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검은 번개(5)
'휘둘리기만 했지만, 이제는 아무 상관 없어졌어.'
그녀는 다른 서브마인드들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웅덩이에 몸을 넣었다. 지금 바라는 건 단 하나였다. 어차피 덤으로 얻은 생명이니까.
"정말 기회를 주는거지? 다른건 몰라도 그놈들을 '진정한 내 의지'로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당연히. 그것만큼은 완벽히 보장해."
이브는 그녀의 바람을 들어줄 생각이었다. 애초에 그 복수심, 그것을 위해서 서브마인드로 만든 것이니까. 그러나 그 대가로, 차지연은 자신의 모든 것을 이브에게 주어야 했다.
"아."
웅덩이의 만능세포들이 제 역할을 하기 시작하자, 그녀의 몸이 담가져 있던 다리부터 분해되어 균형을 잃고 풍덩 빠져버렸다.
웅덩이 주변의 둥지가 움직여 꿈틀거리는 육벽이 그 위를 덮고 하나의 특수한 둥지가 되는 것으로 그녀를 다시 태어나게 만들 준비는 끝났다.
'그녀에서만 끝내고 싶지 않아.'
그러나 이브는 차지연을 손에 넣은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어느새 몇몇 아바타가 천천히 곁으로 다가왔다.
모두 이브 본인이 조종하는 평범한 상위종 스펙의 아바타지만, 그 모양새는 기존의 상위종과는 어딘가 달랐다. 전부 카사라스 기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멍청한 놈이 벌이고 있는 수작질, 전부 잡아먹어야겠어.'
이미 타깃을 정한 이브가 히죽 웃었다. 사실 차지연 말고도 이용당하고 있는 에볼루션 소속 헌터들이 몇 있었다.
지구에서 추가로 차출되기까지 할 그들을 이브는 이렇게 자신이 잡아먹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설령 실패해도 상관 없었다. 배신이란 존재해선 안되는 그들의 명령체계에 큰 흠집을 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면 목적이 바뀌는건가?"
'맞아. 원래는 연합을 계속 공격할 생각이었지만, 그 시퍼런 외계인들이 연맹을 공격하고 있는 지금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차지연을 새롭게 손에 넣으며, 이브는 자신의 계획을 조금 수정했다.
본래는 이미 한번 승리를 거둔 방식으로 연합을 계속해서 공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발발한 연맹과 카사라스의 싸움이 예상외로 커지고 처절한 전면전 양상을 자신이 직접 겪으면서 그 생각이 바뀌었다.
'서로 싸우느라 힘빠져서 무주공산인 곳을 그대로 먹어치운다.'
심지어 연맹의 행성들은 따로 침투조를 보낼 필요도 없이 헌터로 이곳저곳 다니며 활발히 활동하는 이브에게 자신들의 게이트 좌표를 모조리 공개한지 오래.
훗날을 대비해 따놓은 게이트 좌표를 자신의 휘하에 있는 모든 행성에 열어버릴 준비를 한 이브는 어서 그 대규모 군단을 이끌어 줄 새로운 군단장의 탄생만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먼저 공격할 곳은 그 외계인들이 자기들이 이긴줄 알고 안심하고 있을 곳들부터.'
이미 모든 계획을 다 짜둔 이브가 지정한 첫번째 타깃은 현재 카사라스의 군대가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 직전인 한 변경의 행성이었다.
*
"모레스님. 저희는 정말 장비만 파괴하고 가는 겁니까?"
"그렇다. 어차피 우리 목적은 도망간 인간놈들의 군대를 무력화 시키는 것 아닌가. 인간들은 도구가 없으면 본성의 길짐승보다도 약하다."
"하지만 저희가 들은 명령대로라면..."
"나도! 라스와 같은 카르코스다!"
얌전히 듣고 있던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갑작스럽게 발끈하자, 찾아왔던 기사 몇이 크게 놀라 움찔거렸다.
"라스는 모든 인간들을 학살하라고 말했지. 하지만 그건 불필요하고 소용없는 짓이다. 인간놈들의 군대를 무력화시키는 것은 나도 동의하고 상당히 합리적인 방법이라 생각하지만 다른건 아니다!"
"그, 그렇습니다."
"명예와 긍지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큰일났습니다!"
그러나 열받은 그가 계속해서 언성을 높이려는 찰나 급박한 보고가 들어왔다. 또다시 방해를 받은 모레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문제가 뭐냐. 설마 인간놈들의 지원군이라도 온 것인가?"
"이, 인간들이 아닙니다..! 그 괴물들은 끔찍하고 잔혹한..."
정작 소식을 듣고 뛰어들어 온 하급전사는 굉장히 놀랐는지, 상급자들의 지배력에도 덜 짓눌리면서 허둥거렸다.
"괴물?"
"띄워보겠습니다."
곧 그의 앞에 화면 하나가 펼쳐졌다. 그리고 그 순간 모두가 말을 잃었다.
허공에, 바닥에 열린 여러개의 게이트들. 그리고 그 게이트에서 쏟아져 내리는 수많은 괴물들.
"..."
그 가운데에 그녀가 있었다. 붉은 안광이 번득이는 가면을 쓴, 검은 갑주 같은 갑각을 두른 여체가.
