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휴대폰에서 군단이 자란다-220화 (220/254)

220화-흐름의 변화(9)

이길 수 있나? 역시 단 한번의 전투로 와해시키는건 힘든가?

나는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서로 모든 것을 동원해 만들어진 아슬아슬한 힘의 균형이 엎치락뒤치락을 반복하며 전황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한번에 찍어누르지 못할 것이라는건 알고 있었다. 혹시나 싶었는데, 적들의 단결과 저항이 꽤 강했다.

'하지만 그것도 지금만이다. 장담하건데, 이어지는 전투에서 놈들의 저항의지와 단결은 순식간에 깎여나갈 것이다.'

나에 비해 리하르트는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았다. 애초에 그는 아직까지도 군단의 둥지가 타격 받지 않은 이상 당연히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도 딱히 승리에 대한 의심은 없었다. 결국 남은건 과정인데, 그래서 지금도 싸우고 있는 동생 강도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화면 속에선 전투가 한창이었다. 벼락이 몰아치는 검을 휘두르는 저 마족. 처음 볼때부터 알아챘지만 역시 평범한 놈은 절대 아니었다.

'...역시 어느 정도 이상의 전장에서는 결국 형상력을 극한으로 다루는 이들의 유무나 유불리에 따라 균형이 급격히 기우는군. 양산형 병력으로 상대의 고급병종을 잡아먹는건 한계가 있어.'

"만들면 돼. 아니면 포섭하던지. 그게 우리 능력이니까."

리하르트는 변수 그 자체, 일인군단급 몇몇 강자들이 전장에 큰 영향을 끼치는게 마음에 들지 않는듯 보였지만 사실 우리가 그 분야에 대해서 조금 밀리는 것도 아니었다.

곧 전투의 결과도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당연히 아군이 놈들을 밀어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놈들이 알아서 밀리는 것이다. 군단병들은 늘 하던대로 앞으로 밀고나갈 뿐이고, 저항하던 힘이 약해진거니까,

마족들이 마치 싸우는 기계처럼 정신력과 체력이 무한했다면 모를까, 한계를 가진 몸으로 물리적인 문제인 숫자 차이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게 진짜인가? 정말로 우리가 그 마계의 괴물들을 몰아내고, 멸절시키는데 성공하는건가?

10살의 어린 나이에 속에 품었던, 그러나 힘을 가지지 못한 탓에 끝내 표출할 수 없었던 짙은 원한을 푸는게 가능한건가?

"...생각보다 감흥이 없네."

하지만 두근거리는 것 뿐, 그 이상은 없었다. 사실 예상은 했다. 지금의 나는 과거에 얽혀 있을 만큼 여유있는 상태도 아니었고, 저항할 최소한의 힘조차 없던 약자도 아니었다. 업적이라기보다는 마치 당연히 해야 하는 과제를 하나 끝낸 것 같았다.

성취감보다는 짙은 허무가 몰려왔다. 하나의 세상을 정복하는데도 고작 이정도인가?

[부족하다고 느끼는가? 진정한 군단의 주인이 되어가는군. 이브의 탐식을 말려야 할 네가 그것에 집어삼켜지면, 기껏 군단을 두조각으로 나눈 이유가 없어진다]

메시지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브에게서 탐식의 영향을 받았다라. 어쩌면 거짓은 아닐 것이다.

"내 덩치가 커졌다 한들, 그리고 여러가지 시도를 해본들 내 근본은 네 휴대폰 속에 갇혀 있을 때와 변하지 않았어. 나는 이 우주를 전부 먹어치운다. 연맹도 카사라스도 모두 다. 너도 원한다면 한손 거들도록 해. 마계 다음으로, 어느 세상을 정복할거지?"

"...장하네."

"뭐지 그 눈은? 못 믿는거야?"

곁에 있던 이브가 툴툴거렸다. 정작 나는 그런 반응은 무시한채, 이브의 말에 집중했다.

많이 변한 것 같지만 이브의 뜻은 변함 없이 한결 같았다. 단지 그 상대가 동굴 속 생물들에서 다른 행성의 지배종들로 바뀐 것 뿐이었다.

"이건 아직 극비 정보이지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반군연합에서 최근 연맹의 상층부에 접촉을 시도해 왔습니다."

"거기서요?"

"저도 자세히는...얼핏 들은 내용으로는, 그곳도 난리라고 했습니다."

연맹에 온 이후 전장까지 따라다니며 쭉 우리들을 보좌해주던 레비크 중위가 극비 정보라며 조용히 속삭였다.

그 내용은 바로 이브와, 그리고 나와 한창 싸우던 다차원 연합이 연맹에게 먼저 인류의 이름으로 손을 내민 것.

내부의 첩자를 모조리 색출해낸 탓에 현재의 자세한 사정을 모르고 있던 연맹은 다차원연합이 이미 세상과 종족간의 공고한 연합과 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저어...그래서 만약 회담이 이루어진다면 여러분도 저희 기구의 대표로 가게 되실지 모릅니다."

레비크 중위가 이 사실을 굳이 먼저 말해준건 결국 이유가 있었다.

현재 나와 이브는 지구 출신 헌터로서, 연맹이 전쟁통에 새로 설립한 기구에 소속되었다. 연맹이 손잡은 각 세력에서 자원자를 받아 구성한, 형상력을 사용하는 다종족의 초인 집단.

