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검은 번개(3)
마음이 편해진 건 사실이었다. 그녀는 고작 한마디의 말, 아니 그냥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집중하고 풀어놓는 것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이제 충분해. 이거면 된거야. 이제 더 이상 무의미한 죽음이 아니야.'
가장 두려워 하던 것은 이용당하는 자신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죽는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서, 자신의 행동이 끝내 지키려던 사람들을 해치는 것으로 남게 되는 것.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런 일이 생기면 분명 옆에서 막아줄테니까. 이제 자신은, 아무 미련 없이 아무 걱정 없이 마지막 생을 불태우면 되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플레이어의 지시로 폭주할때 그런 자신을 죽여주길 믿었다.
"정말 이걸로 충분한가요. 정말로?"
"여한 없어. 고마워."
다시 슈트를 착용한 그녀는 머리를 쓸며 웃었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고양감과 두근거림이 여전히 몸에 남아있었다.
처음 해본 다시는 잊지 못할 경험, 동시에 앞으로는 절대 다시 얻지 못할 경험이었다.
"..."
신우는 몸을 돌려 떠나가는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갑작스런 그녀의 행위에 놀란 것도 있지만, 어차피 자신이 목표로 하던 바는 다 이루었으니까.
이제 남은건 모든걸 내려놓을 수 있게 된 그녀에게 진짜 도움을 주는 것 뿐이었다.
그는 멍하니 걸어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찌되었든 일단 승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위기에서 목숨을 구하게 된 사람들은 승전을 기뻐하며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환호했다.
"..."
"삐졌어?"
어색하게 웃으며 모여든 사람들의 환호를 뚫은 그는 여전히 냉랭한 기운을 풍기고 있는 이브에게 다가갔다. 이브는 그를 흘끔 쳐다보더니 혀를 찼다.
"일은 잘 풀렸지."
"장담하는데, 그다지 효율적인 일은 아니었어."
잠시 둘만 조용히 있기 위해 차량 안에 탑승하자마자 이브가 고개를 저었다.
"기껏 한계까지 몰아넣어서 무너뜨리려 했는데. 응급처방으로 살려놓으면 어쩌자는거야."
"이브 너는 그녀를 몰아붙여서 모든걸 포기하게 만들고, 그 틈을 파고들 생각이었지."
뚱한 이브의 반응에 그는 쓰게 웃으며 자신의 의도를 설명했다.
"확실한건 아니지만 네가 계획한 결과는 바뀌지 않을거야."
"그럴리가. 희망을 가졌는데, 인간이 그걸 포기할 수 있을리가 없어."
"역시 이브 너는 아직 어려."
그는 이브의 머리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그럴때마다 팔짱을 낀 이브의 눈은 점점 치켜올라가고 볼이 부풀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제 너는 네가 원하는 대로 계획을 실행해. 그녀는 아마 네가 주는 기회를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일 테니까."
"정말 현자라도 된 듯이 굴기는. 자신이 넘치네."
불만족스러웠지만 이브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그의 호언장담을 들으면서 그냥 계획을 밀어 붙이는 수밖에.
그리고 그 계획이 시작되는건 바로 다음 전장이 될 확률이 높았다.
'어지럽고 과격한 전장에서, 차지연을 죽인다.'
플레이어는 영웅이 된 차지연을 이득을 위해 끝까지 이용하고자 하겠지만 이브는 그렇게 둘 생각이 없었다.
영웅 차지연은 일개 도구나 배신자가 아닌 진정한 영웅으로 죽을 것이고, 군단의 일부가 되어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칼날은, 당연히 그녀를 도구로 다루던 플레이어가 속한 카사라스를 향할 것이고.
*
"또 다시 이동해야 한다고요."
"면, 면목 없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계속해서 지원을 늘리고 있다지만 그럼에도 아직 부족합니다. 상부에서는 고작 한나절만에 전투를 끝냈으니 여유가 있지 않냐는 입장입니다."
전투가 끝난 늦은 밤. 가까스로 이 발전소를 지키는데 성공한 부대 사령관은 이브를 두고 혼자 찾아 온 나에게 미안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전쟁이라지만 정말 최소한의 휴식만 주어질 뿐 우리는 혹사당하듯 전장을 옮겨다니며 계속해서 싸워야 했다.
"어쩔 수 없죠. 가지 않으면 사람들이 죽는다는데."
