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흐름의 변화(3)
'현 마왕인 라몬이 이길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그에게 더 이상 이 마계라는 땅은 가치가 없어졌다.'
칼타스는 전투를 지켜보면서도, 마왕인 라몬을 믿지 않았다. 마왕은 마계의 주인이자 마계 그 자체.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살아남은 마족들은 대다수가 유닛이 되어 법칙을 벗어났고 이제는 이 땅마저 외계에서 온 군단에 의해 침식당하고 있었다.
이 땅의 백성들도, 이 땅 자체도 그 본질을 잃고 흐려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 과연 마왕이라는 신분이 의미가 있을지 칼타스 본인도 회의적이었다.
그리고 설령 잠들어 있는 다른 고위마족들을 모조리 깨운다 한들 그들은 한줌에 불과하다. 흐름을 바꾸는건 결국 불가능하다는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대체 뭘 어쩌려는 것인가?]
"어차피 유닛들은 자기들 살아야 하니 연합에 붙을 수밖에 없다. 우리와 싸우던 지구인들도 우리가 패퇴하면 굳이 이 땅에 있을 이유가 없다. 일단은 끝까지 싸우려 할 것이나, 만약 패퇴한다면 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연합으로 떠날 것이다. 마족은 마계에만 살아야 한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가 가는 곳이 마계다. 대륙을 정복하고 마계로 만든 것 처럼."
칼타스는 이미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단순한 이민은 그의 계획이 아니었다.
"연합군에게 저 괴물들에게 맞설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줄 것이다. 압도적인 숫자는 그에 걸맞는 숫자를 보여줄 수 있게."
[서, 설마...]
아스랄드는 그의 중얼거림에 순간 불안함을 느끼고 중얼거렸으나, 칼타스는 흔들림이 없었다. 변수. 어떤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변수가 급격하게 생겨나기 시작했다.
"연합의 총통에게 연결해라. 긴히 할 말이 있으니."
그는 자신의 보좌에게 지금 당장 연락책인 놀들의 왕을 불러오라 지시했다.
"할 이야기가 있다고 들었소. 이미 그대의 제안대로 연합은 더욱 공고해졌소. 비록 이든방어전은 패배했지만. 우리는 더 긴밀하게 연동하여 빠르고 적절하게 대응하고 있소만."
"내가 하려는 말은 그런게 아니다."
연합의 중추이자 기둥인 인류세력을 이끌고 있는 총통 미하일이, 칼타스와 다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다소 의외라던 미하일은 칼타스의 말에 순간 흠칫했다.
"놈들은 끊임없이 진화하고, 그 숫자를 불리는 강력한 힘을 가졌지. 기존의 방식으로 공략이 힘들다면 나는 다른 방법들을 추천하려 한다."
칼타스는 눈앞에 아스랄드의 두개골을 들어서 보여주었다. 그 장면은 화면을 통해 보고 있던 플레이어 렉스에게 전달되었고, 렉스는 그것을 그대로 미하일에게 말해주었다.
"우리 마계는 아마 머지않아 최후의 결전을 벌이게 될수도 있다. 그렇다면 미리 합의한대로 유사시 대량의 유닛들이 이곳을 떠나 너희가 제공한 세상으로 이주할 수 있게 되겠지. 다만 그건 도망치는 것 뿐이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우리가 놈들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다는거지? 놈들은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소. 특히 그 생산력은 우리와 비교할수가 없소. 우리가 한명을 희생시켜 놈들 10마리를 잡는다 한들 우리가 손해인데."
"그것을 위한 방법이다."
[???]
칼타스는 재차 아스랄드의 머리를 보여주었다. 그의 의도는, 아스랄드가 가진 사령술을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군단병에 온전히 맞설 수 있는 불사의 군단을.
"생각해보지 않은건 아니오."
다만 미하일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이미 비슷한 사항에 대한 이야기가 연합 내부에서도 계속 나오고 있었다.
"엘던의 요정들이 부린다는 정령군단. 코치아의 마법사들이 부린다는 흙골렘 군단. 거기다 우리가 기획했던 대규모 자동 로봇과 안드로이드 군단까지. 하지만 이 모든 수단을 동원해도, 동시다발적인 여러 병력을 기본 수천만 단위로 운용하는 저 괴물들을 상대할 순 없소."
"길은 서로 합치거나 찾다보면 답은 나오는게 뻔하다. 지금은, 그런 세상이니까."
칼타스는 미하일의 말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믿고 있었다.
우연히 봉인에서 풀린 이후 그동안 자신이 직접 몸으로 경험하며 깨우친 것들이었다. 지금 상황은 정말 무슨 일이 벌어져도 불가능하지 않은 세상이라는 것을.
"그렇다면 한번 이야기 나눠보지."
미하일은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사실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반쯤 날림으로 처리하는 것과는 달리, 그 내용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본래라면 서로 얼굴도 모르고 있었을 두 세력이 진심을 다해 뜻을 모으고 합치했다. 이것은 신우가 마계를 공격한 스노우볼이자, 또다시 터져나온 강력한 변수였다.
*
'큭...'