파직거리는 검붉은 뇌전을 전신에 몰아치는 그녀는 방금 전 잡아 뜯은 카사라스 기사의 머리를 떨어트리고 발로 짓밟았다.
"...모레스님. 지금 저 괴물들이 땅과 하늘을 뒤덮으며 이곳으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함대, 함대에게 어서 저곳을 폭격하라고 말해라!"
당황하다 못해 경악한 모레스는 침착함을 잃었다. 그야 당연히 이런 광경은 본적도 없고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으니까.
그들 종족은 분명 최근 활동을 시작한 군단에 대해 정보를 가지고 있었지만, 연맹에서 떨어져 나간 연합과 투닥거리는 일개 집단으로 봤을 뿐이었다.
"하, 함대도 지금 공격 받고 있다 합니다."
"뭐라...?"
이곳의 총지휘관인 모레스는 당황스러움에 비틀거렸다. 그나마 믿을 수 있던, 제공권을 꽉 쥐고 있던 함대 역시 지금 외우주에서 워프해온 군단의 함선체들에게 습격당한 상태.
사실상 군단과의 전투가, 아니 애초에 이런 전쟁 자체가 처음인 카사라스의 군대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속절없이 밀리기 시작했다.
'이제 시작일 뿐이지. 전부 밀어버려. 네가 할 일은 하나야. 저 외계인 놈들을 죽이는 것.'
곁을 뛰어가는 대형종 크롤러 곁에서, 차지연은 미친듯이 앞으로만 달리는 군단병들이 마치 해일처럼 마주치는 적들을 쓸어버리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저 하늘에서는 빠르게 출격한 적들의 전투기들이 하늘에 빼곡한 비행종들의 습격으로 격추당해 떨어지는 모습도 보였다.
동정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다. 이제 자신은 더이상 지키는 쪽이 아니었다. 죽이는 쪽이었다.
오히려 죽임으로서, 지킬 수 있다. 그 사실이 그녀의 감정을 고양시켰다.
'놈들의 정확한 위치가 확인되었다.'
이브가 펼쳐진 군단병들을 이용해 수집한 정보를 이용해 상대의 정보를 알려주었다.
차지연은 그 정보들 중, 지금 자신이 어딜 가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기사보다도 더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갑주를 입고 있는 존재가 지금 밖으로 나와 주위를 보며 전장을 지휘하고 있었다.
"저기로 간다."
그녀는 단번에 하늘로 날아올랐다. 카사라스라는 종족이 어떤 구조로 되어있는지 이제 잘 안다. 상위존재가 하위존재가 태생부터 나뉘어져 있는 이들.
그렇기에 가장 높은 신분을 제거하면, 그만큼 즉각적인 움직임에 브레이크가 걸릴 테니까.
"넌, 뭐냐."
본대가 들이치기 직전 그녀가 상위종 일부를 데리고 그들이 모여있던 곳으로 난입하자, 무언가를 직감한 모레스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당연히 그녀는 답을 해주진 않았지만 분노와 살의를 숨기지도 않았다.
끌어올린 강력한 전격이 쏟아지자, 기겁한 모레스는 자신같은 최상위 계급에게 허락된 힘을 끌어올려 사용했다.
기사계급들보다도 더 강력하여 푸른 색까지 띄고 있는 에너지가, 그녀가 폭사한 전격을 막아내었다. 심상치 않은 힘에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카라코스의 샘플도 있으면 좋아. 가능한 생포했으면 좋겠는데.'
이브는 동시에 차지연에게 생포를 명령했다. 마치 그녀가 질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듯이 당연하게.
"이, 이런..."
모레스가 당황해서 주춤거렸다.
차지연은 다시 태어난 육체에서 받은 출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곧 공중으로 떠오른 그 몸에서, 번쩍이는 뇌전이 수백미터 가까이 퍼져나가더니 거대한 힘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사실 지금껏 이브가 서브마인드로 만들어 온 인물들은 지휘관인 리암을 제외하면 이브가 오직 성장 가능성 하나만을 보고 투자한 것이다.
하지만 차지연은 달랐다. 그녀는 일개 여학생이나 하급 마법사가 아닌 S급에 준하던 강력한 헌터.
시작값부터 다른 능력치는 이브가 해준 지원과 만나 엄청난 시너지를 일으켰다.
"전부 후퇴하라!"
모레스는 그녀의 힘을 감당할 수 없다고 빠르게 판단했으나, 차지연이 끌어모은 전격을 쏟아내는게 더 빨랐다.
뇌격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폭풍이 일대를 덮쳤다.
"크아악..."
전력을 다해 힘을 끌어올린 모레스도 속절없이 밀려 날아갔다.
애초에 그 하나를 저격한 일격이 아니라, 이 일대에서 덤벼들던 모든 적들을 날려버릴 의도로 쏟아부운 힘이었다.
[...출력도 경험도 모든 서브마인드들 중 가장 강한 것 같군]
'경력직이 이렇게 좋은건가?'
이브는 여유를 부렸다. 상대가 자신을 전혀 생각치 못하고 있던 점에서부터 이미 승리를 예측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