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검은 번개(4)
[지금까지 해오던 것과 같다. 하지만, 조금 더 서두를 필요가 있겠군]
차지연의 플레이어, 카사라스 플레이어 라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상황을 만들고 조작하고 있었다.
그도 차지연의 마음가짐이 조금 변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직전에 무슨 일이 있어 그렇게 되었는지 역시도.
하지만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유닛은 더더욱 아니었다. 굳이 더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구조적으로 차지연은 자신의 뜻대로 죽고 살아야 하는 존재였으니까.
"너무...많아!"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까지도 그래왔지만 이번엔 적들의 공격이 더 거셌다. 이미 이 지역의 제공권은 그들이 가져갔고 지상군도 마구잡이로 쏟아져 왔다.
'설마.'
이런 상황이니 차지연은 최악의 가능성을 상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녀가 지키고 있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 이들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가정을.
[인간들은 곁에 있던 동족들을 잃고, 두려워하며, 동시에 자신을 지켜준 영웅을 더욱더 숭배하겠지]
그리고 그녀의 가정은 맞아 떨어졌다. 라스는 현장의 병력에게 명령을 내려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숫자 이상을 투입, 끝끝내 사람들 중 일부를 해칠 생각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버텨주십시오. 지금 그곳으로 지원이 가고 있습니다..!"
차지연의 통신기에서 다급한 통신이 울렸다. 지원이 가고 있다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아무리 힘을 쏟아 붇는다 해도 시간이 부족했다.
[이게 무슨...당장 멈춰라! 기사!]
라스마저 당황한 사건이 터진게 바로 그때였다.
근처 건물을 박차고 하늘을 가르며, 땅으로 쇄도한건 한명의 카사라스 기사. 황금색 눈을 번득이는 그 기사가, 그녀를 눈앞에 두고선 검을 들더니 히죽 웃었다.
[이건 말도 안 돼!!!]
패닉에 빠진 라스가 경악했다. 그 기사는 엄연히 상급자인 자신의 명령을 조금도 듣지 않았으니까.
카사라스라는 종족 자체의 법칙이자 근간을 뒤흔드는 이 모습은 라스에겐 하늘이 뒤집어지는 것 이상의 충격을 주었다.
[당장 저놈을 막아라!]
카사라스 병력들의 타깃이 바뀌었다. 그들은 갑작스럽게 난입한 정체불명의 기사를 향해 덤벼들었다.
하지만 기사가 더 빨랐다. 기사는 자신에게 들러붙으려는 이들을 피하며 땅을 박차고는, 들고 있던 검을 휘두르며 차지연에게 덤벼들었다.
"설마."
차지연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늘 냉혹하게 자신을 도구로 써온 플레이어, 라스도 통제하지 못할 긴급 상황이라는건 단숨에 알아챌 수 있었다.
이내 무언가를 각오한 그녀가 다시 한번 몸에 전격을 끌어올렸다.
"와라!"
차지연은 끌어올린 거대한 뇌전을 자신에게 달려드는 기사를 향해 뿜어내었다. 문득 그녀의 뇌리에, 반드시 도와주겠다는 그의 말이 스쳤다.
염동력이라는 형상력을 가지고 있는 카사라스의 기사들은 무기를 일체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이는 검을 빗겨들고, 마치 검사처럼 바닥을 뛰어오고 있었다.
'고마워.'
그녀는 뇌전을 쏘아내는 그때 희미하게 웃었다. 그동안 플레이어의 손 안에서 놀아나기만 했던 존재가, 이번엔 그 플레이어를 상대로 한번 먹이는 순간이었다.
황금색 눈에서 순간 붉은 빛을 일렁인 기사는 자신에게 쏘아진 전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공명법의 원리대로, 쏘아진 이 강력한 전격은 사용자를 공격하는 대신 그 힘을 일부 공명하며 증폭함과 동시에 검에 베여 수십 수백줄기로 갈라져 뒤쪽으로 퍼지며 사방에 뿌려지기 시작했다.
[이놈이...!!]
이렇게 갈라진 전격들은 뒤를 쫓던 수많은 카사라스의 병력들을 일순간에 감전시키고 태워버렸다.
순간적으로 이제 현장에 남은건 차지연과 기사 단 둘뿐. 플레이어 라스는 이 짧은 순간 현장에 대한 주도권을 상실했다.
"안 돼!!"
"헌터님!"
차지연은 라스가 이렇게 패닉에 빠진 사이 자의로 움직였다. 자신을 부르짖는 사람들을 뒤에 두고 전격을 폭사하며 앞으로 내달렸다.
'이곳이, 내가 죽어야 할 곳이야.'
그녀는 달려가면서도 웃었다. 해방감이 터져나왔다. 그녀의 결단을 알아채고 경악한 라스가 막아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커헉..."
"..."
번쩍이는 전격을 둘러 푸르게 물든 그녀의 손이 기사의 어깨를 관통함과 동시에, 검붉은 불꽃을 일렁인 카사라스 기사의 검은 나노 슈트를 부수고 그녀의 배를 관통했다.
"너, 너어..."
'영웅으로 잠들어라. 그리고 충실한 군단의 검으로 다시 깨어나라.'
