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흐름의 변화(8)
"어쨌든 전력을 다해야 하니 나도 힘좀 썼다."
"..."
라몬은 자신과 싸우던 강도연을 보며 히죽였다.
그는 이 땅의 주인. 비록 그 일부를 통째로 군단에게 침식당하고 있지만 어쨌든 오랜 시간 유지해온 관습의 힘은 막강하다.
그의 명령에 세상이 움직였다. 본디 이 땅위 모든 것은 마왕에게 복종해야하는 것이 법칙. 지금은 플레이어니 유닛이니 나누어졌지만 어쨌든 지성체부터 일개 짐승까지 반드시 따라야 했다.
전대 마왕인 칼타스와 비교해도 강력한 권능이었다. 곧 땅과 하늘을 진동하며 몰려드는 마계의 생물들이 군단병들을 향해 덤벼들기 시작했다.
"내가 저들에게 내린 명령은 하나다. 단지 자신의 서식지를 지키라고. 아무래도 너희는 완벽한 침략자인가보군."
'자꾸 뭐라고 혼자 떠드는거야 대체.'
그의 냉소에 강도연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다만 알아듣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챌 수는 있었다.
그래서 따로 걱정은 하지 않았다. 이곳은 물론이고 군단의 둥지 역시, 고작 짐승무리의 습격으로 무력화될만큼 약하지 않으니까.
"슬슬 결착을 볼 수 있게, 오늘은 조금 더 발버둥쳐라!"
라몬은 이번에 특별한 검을 뽑아들었다. 오직 마의 정점에만 허락되는 마왕의 마검. 자신과는 다른 방향으로 성장하는 강도연의 힘을 인정하고 이제 제대로 견적을 잡고 싶어서 꺼내든 물건이었다.
'특별해 보이는 검. 하지만 특별한 무기는 우리에게도 있지 않나.'
그러나 라몬은 여기까지는 예상하지 못하고 눈이 흔들렸다. 리하르트의 명령에 맞춰서, 그녀의 뒤에 대기하고 있던 서플라이에서 무언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강도연은 신우처럼 자신의 육체를 직접 개조하는 대신, 무기를 들기로 결정했다. 4장의 날개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본인의 능력을 살려 만든 무기를.
"...재밌군."
라몬은 그녀의 곁에 둥둥 떠서 자신을 겨누고 있는 수많은 송곳들을 보고 히죽 웃었다.
"보이나 장군. 저 괴물들이, 이 땅을 침식하는 외계의 벌레들이다."
"현왕께서 자신의 대적자를 찾은 것 만으로 놀랍군요. 그것만으로 단순한 벌레들은 아닌 것 같은데."
"병력과 함께 놈들의 포격대를 우선 공격하라."
저 위에서 강도연과 벌써 3번째 일기토를 벌이고 있는 라몬을 무시한 칼타스는 봉인에서 깨워낸 또다른 고위마족에게 활동을 명령했다.
큼직한 산양의 뿔을 가지고 있던 그는 명령에 따라 하늘로 날아올랐다. 곁에는 유닛이기도 한 가고일들이 창을 들고 날개를 펼치며 따라붙었다.
'한치 앞도 예상할 수 없다.'
칼타스는 전황을 지켜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별동대의 공격이 실패했음은 이미 알고 있었다. 군단의 생산력이 어느정도인지 알고 있는 이상, 마음껏 힘을 폭사할 수 있는 지금은 비등하거나 오히려 밀어 붙이고 있는 본대의 힘이 언제까지 유지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칼타스 본인도 마왕의 명령에 모든 이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던 과거와는 달리 자신들의 결속력은 위태하다. 조금의 틈만 생겨도 금방 무너질게 뻔했다.
"신기하게도 생겼구나 괴물."
파견한 심복이 수많은 비행종들을 뚫고 상공에서 무차별적으로 포격을 뿜어내던 적과 대면한게 그때였다.
칼타스는 그곳에 집중했다. 일단 이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적들의 화력을 제압하는 것이었다.
"..."
정작 그 중심에 있던 레이나는 적의 등장에 별 신경도 쓰지 않았다.
현재 허공에 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함선체 아래에 부속품이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연산을 도와줄 보조뇌는 물론 오직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해 존재하는 부유하는 파츠들을 촉수로 연결하고, 양 손에 쥔 지팡이로 사방에 마법을 폭사하고 있었다.
"더 내버려 두면 안되겠군!"
얼굴이 일그러진 그는 레이나가 자신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지상을 향한 포격을 이어가자 망설임 없이 덤벼들었다.
응집해서 쏘아낸 마력의 탄환이 그녀를 향해 쏘아졌다.
"이놈들이..."
그러나 그의 회심의 공격은 그녀의 메인 베리어에도 닿지 못했다. 마치 서플라이의 축소판 같이 생긴, 곁을 부유하던 자동방어 시스템이 작동하여 베리어를 두른 자신의 몸을 던져 그 공격을 가로막았다.
동시에 주변에서 호위로 남아있던 상위종들이 창을 들고 그에게 덤벼들었다.
기존의 타입 스피어와는 비슷하지만 다르다.
4개의 팔로 2개의 창을 휘두르는 이 상위종들 역시 신우가 착용했던 추가무장등으로 무장해 출력과 전투력을 증가시켰다.
