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흐름의 변화(5)
"그놈은 뭔가 다른 부분을 기대한 것 같지만, 이런건 아마 상상도 못할걸."
전투 장면의 데이터를 가지고 있던 리하르트는 그의 의도를 대충 알아채고 라몬을 비웃었다.
굳이 전력을 다하지 않았던 라몬은 자신과 직접 맞붙었던 강도연이나 레이나가 아직은 자신보다 아래임을 확신하고 여유를 부렸지만, 지금부터 시작될 '군단식 성장'은 그의 예상을 아늑히 빗나가게 만들 것이다.
"우선 성분부터 싹 바꾸는게 좋을 것 같군."
"그건 뭐죠?"
"이번에 군단에서 얻은 또 다른 샘플 중 하나지. 카사라스 돌격전사의 피부이자 갑주로, 군단의 갑각과 잘 결합하면 더욱 단단하고 강한 외골격을 만들 수 있다."
리하르트가 보여준 것은 이브가 최근 습득하고 군체의식에 저장한 카사라스 돌격 전사의 갑주 일부였다.
큰 덩치와 근육질의 몸으로 전위에 나서 파괴적인 무력을 보여주는 돌격전사의 특징 중 하나는 형상력을 머금은 피부조직이 변질되어 만들어지는 튼튼한 갑주.
끊임 없이 개량을 반복했던 군단의 갑각 역시 이제는 인간들의 금속공학과 맞먹을 정도로 단단해졌지만, 분명 더 발전할 여지가 있었다.
"이게 우리의 근본 아닌가? 그 무엇이든간에 적의 것도 완전한 내것으로 만들어 더 발달시킨다, 그리고 그것으로 적을 죽이는것."
"그렇죠."
"좋아. 준비가 되었다면 웅덩이 안으로 들어가라."
리하르트는 곁에 마련한 점액질을 가리켰다. 강도연을 비롯한 서브마인드들이 육체를 재구성해 다시 태어나는 것 처럼, 강도연은 다시 한번 그곳에 들어가 새로운 육체를 받고 다시 태어난다.
"형태를 크게 바꾸지는 않아서, 금방 끝날걸."
강도연의 몸은 점액질 자체인 만능세포들을 몸안에 받아들여, 분해되는 동시에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카사라스의 특성까지 흡수한 리하르트가 새롭게 개량한 갑각은 기존의 검은색 갑각에서 보다 옅어져 은색에 가까운 빛을 띄었다.
"형상력을 다룰 수 있는 상위종 이상에만 적용할 수 있다. 자동적으로 체내에 보유한 형상력을 이용해, 본신의 방어력을 극대화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그렇게 크게 변한건 느끼지 못하겠는데."
"지금 당장은 그렇겠지만, 직접 맞아보면 다를거다."
그리 오래지 않아 웅덩이 안에서 기어나오게 된 강도연은 색깔만 변한 것 같은 자신의 몸을 만지작 거렸다. 하지만 리하르트의 말대로, 지금 그녀의 몸은 그 구성성분부터가 바뀐 상태다.
"이게 끝인가요?"
"데이터를 쌓아 가는 단계일 뿐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네 싸움 방식탓에 이런식으로 도움을 주기는 상당히 까다롭다."
리하르트는 강도연의 1차 개조를 갑각의 성분을 업그레이드 하는 선에서 끝냈다.
싸움 방식이라는 말에 그녀가 살짝 움찔했다. 그녀의 방식은 어디까지나 근접 육탄전, 육체의 강함만큼이나 본인의 실력과 경험도 중요하니까.
"하지만 이쪽은 다르지."
리하르트는 레이나를 보며 히죽였다. 그가 기획한 생체 모듈로 재미 보기 힘들었던 강도연과는 달리, 레이나는 상황이 달랐으니까.
"전용 무장을 만들수도 있지. 자유롭게 썼다 버렸다를 반복하며 엄청난 화력을 끌어올 수 있는."
"당연히 거절하지 않습니다."
레이나 역시 적극적으로 이 개조를 받아들였다. 곧 리하르트가 준비한 파츠들이 그녀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마치 로봇의 부품마냥 그녀의 몸에 들러 붙고 연결되기 시작한 파츠들은 하나 하나에 동력기관이 박혀 있는 일종의 추가 무장.
모두 레이나 본인의 장점인 화력을 최대한도로 끌어올리기 위한 물건들이었다.
"명심해라. 우리의 진화는 끝이 없다. 지금 이것도 고작 한번의 테스트일 뿐. 존재하지 않는 완벽이라는 가치를 위해 그저 이전보다 더 발전하는게 우리의 목적이다."
"리하르트의 말이 맞아. 전투 한번 한번의 결과의 연연하지마. 패배하면 성장해서 다시 도전하면 끝. 결국 진정한 승리자는 살아남는자니까."
신우가 리하르트의 말에 동조했다.
결국 이렇게 전열을 정비한 군단병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표는 당연히 마왕성 함락이었다.
"...이번엔 반드시 이겨."