차지연은 말을 잇지 못했다. 토해낸 핏덩이와 함께 의식이 빠르게 흐려졌다.
동시에, 꿰뚫린 상처로 군단의 감염균이 빠르게 주입되며 그녀의 몸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겁니다. 저 빌어먹을 외계인 놈들에게."
"병사들의 사기는 이미 충분합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피난하던 민간인이든 연맹의 군인이든 모두가 분노하고 슬퍼했다.
희생자들은 꾸준히 나오고 있었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이 전쟁으로 죽었다. 유명한 영웅의 희생은 안그래도 타오르는 사람들의 의지에 불을 지르기 좋은 기름이었다.
"...힘, 내십시오."
장교 중 한명이 내 등을 두드리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말 없이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이곳은 차지연의 유품을 급히 수습해 온 후방의 대피시설.
차지연의 죽음으로 플레이어가 당황한건지 몰라도 적들의 공세가 더 심해졌다. 하지만 현지 사람들은 오히려 더욱 더 전의를 불태웠다. 민간인들 역시, 그녀를 추모하며 슬퍼하기보다는 자기들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잘 끝난거, 맞지?'
'그래. 남은건 뒷일을 수습하는 것 뿐.'
내가 보는 화면 속에서는 부상을 치료한 이브가 현장에서 폭격과 화재등으로 미처 수습하지 못하고 소실된 것으로 알려진 그녀의 시신을 들고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이브는 인적 없는 곳에서 미리 따 둔 게이트의 좌표를 이용, 본성인 에덴으로 향하는 문을 열고 그곳에 차지연의 시신을 던졌다.
"인계 완료."
게이트가 닫히고, 바닥에 널브러진 그녀의 시신을 수습한건 그곳에 있던 또 하나의 이브였다.
"눈을 떠."
이브는 안아든 차지연에게 조용히 명령했다.
"크하아..."
동시에 눈을 번쩍 뜬 얼굴에 검은 혈관이 번지더니 핏덩이를 토한 그녀가 숨을 몰아쉬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이, 이브?!"
"이제 선택의 시간이다. 하지만 나는, 네가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하는데."
그녀가 정신을 차리자 이브는 그녀를 땅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녀는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기 몸을 매만졌다.
"너는 죽었다 살아났어. 육체의 호흡이 멈추고 연결되어 있던 영혼의 연결은 끊겼지. 하지만 죽음으로 진정한 자유를 찾았고, 내가 투입한 감염균들이 뇌손상이 오지 않도록 조치하는데 성공했고."
"...꿈이 아니었어. 이브, 그리고 신우 그녀석까지."
정체를 드러내고 괴물의 몸을 한채 자신을 내려다 보는 이브의 말에 차지연은 입술을 깨물고 중얼거렸다.
그녀가 시체가 되어 있는 동안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건 아니었다. 이브는 그 사이, 그녀의 뇌리에 군단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그덕에 지금 그나마 덜 놀랄 수 있었다.
"왜 노려보는거지? 난 결과적으로 답도 없는 절망 속에 빠져있던 널 구해준 것인데."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인건 너도 똑같아."
"맞아. 난 포식자니까. 그것이, 내 삶의 방식이다."
그녀의 말에도 이브는 눈하나 깜짝 안했다. 노려보던 그녀의 눈이 이내 질끈 감겼다. 사실 그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왜 날 살렸어?"
"이렇게 쓰려고 한게 아니었다면 나는 애초에 널 해방시켜주지도 않았을거야. 하지만 분명 너에게도 나쁘지 않을 제안을 하지."
이브는 이미 몇번 해본 설득에 들어갔다. 가장 중요한건 그녀의 자발적인 참여니까. 그녀의 시선이, 이브의 손가락을 따라 둥지 한켠에 있던 점액 웅덩이를 가리켰다.
"나와 하나가 되어 다시 태어나자. 알고 있겠지만 이미 군단 내부에 활동하는 서브마인드들이 있지. 그들 역시 자신들만의 목적을 위해 나와 하나되는걸 받아들였어."
"난 사람을 죽이지 않아. 그 어떤 경우에도."
"사람이 아니라면 어때. 가령, 너를 비롯한 유닛들을 도구로 쓰며 함부로 대하던 푸르딩딩 외계인이라던가, 뾰족한 귀를 가진 귀쟁이들이라던가...오크, 고블린 같은 마족들이라던가."
이브는 코웃음을 치며 반박해주었다. 군단의 적은 인간만 있는게 아니었으니까. 그러자 차지연의 눈이 흔들렸다. 다른 무엇보다도 복수심이 타오르기 시작했다는게 컸다.
"선택은 네 몫이다 차지연. 군단의 서브마인드이자 군단장이 되어 선봉에 서든지, 아니면 이곳에서 분해 흡수되어 일개 양분이 되던지."
"...그건 선택이 아니라 협박이잖아."
쓰게 웃은 그녀가 고개를 떨궜다. 하지만 고민은 그리 길지 않고 결단도 빨랐다.
"또다시 도구가 되어서 전 주인을 공격하라는거지. 그다지 마음에 안들지만 어쩔 수 없네. 복수라는게, 너무...끌리는 제안이라서."
결국 비척비척 몸을 일으킨 그녀는 웅덩이를 향해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