목적은 다차원 연합과 다르지 않았다.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니까."

"감사합니다...단장님."

걱정 말라는 내 대답에 그녀는 기꺼이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과분하게도 내게 단장이라는, 기구 내에서도 상당히 높은 직위를 주었다. 물론 내 휘하에 있는건 사실상 이브 하나 뿐이지만, 사실 군단에 합류한 차지연이 공식적으로 죽은 사람이 되어, 이제 이브를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정작 이브는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장 높은 전공을 세우고 가장 인기 많은 것도 자신인데 왜 나를 자기보다 높게 쳐주냐며 위원들 앞에서 어린애마냥 떼를 쓰고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고작 1년도 되지 않아 우주의 질서가 개편되고 있어. 우리 역할도 있겠지만 다른 이들의 영향력도 무시할 순 없지. 특히 게임의 의도말이야."

"...칫."

나는 레비크 중위가 떠난 뒤 이브에게 말했다. 정작 이브는 기분이 그리 좋지 않은 듯 코웃음을 쳤다.

이제 내가 보기에도 혼돈기를 지나서 서서히 정립되고 안정화 되어가는 세력 구도가 보였다.

연맹과 연합등 우주 인류 세력을 필두로 한, 가장 게임의 수혜를 많이 받은 세력과 게임 시스템 등장 이전까지 가장 강한 힘을 가지고 전 우주를 통제하려 들던 카사라스. 거기에 게임 그 자체이기도 한 유닛 이브.

'이걸로 충분한가? 아니면 아직도 부족한가?'

나는 아직 안심할 수 없었다. 세력 구도가 이렇게 세가지로 나뉜 것도 완전한 내 의도가 아니었고, 아직 정해져 있는 게임의 틀에서 벗어난 것 같지도 않았다.

일단은 서로가 서로를 적대하고 물어뜯으려는 이 삼파전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걸 대체 어떻게.

"어쨌든, 나는 계속해서 병력을 움직일거야. 그렇게 알아 둬."

"한가지만 물어보자 이브. 넌 정말 뭔가 느끼는게 없어?"

이브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 나는 녀석에게 한가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우리는 영웅이었다. 외계의 적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하는, 진정한 영웅. 차지연의 플레이어가 차지연에게 요구하던 모습이 바로 이것일 것이다.

거기다 아름다운 외모까지 가진 이브는 전장의 군인들에게 여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보내는 열렬한 성원을 들으면서도, 동시에 수많은 정복과 학살을 이어가는 군단의 하이브마인드로서 활동하는게 아무렇지도 않다는건 내게는 살짝 충격이었다.

"당연하지."

내가 품은 일말의 희망에도, 피식 웃은 이브는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모두 다 내 모습이야. 하이브마인드도, 헌터 이브도. 나라는 존재는 본디 그런 존재니까. 일개 군단병도 나고, 생산을 담당하는 둥지도 나고, 함선도 나야. 모습에 따라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존재. 그러니 내가 무슨 짓을 하든 틀린건 없어."

웃고 있는 이브의 얼굴 그 어느때보다 밝아보였다.

"그것이 내가 나 스스로에게 내린 정의야. 이브라는 생물은 그런 존재라고. 그 누구도 감히 나를 정의할 수 없어. 그러니, 내가 맞아."

"...나도 같은 하이브마인드로 활동하고 있지만,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네."

"순혈과 혼혈의 차이지."

내가 탄식하듯 중얼거리자, 이브는 웃으며 방을 떠났다.

계속해서 팽창하던 이브의 자아는 적어도 스스로에 대해선 이제서야 정립이 끝난 듯 보였다.

이제는 스스럼없이 혼자서 밖을 다니는 것도 그에 따른 결과다.

나에 대해 집착하는건 여전하고, 그 끝을 모르는 오만함에 사회성 박살인건 여전하지만, 적어도 다른 존재들에게 무조건적인 적의를 보이는 일은 사라졌다.

그것이 내 옆에 있는 아바타 '헌터 이브'의 정체성이었으니까.

반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에덴의 '군단 이브'는 그런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병력을 지휘하며 연합의 행성과 카사라스의 행성을 모두 타격하고 있었다.

'놈들이 결국 버티지 못하고 궤멸하여 흩어지고 있다.'

'예상한 결과잖아. 그 와중에 그놈은 또 봐주고 도망간건가? 역시 뭐라고 떠드는건지 들어야겠어.'

이제 마계에서의 첫 대규모 전면 전투도 막바지로 가고 있었다. 물론 앞으로도 여러번의 전투를 통해 확실하게 마무리를 지어야겠지만, 어쨌든 첫 전투에서 이겼다는게 중요했다.

우리는 성장할 일만 남았지만, 저들은 아마 퇴보할 일만 남았을 테니까.

그 과정에서, 나는 마족 포로 하나를 잡았다. 좀 늦은 감이 있지만 놈들의 언어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괜찮은거 맞지?'

'...더, 더 강해져야 해.'

그 이유는 강도연 때문. 이번에도 적을 베지 못한 강도연은 가면을 벗고 이를 악물었다. 눈에서 번득이는 분노와 투기에 내가 움찔할 정도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