스멀스멀 생성되는 가면으로 얼굴을 덮어가던 강도연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한때, 그냥 건틀릿을 낀 인간의 손같던 손은 이제 없다. 완벽한 괴물의 손. 하지만 그녀는 이제 이 손이 마음에 들었다.
*
"아, 드디어 다시 오는건가."
석양이 저물어가는 시점. 마왕 라몬은 저 먼 하늘을 보고 감탄했다. 굳이 관측 마법을 써서 관측할 필요도 없었다.
상공에서 본다면 꿈틀거리는 거대한 덩어리로 보이는 어마어마한 대군세는 이미 전부터 유명했고, 그 대군세 사이사이 섞여 있는 강자들의 기운 역시 대놓고 느낄 수 있었으니까.
"저, 정말 이기는게 가능하겠...습니까? 여기를 잃으면 저희는 이제..."
그때 히죽거리며 이곳으로 몰려오는 군세를 바라보고 있는 라몬에게, 누군가가 눈치를 가득 보면서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지구인들에게는 웨어울프라는 이명으로 불리던 늑대인간 계열 마족으로, 최근 군단의 폭발적인 확장에 밀려나 버린 이들의 수장이었다.
웨어울프들만 있는게 아니었다. 이곳에는 군단의 확장에 패퇴하고 몰살당한 유닛 출신 마족들이 모여들어 겨우 버티고 있는 곳이었다.
"어리석은 말을 하는구나."
라몬은 자신에게 달려 온 그들을 보며 한껏 비웃었다.
"너희는 이제 내 백성이 아니다. 마계의 일원도 아니다. 그 잘난 플레이어들이, 저 괴물들에 대해서는 해답을 주지 않더냐."
"그, 그건..."
"..."
그의 말엔 진득한 팩트가 묻어 있었고,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유닛이 되고 플레이어와 연대하며 지성과 힘이 생긴 그들은 그덕에 라몬의 비호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 능구렁이 칼타스가 분명 말했다고 했다. 너희 유닛들이 서로 적인것은 확실하나,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서로 뭉치고 단결해야 한다고. 하지만 너희들이 그렇게 했느냐. 상급자의 지배력에서 벗어나자 마자 하는 짓은 서로 갈라져서 견제하며 인간들이나 깔짝거리는게 전부 아니였느냐."
마계의 유닛들은 군단이 영역을 넓혀가며 폭풍처럼 휘몰아쳐도 이 이상 서로 단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결국, 서로서로 경쟁자이며 적이었으니까.
설령 챕터 10으로 넘어오며 1위를 제외한 유닛들이 서로를 적대할 이유가 사라졌다 한들, 이미 머리와 자아가 성장할대로 성장한 그들의 마음속엔 욕망이 그득했다.
그러니 라몬은 이 멍청한 놈들을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곳에 있는건, 그저 이 시대의 마계에서 자신을 즐겁게 해줄 유일한 강자가 저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비록 유닛이라 하지만 우, 우리가 바로 마계의 유일한 백성들이오. 우리가 없다면 당신도, 마계의 왕도 존재할 수 없소!"
그의 냉소적인 태도에 마두귀 하나가 용기를 내어 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라몬은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이제 그딴건 상관 없다. 칼타스도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너희들을 이 자리에서 몰살하지 않는건, 네놈들이 잡것들을 상대로 죽어줘야 그 시간동안 그놈들을 상대할 수 있으니까다."
"이, 이런..."
마족들은 라몬의 선언에 절망했다. 유일한 해답은 한데 똘똘 뭉쳐서 싸우는 것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세상을 침략하고 전쟁을 벌인 군단을 상대로 조금이나마 유의미한 성과를 거둔 이들은, 이든방어전의 연합군 같이 끝까지 서로 단결하고 필사의 각오를 다진 이들 뿐이었다.
"환영 인사가 날아오는군."
그때 라몬이 허공을 가로지르는 섬광을 보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레이나가 쏘아낸 마도포격이, 수십km를 횡단하여 정확히 이곳으로 내리 꽂혔고, 그는 그것을 막아내었다.
"...!"
그러나 그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마력과 만나 허공에서 대폭발을 일으킨 포격의 위력이,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적이 성장했다. 그만큼 즐거운 싸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검은 날개! 어서 모습을 보여라!"
군단의 비행종들도, 지상군도 굳이 단신으로 날아오는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곧 자연스럽게 허공에 투기장이 생기게 되었다. 그를 멈춰세운건 고고하게 허공에 떠 있는 4장의 검은 날개.
"...모습이 변했다?"
그는 살짝 당황했다. 상대방의 모습이 많지는 않게, 그러나 적지도 않게 변했기 때문었다.
둘은 곧 거대한 충격을 일으키며 맞붙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한번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예상한 성장은 과거 자신의 대적자였던 용사가 그랬듯 판단력이나 움직임, 그리고 경험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런 소프트웨어적인 것 말고도 하드웨어에 속하는 육체까지 급격하게 스펙 업을 해온 상황.
이런 식의 성장은 꿈에도 상상 못한 라몬은 그녀의 날개와 부딪혀 흔들리는 자신의 검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