"가진 힘은 커다랗다. 하지만 그것 뿐이구나. 경험대로 움직이는데, 그 경험마저 부족한 느낌이다."
칼타스가 중대한 결정을 내리고 미하일과 차후의 일에 대해서 논의하던 사이.
마왕 라몬은 강도연과의 전투를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다. 그가 휘두른 마력을 두른 검을, 그녀는 가까스로 교차해 막아내었다.
실력차이는 명확했다. 강도연은 분명 군단에게 받은 투자로 가장 강력한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그리고 그 육체를 다룰 자격도 갖추고 있었지만 아직 실력이 미숙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마왕 라몬은 다르다. 그는 오직 자신의 힘으로 전대 마왕 칼타스의 인정을 받아 그 뒤를 이은 최강자. 비록 자폭에 가까운 봉인에 당해버렸지만 이세계에서 온 용사마저 패퇴시키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존재였다.
"이런."
그때 저 멀리서 쏘아진 마도포격이 그에게 적중해 뒤로 밀어버렸다. 그런 그를 상대로 강도연이 버티고 있는 것은, 저 멀리서 시기적절하게 꽂히는 레이나의 지원 사격 덕분이었다.
'너무 강해. 지금까지 만났던 그 누구보다도.'
그렇게 조금의 시간을 벌때마다 강도연은 가면 속에서 식은땀을 흘렸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척살권에도 맞아봤다. 그리고 이 몸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 몸이었다.
다만 패배하는 것이 두려울 뿐이었다. 이미 레이나가 증언해 주었다. 패배가 두려운 이유는 마음이 꺾이기 때문이라고.
자기 자신의 신념과 감정이 상대보다 못하다는 사실은 자신의 동력을 잡아먹는다고.
"더 거세게 덤벼봐라."
그녀의 속을 알 턱이 없는 라몬은 검을 휘둘러 참격을 쏘아냈다.
반월의 푸른 참격을 향해, 그녀가 날개를 휘둘러 발산한 4개의 검붉은 참격이 날아가 충돌하며 상쇄되었다.
"그렇지."
히죽 웃은 라몬이 이번에는 그녀를 향해 손을 겨누고 마법을 시전했다. 쏘아진 거대한 섬광을, 그녀는 베리어의 출력을 최대로 올리는 것으로 가까스로 상쇄해냈다.
그러나 그가 가볍게 쏘아본 마법에도 금이 쩍쩍 간 베리어는 위태했다.
'군단은, 전쟁은 이기겠지. 하지만 여기서 나는 패배한다.'
'다시 가죠. 이번에는 제가 2연격으로 포격할테니 그 틈을.'
강도연이 이를 악문사이, 레이나가 다시 한번 마법을 쏘아냈다.
다른 상위종들이 서로 연계하는 것 처럼 두 사람의 호흡은 완벽하다. 연결된 군체의식을 통한 소통은 그만큼 빠르고 정확하니까.
허공에 띄운 거대한 마법사의 눈을 통해 전장 어느곳이든 정확히 타겟팅을 할 수 있는 레이나가 다시 한번 우주권의 함선도 저격하는 직사포를 쏘아냈다.
라몬은 마력을 끌어올려 방어했다. 스치기만해도 어지간한 존재는 녹아버리거나 타버릴 위력에도 그는 굳건하게 버티고 서서 약간 밀려나는 것으로 끝냈다.
"왜 칼타스가 그렇게 경계했는지 알것 같다."
레이나의 포격 이후 조금의 빈틈도 없이 치고들어오는 강도연의 공격에 혀를 찬 라몬은 다시 한번 뒤로 밀려났다.
전투는 사실 이미 끝난 상태였다. 군단의 물결을 견디지 못한 지상의 마두귀들이 싹 쓸려나가며, 이제 이 지역에서 남은건 라몬 하나뿐이었다.
아무리 그라도 단신으로 수천 수만을 넘어선 대병력을 상대할 수는 없다. 균형이 깨졌으니, 그는 자기 자신의 승패가 어떻든 전쟁에서는 패배한 셈이었다.
"다음에 보지."
그래서 그는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어차피 그는 싸우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일 뿐, 상대를 반드시 죽이거나 전쟁에서 승리하고자 온 것은 아니었다.
'미친 새끼.'
비록 말은 알아듣지 못해도 그 분위기나 어투는 읽을 수 있다. 그를 상대로 필사적으로 싸웠던 강도연은 그대로 떠나가는 그를 보며 어이가 없어 혀를 찼다.
'이상한 놈이기는 해.'
'뭐라고 계속 떠들면서, 전력을 다하지도 않았어. 대체 뭐 하는 놈이야?!'
'...일단 승리했으니 화를 식혀. 우리는 계속해서 진군한다. 놈들이 우리를 진심으로 막아설 때까지.'
신우는 열받은 그녀를 달래면서 계속해서 병력을 전진시킬 것을 지시했다.
애초의 계획은 적의 격렬한 저항을 받는 곳에서 전선을 형성하고 제대로 된 공방전을 벌이는 것이었으니까. 만약 상대가 막는걸 포기하겠다면, 그냥 끝까지 밀어버리면 그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