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흐름의 변화(4)
"놈들이 몰려옵니다."
"상부에선 이미 지시가 내려왔다. 철수한다. 우리는 저 괴물들과 싸울 이유가 전혀 없다!"
"철수 준비!"
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졌다. 그리고 지구연합군 주둔지는 그 즉시 철수 준비를 서둘렀다.
군단병들이 계속해서 활동 영역을 넓히며 무차별적으로 밀고 오는 가운데, 연합군측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지금 군단병들이 짓밟고 부수는 것은 지구가 아니라 마계였다. 지구인들의 원수나 마찬가지인 마계.
"굳이 새우등 터질 일 만들 필요 없지."
사령관은 분주히 움직이는 부하들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들이 보기에, 군단병들은 마족이든 지구인들이든 가리지 않고 공격하는 진정한 재앙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지구로 발빼기만 한다면 군단병들은 알아서 마족들과 싸울 것이다. 갈 곳이 없는 마족들은 이 땅에서 도망칠 수 없으니까.
지구연합군 입장에선 굳이 손대지 않고 적들을 처리할 수 있는 오히려 좋은 기회였다.
"긴급 철수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즉시 철수한다! 서둘러라!"
그들은 준비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철수했다. 버릴 수 있는 장비나 쓰레기등은 굳이 챙기지도 않았다. 그렇게 모든 병력이 철수하고 게이트까지 닫힌 자리에, 그리 오래지 않아 군단병들이 도달했다.
'드디어 우리 의도가 먹히기 시작하는군.'
리하르트는 텅텅 빈 연합군의 주둔지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골칫거리 중 하나였던 지구연합군이 이렇게 알아서 사라져주면, 이제 전쟁은 진정한 1대1 세력전으로 바뀐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동안 지구 연합군과 싸우느라 흩어져 있던 마족들이 하나로 결집하게 될텐데.'
'그걸 감수할 만큼 지금의 우리는 규모를 키워왔다. 내가 보기에, 놈들은 이미 늦었다.'
3파전 구도는 어디까지나 힘을 키울 때까지 필요했던 것일 뿐. 어차피 이 땅 전체를 먹어치우는게 목적인 이상 주축 중 하나였던 지구연합군이 눈치껏 철수하는건 바라던 일 중 하나였다.
"그래서. 불만 가득한 얼굴로 날 찾아 온 이유는 뭐지?"
이후 리하르트는 자신의 명령어대로 움직이는 수많은 군단병들에게서 신경을 끄고, 자신을 찾아 온 강도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더 강해져야겠어요."
"이해할 수 없군. 지금 네 몸에 있는 동력기관은 한계다. 그 이상 늘리는건 어차피 지금의 네가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던데."
"그건 나도 알아요. 그래도 뭔가 방법이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상 라몬에게 패배한 이후 계속해서 고민하다 찾아 온 것이다.
"솔직히 의외로군. 성격상 이런 방식을 택할 것 같지는 않았는데."
리하르트는 놀랍다는 듯 작게 감탄했다. 지금까지 보여 준 강도연의 성격상. 강해지기 위해 스스로 수련하고 단련할 줄 알았으니까. 실제로 계속해서 투자 받은 강도연은 늘 자신이 먼저 성장하고 난 이후에서야 육체를 개조받았다.
"생각을 조금 바꾼 것 뿐이야. 우리의 강점이 따로 있는데 굳이 한가지 길만 고집해야 하나 싶어서.
"그 말은, 틀린 말이 아니로군. 우리는, 인간의 관점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그래야 진정한 진화를 이룩할 수 있어."
그녀의 발언이 마음에 들었던 리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는 형상력 자체를 그리 좋게 보지 않았다. 형상력과 함께 따라 붙는 성장이니 경지니 하는 개념들도 부정적으로 보았다.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는 했지만, 군단의 진정한 장점은 형상력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과속성장, 자유자재로 조작할 수 있는 세포분열, 그리고 그 분열의 토대가 되어 줄 수 있는 수많은 데이터까지."
"가능한거지요?"
강도연은 이미 결단을 내렸다. 주어진 무기를 쓰지 않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생각해둔게 없지는 않지."
리하르트는 히죽 웃었다. 마침 상위종 이상의 군단병을 대상으로 구상하고 있던게 있었는데 이렇게 자발적으로 실험체가 찾아왔으니까.
*
"딱히 내가 막아설 명분이나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나는 두 사람의 눈빛에 살짝 당황했다. 리하트도 그렇고, 동생 강도연도 결연한 표정으로 내게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내가 설계한 상위종 육체 개조의 개념은 파츠와 결합을 베이스로 한 로봇공학의 접목이다. 알고 있겠지만 우리 군단은 만능세포의 존재로 생물로서 가진 모든 능력을 100% 끌어내어 활용할 수 있지. 이렇게 고도로 발달한 생명공학이라면, 마치 로봇처럼 개조해서 다룰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일단 이 시스템의 장점은...."
