔들림이 없었다.

"왜 계속해서 날 봐줬지?"

"역시 그게 궁금했나."

강도연은 계속 담아두던 이야기를 꺼냈다. 정작 라몬은 그녀가 자신을 노려봐도 그다지 동요가 없었다.

"침략자인 네놈들이 알지 모르겠지만 사실 이 땅은 원래 끝났어야 하는게 맞는 세상이었다. 살아남은 약한 놈들도 기껏 강해졌나 싶었더니 유닛이니 뭐니 하는 괴상한 존재가 되어버렸고."

"...용사의 자폭?"

"알고 있군. 나는, 우리는 당시 대륙의 인간들을 끝의 끝으로 몰아넣었고 사실상 승리 직전까지 갔지만 결국엔 패배했다. 용사가 불러 온 희생이라는 광풍이, 우리의 마력을 역으로 잡아먹으며 단숨에 이 땅을 뒤덮었다."

옛 이야기를 하는 그의 눈이 잠시 진지해졌다. 깨어난지 단 1달이다. 오히려 그에게는, 아주 먼 일이 되어버린 용사와의 투쟁이 지금보다도 가깝게 여겨졌다.

실제로 강도연과의 싸움에 집착한 것 역시 끝내 온전한 승리를 따내지 못했던 용사를 투영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깨어나게 된 것은 사실상 덤으로 얻은 생명이었다. 그러니 미련 없이 날뛴 것 뿐이지. 챙겨야 할 백성도 땅도 없으니 더더욱. 그게 내 본질이었으니, 나는 오히려 좋았다. 단지 대적자로 고른 네가 너무 약해서 별로였지만, 역시 진화하고 성장하는 우주벌레들이라더니 성장속도는 말도 안되더군."

"...뭔가 알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네."

강도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라몬이 한 이야기, 사실 그녀 자신과 사정이 비슷한 부분도 있었다.

'이제 나는 무엇을 위해 싸우나.'

가족의 원수였던 마족들에게 복수한다는 목표는 사실상 달성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춘 수는 없는 노릇, 그러니 투쟁의 의미를 잃게 된 그녀는 다음 목표가 필요했다.

용사를 잃은 라몬이 그녀를 새로운 목적으로 삼고 날뛴 것 처럼, 최근 급격한 성장을 맛본 그녀에게는 새로운 적이 필요했다.

"내 질문의 답은 잘 들었으니, 이제 제안을 하나 할게."

"...그게 뭐지?"

"우리와 함께 할 생각이 있는지."

개인적인 감정은 내려놓고, 강도연은 공적인 일을 시작했다. 하이브마인드 신우의 명령에 따라 그에게 함께할 것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그래...그런 거였군. 너, 저 괴물들과는 역시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였나."

"한때는 그랬지. 그러나 이제는 아냐. 당신도 마찬가지일걸? 우리와 하나되는걸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마족이 아니라 군단의 일원이 되는거지."

라몬은 지금까지 군단 외에 그 누구도 모르는 강도연의 진짜 정체를 간파했으나, 이미 그에게 제안한 그녀는 신경쓰지 않았다.

"거절한다면 여기서 죽이겠어. 나는 딱히 상관없지만, 꼭 설득해보라길래."

"너도 알것 같지만 이쯤되면 죽느냐 사느냐 그건 문제가 아니다."

그가 이를 드러내고 씩 웃었다.

"대체 너희 뒤에 있는 그 거대한 존재가 원하는게 뭐냐. 기껏 나를 살려놓고서, 엿같은 집무만 보게 한다면 절대 안한다."

"그럼 잘 된거네. 앞으로 일어날 싸움, 끝없는 전쟁, 살육, 학살. 그 모든 것의 선봉에 서게 될 테니까. 원한다면 내게 복수하겠다고 다시 도전해도 좋아."

"싸울때는 간절하더니 콧대가 높아졌구나. 허나 그 콧대를 다시 부술 수 있다면 내가 거절할 이유가 없지."

당당한 강도연의 말에 라몬이 웃었다. 말한 것처럼 그는 사실 이렇게 된 이상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거기다 스스로가 원하던 흥미로운 투쟁은 물론 강도연과의 싸움까지 보장 받을 수 있다면.

"진심이야? 우리는 아마 다른 세상으로 도망친 마족들과도 싸워야 하는데."

"말했을텐데. 도망간 순간 놈들은 내 백성이 아니다. 베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다. 내 관심은, 차라리 네게 더 쏠리고 있다."

"...좋아."

그의 결단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강도연은, 가슴에 박혀 있는 송곳째로 그의 몸을 들어올렸다.