"끄아아악!"
상위종들만 혹은 레이나만 있었다면 상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레이나는 그의 틈을 놓치지 않고 마법을 쏘아내, 이 찰나의 순간을 간과해버린 그에게 포격을 적중시켰다.
마왕도 견디지 못하고 밀려난 일격을 제대로 준비도 못하고 직격당했으니 버틸 재간이 없다. 칼타스가 파견한 고위마족은 그 이름값에 어울리지 않게 단 일격에 육신의 절반 이상이 소멸해 버렸다.
"마수들을 동원한 것도 최후의 수단이었다. 정말로 이것이 이 마계의 마지막인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칼타스가 조용히 혀를 찼다.
어쩌면 이미 정해져 있던 결말이었을지 모르고 칼타스 본인도 알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지금 당장은 비등하게 싸우고 있다 한들 전쟁이 조금만 더 길어지면 마족들은 필패였다.
"초대형종이다...!"
"막아라. 놈들이 난입하면 진형을 지킬 수 없게 된다!"
저 멀리 흙먼지를 일으키며 소와 전갈의 형태를 띈 거대한 짐승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군단이 가장 강력한 돌격병인 초대형종을 오히려 후방에 배치해, 그들의 힘이 빠지기 시작한 순간 축차투입하며 단숨에 짓밟아 끝내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
"각하. 연락이 왔습니다."
"자네 표정만 봐도 알겠군. 전황이 좋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이제는 연합의 본부 역할은 하는 반군연합의 중심행성. 그곳에 있던 미하일은, 사색이 된 렉스의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플레이어인 렉스는 지금 자신의 유닛인 놀들이 전쟁통에 다 죽어버릴까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 이상한 봉인인지 뭔지로 통신이 차단된 것만 아니었다면 좌표를 알아내어 제대로 된 지원을 보냈을 것을."
그는 아쉽다는 듯 혀를찼다. 실제로 연합은 몇가지 문제로 마계에 유의미한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대피 작전을 실행합니까?"
"그렇게 해야겠지. 그래야 전력을 보존할 것 아닌가."
물론 다른 방법으로는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마계의 특수성을 고려해 어느정도 패배를 직감하고 있던 칼타스가 먼저 요청한 사항이기도 했다.
"잘 된것 아닌가. 어쨌든 저 괴물들이 날뛰어 줄수록 우리는 그에 맞춰 더 강해질 수 있다. 서로 뭉치고 의지하면서 말이야."
"그, 그건 그렇습니다."
"만약 그가 말한 방법까지 성공한다면 우리는 충분한 전력을 갖출 수 있는거고."
행성 하나를 잃는건 뼈아프지만 미하일은 더 큰 것을 보고 있었다.
진심이 된 다차원연합의 힘은 갈수록 강성해졌다. 그 중심에는 이든의 요정들을 비롯, 군단의 침략으로 피해를 본 이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이제 타오르는 복수심과 원망, 그리고 연합 뿐이었으니까.
미하일이 구슬릴 필요도 없이 전의를 불태우는 그들은 이제 든든한 연합의 주축이 되었다. 연합을 자신의 권력으로 쓰고 싶어 하는 미하일 입장에서는 이보다 좋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제 곧 마족들도 같은 신세가 되어 그의 힘이 되어 줄 것이다.
"방위사령관. 우리는 지금 행성을 몇개나 잃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느때보다 강성해지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지금의 우리가 그 외계인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연맹보다 약할 것 같지 않아."
"가, 각하. 설마 지금 시점에서 연맹을..."
"그들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지 않은가? 우리는 저 끔찍한 파멸의 군단과, 그들은 고대의 외계인들과 인류의 존망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심지어 그 미친 괴물들은 상대가 누구든 물어뜯고 죽이려 들지."
렉스는 그의 발언에 당황했지만 미하일은 여전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위기는 곧 기회. 그가 뼈에 새기고 있는 말이었다.
"애초에 이게 맞아. 자네는 플레이어면서, 정작 자네의 행동을 강요하는 시스템의 의도는 모르는군. 시스템은 이걸 의도한게 분명하네."
"지금 상황을 말입니까?"
"흩어져 있는 세력들이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우리와 연맹을 중심으로 하나로 뭉치고, 더 강해지지. 기존의 강자였던 오만한 고대의 외계인들도 심각성을 인지했는지 슬슬 움직이고 있고, 거기다 새롭게 등장한 괴물들이 폭발적으로 증식하고 있잖나."
수많은 별과 세력의 위치를 표시한 홀로그램 지도를 내려다 보던 미하일의 눈이 반짝였다.
그의 눈에는 지금 우여곡절 끝에 결국 3개로 갈라진 큰 흐름이 보였다.
"연맹놈들이 바보가 아니라면 지금쯤 깨달았을테니까. 이제 더 이상 인류끼리의 이념 다툼 따위은 무의미하다. 이건 종의 생존을 건 문제다."
미하일은 그 길로 급하게 연락을 돌리기 시작했다. 상대방은 최근 연맹 내부를 장악하고 카사라스와의 전쟁을 지휘하고 있는 세력 아레스.
그가 하려는 이야기는 하나였다. 연맹이, 연합에 합류하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