또다시 연구욕을 불태우는 리하르트는 또! 내가 못알아들을 소리를 줄줄 늘여놓으며 자신의 실험에 대해 설명했다.
"잠깐, 대충 이해는 하겠지만 역시 뭔가 살짝 부족한데. 군체의식으로 자료를 공유해봤자 나는 그걸 읽고 해독할 능력이 없어."
"그럴 줄 알고 시제품...아니 시험체를 만들어 봤다. 양산형 병력들도 환경과 용도에 따라 조금씩 개조되고 진화하는데 상위종이라고 그렇게 못할 것 없지."
내가 고개를 젓자 리하르트는 기다렸다는 손을 들어 딱, 하고 튕겼다. 동시에 우리가 있던 둥지 내부가 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진동했다.
"이건 뭐지? 외형은 1번대 대형종 크롤러 같은데."
"내게 권한이 없어 상위종을 대상으로는 실험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 생각에, 조건은 충분하다. 이녀석은 양산형 대형종이지만, 뭔가 다름이 느껴지지 않나?"
"뇌를 가지고 있군. 설마."
살짝 놀란 내 눈이 조금 커졌다. 서열상 이브와 함께 최고위에 있는 나는 군단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내 눈에 이 크롤러의 몸 속에 존재하는 뇌가 보였다. 다른 군단병들에게는 굳이 존재하지 않는 기관이.
"이녀석은 한때 지구인들이 레드페이스라고 부르던 고블린이었다. 복수심을 가지고 군단병으로 다시 태어나, 스스로 성장하며 여기까지 온 것이다."
"잊고 있었어. 그동안 별로 효율이 나오지 않아서."
나는 우리가 마계에 처음 발디딜때 부족한 병력을 충원한 방법을 떠올렸다. 설마하니 정말로 소형인 고블린에서 여기까지 성장하다니.
"어쨌든 나는 이 개체를 대상으로 새로운 병력 강화 시스템을 시험했다."
다만 지금 이 자리는 단순히 이 특별한 크롤러를 소개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리하르트가 재차 손가락을 튕기자, 다시 한번 둥지가 쩍 갈라지며 무언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팔을 한쌍 더 달았다. 근육을 재조정하고 머리부분과 흉부의 방어력을 증강시킬 새로운 무장을 장착시켰다."
새롭게 등장한건 한쌍의 팔을 비롯한, 말 그대로 '파츠'들이었다. 크롤러가 팔 하나를 잡아 자기 겨드랑이 부분에 가져다 대자, 접촉면의 세포들이 제멋대로 분열하고 사멸하며 결합면을 만들었다.
그렇게 팔 2개를 추가로 장착한 녀석이 팔들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땅을 쿵쿵거렸다.
"단순히 팔을 더 다는 것으로 끝날까? 날개를 달 수도 필요한 기관들을 더 달수도 있다. 하물며 동력기관을 이용하는 상위종이라면 개조의 범위는 더 넓어진다. 레이나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마력을 극대화 하는지도 지켜보았다. 서플라이에 몸을 연결해 에너지를 공급 받는 것보다는, 그냥 자기 전용의 무장을 추가로 만들어 장착하는게 좋을 텐데."
"무슨 뜻인지 이제 확실히 알았어."
나는 리하르트의 말에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설계한 이 강화시스템은 새롭게 정립한 양산형 시스템만큼 효율적이고 획기적이라 단언했다. 이브도 당연히 주목할 것이다.
'너무 나가는거 아냐 이거.'
순간 흠칫할 정도였다. 현재 우리 군단에서 두뇌를 맡고 있는 리하르트가 너무 유능하다. 그를 내가 영입하는건, 즉 그가 군단에 합류하는건 내가 하이브마인드가 되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
이 역시 본래의 '흐름'에 없었던 이벤트였다.
혹시 그의 유능함 때문에, 이브가 본래의 흐름보다 더 강해진다면. 그래서 막을 수 없게된다면?
[글쎄. 그건 지금은 그다지 필요치 않은 고민이다. 흐름의 변화에 속하는건 너희만 그런게 아니니까]
"아직은 괜찮단건가? 하긴 이제는 어차피 너희도 모르겠지."
눈앞에 아른거리는 메시지에 헛웃음이 나왔다. 흐름이 달라졌다면 어차피 이제 미래를 아는 존재는 그 누구도 없을 테니까.
"그래서, 허락 한거지?"
"네 결심이 굳건하다면 해봐. 네가 강해지겠다는 이유, 그걸 아는데 내가 어떻게 막을까."
"생각을 바꾸기로 했어. 군단은, 우리는 괴물이 아니야. 그러니 나는 괴물이 아니야. 내 몸이 어떻게 되든 괴물이 되는게 아닌거지."
강도연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동생은 또 한번 성장한 셈이다. 군단의 힘을 받아 강해진 스스로를 괴물이라 부르며 마음의 짐을 안고 싸우던 녀석이 이제는 스스로가 괴물이 아니라고 여기며 반대로 이것이 옳은 것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니까.
드디어, 애매하게 걸쳐져 있던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확립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