'굳이 여기로 올 필요가 없다. 그곳에 거점 둥지를 만들면 되니까.'

리하르트는 마치 거대한 하마를 닮은, 끈적한 점액질을 토해내는 둥지 확장용 군단병들을 이용해 일대에 군단의 둥지를 만들어나갔다.

새롭게 심어진 신목이 뿌리를 박으며 둥지를 견고히 만들어나가고, 곧 새로운 서브마인드를 만들 수 있는 시설도 생겨났다.

"이걸로 끝?"

그녀는 망설임 없이 라몬의 몸뚱이를 웅덩이 안에 던져넣었다. 강도연은 어딘가 후련한 기분을 느끼며, 웅덩이를 감싸는 둥지가 자라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직 끝이 아니다. 도망치지 않은 잔당들도 있고, 무엇보다 아직 지구연합군이 물러서지 않았다.'

"어째서? 그들은 이제 여기서 싸울 이유가 없는데. 지구와 마계의 연결은 이제 끊길거야. 지구인들은, 더 이상 괴물들과 싸울 필요가 없다고."

'맞는 말이지만 세상일이란 원래 복잡하지. 일단은 양분을 보충하고 쉬어라. 남은 일은 전열을 정비한 뒤, 레이나와 오윤아를 시켜서 마무리 하겠으니.'

냉정한 행정관이자 보급관이기도 한 리하르트가 군단 병력을 재조정하며, 일부 병력을 움직여 사방으로 퍼트렸다.

그 목적은 지구연합군 압박. 마족이 전멸했음을 알아챈다면 어차피 떠날 것이니, 그냥 겉으로 보이는 압박이면 충분했다.

'의외로 설득이 쉬웠군. 역시 싸움의 이유가 가장 중요한건가.'

리하르트는 강도연이 양분 공급용 촉수를 꽂고 잠든 사이 새로운 서브마인드가 꿈틀거리는 둥지를 보며 중얼거렸다.

*

"철수! 즉시 철수하라는 명령입니다!"

"두고갈 수 있는 장비는 두고...에이잇! 그냥 다 두고 몸만 빠르게 옮겨라!"

지구연합군 주둔지는 비상에 빠졌다. 상대하던 마물들이 뒤도 안돌아보고 한순간에 철수하더니, 남부에서 몰려온 거대한 군단과 전쟁을 벌이더니 패퇴하고 자취를 감춰버렸다.

졸지에 근 1년간 치열하게 싸워 온 그들은 공중에 붕 떠버렸다. 어쨌든 마물들 퇴치라는 목적은 달성했으니, 굳이 여기 남을 이유가 없었다.

하물며 마족들을 패퇴시킨 괴물들이 그 타깃을 이곳으로 돌린다면.

"하지만 만약 저 끔찍한 괴물들이 마족들처럼 게이트를 넘어 오면 어떡합니까!?"

"놈들이 이 땅에 나타난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지구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어. 앞뒤없이 모조리 먹어치우고 침략하는 놈들이 오지 않는다는건 못온다는 뜻이겠지."

"아아..."

지구연합군 북미지역 사령관은 상부의 명령을 받고 가까스로 이해한뒤 병력을 철수시켰다. 군단이 빠르게 몰려오는 탓에 장비도 다 두고 급히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잘 된건가? 그럼 이 땅은 드디어 평화를 찾은건가?'

호텔방에서 게이트를 빠져나와 복귀하는 연합군을 내려다 보던 그녀, 이자벨은 심란한 눈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플레이어인 그녀가 지금껏 줄곧 원하던 것은 단순했다. 자신의 유닛들, 그 지구인들이 지금처럼 평온하고 안전하게 살아남는 것.

"아무튼 그렇게 결정하게 되었소 성녀. 우리는 이대로 라텔님의 이름을 알리는걸 포기할 수 없소."

"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우리와는 일절 상관 없는 전쟁에 계속해서 피를 흘리겠단 말입니까?!"

"우리 에리시움도 수호자 연합을 통해, 연맹이 설립한 기구에 당당한 일원으로 가입할 수 있게 되었지. 더 넓고, 더 많은 세상에 여신의 뜻을 알릴 수 있도록."

그렇기에 성기사단 대표의 일방적인 통보는 그녀 입장에선 청천벽력이었다. 결국 계속해서 싸움을 이어나가겠다는 소리였으니까.

"아니 잠...그럼 수호자 연합도 연맹과 함께?"

그러나 그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그동안 지구의 수호신으로 활약하던 수호자 연합도 연맹의 일원으로 지금 터지고 있는 전쟁에 참가하겠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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