다만 우리 계획도 있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역시나 차지연도 동의한 가운데 우리는 또다시 새로운 전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 헌터님께 미리 말씀드리면 아무래도 상부에서 기존에 기획했던걸 강행할 모양입니다."
"강행하다니요?"
"새로운 연맹, 신 연맹의 구성과 그에 따른 새로운 체계. 역시 저 외계인들에 맞설 수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령관은 미안한지 내게 기밀에 속하는 정보를 몇개 알려주었다. 다만 그 내용은 그리 놀랍지 않았다.
이미 다차원연합은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신 연맹 안에 아마 헌터님의 고향도 포함될 것 같은데, 산하에 새로운 기구가 만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헌터님들 같이 강한 이들을 모아서 만드는."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이런 말이 위로나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분명 지금 쌓고 계시는 전공이 훗날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 살아남는다면 말이죠."
그는 내게 도움을 주고 싶은듯 좋은 말들을 해주었다. 그 마음을 모르는게 아니기에 나는 딱히 관심이 없음에도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차지연의 플레이어는 그렇게 욕했지만 사실 이렇게 연맹 내부에서 인간 행세를 하며 얻는 정보등이 결코 작은건 아니었다. 이브가 인정하고 순순히 명령에 따라 움직일 정도였으니까.
아마 큰 일이 없는 이상 우리의 연기는 계속될 것이다.
'꼬우면 자기도 직접 와서 이렇게 구르던지.'
유닛들을 부려서 날로 먹으려는 차지연의 플레이어를 떠올린 나는 코웃음을 쳤다. 하는짓은 비슷할지언정 그 치졸한 놈과 우리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무한 반복인데. 우리가 가서 이렇게 쫓아내도, 그놈들은 전력이 비어있는 곳으로 다시 쳐들어 올거 아니야."
"조금만 버티면 된다고 했어. 전력의 충원이 이루어질 때 까지."
이른 아침부터 우리가 탄 수송기가 이륙했다. 목적지는 이곳과 마찬가지로 지금 격전을 벌이고 있는 행성. 그곳은 전투의 규모가 좀 크다고 했다. 우리 말고도 다른 헌터들이 투입되어 있을 정도로.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지.'
맞은 편에 앉은 이브가 씩 웃더니 군체의식을 통해 말을 걸었다. 나는 저 옆에 앉은 차지연을 흘끔거렸다.
이브는 더 이상 질질 끌 생각이 없어보였다. 아예 이번에 끝을 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차지연은 확실하게 죽는다. 아니 그보다, 자신의 유닛을 잃은 플레이어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적들의 수가 많은가요?"
"제가 알기로는 근처에서 후퇴한 놈들 모두가 뭉쳐서 그곳을 공격하고 있다고 합니다. 확 바뀐 전투 방법도 그렇고 놈들의 움직임이 점점 위험할 정도로 무차별적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차지연이 우리를 안내하는 연맹의 장교에게 말을 걸어 자세한 정보들을 캐내었다. 어차피 플레이어의 뜻에 놀아나는 꼭두각시 답게 요 며칠 멍하니 말도 행동도 없던 것과는 달리 생기 있고, 열정 있는 모습이었다.
'무의미한 짓 아니야?'
'본인에겐 아닌 모양이지.'
문득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희미하게 웃었다. 이브의 미간이 단숨에 찌푸려졌다.
"이번에는 너희 둘다, 나 따라오지 마. 위험할 수 있으니까."
"네가 뭔데 나한테 명령이야?"
"언니다 이브야."
"?!!"
빠르게 하늘을 가로지르던 수송기가 점차 속도를 줄여가며 목적지에 도달할 때 즈음. 늘 그렇듯 차갑게 쏘아붙인 이브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휘둥그레 뜬 눈으로 멍하니 자기 머리를 문질렀다.
정작 이브의 머리를 쥐어 박은 차지연은 피식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아보였다.
"오지 않아도 충분해. 나는 늘 전력으로 싸우고, 앞으로도 지지 않아."
"무슨 헛소리를..."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
그녀는 그 어느때보다 편해보이는 얼굴이었다. 나도, 이브도 표정을 지우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저 얼굴이 어떤 얼굴인지 알 것 같았다. 군단과 싸워오며 필사의 각오로 싸우던, 죽음을 각오한 이들의 얼굴이었다.
"대체 어쩌려고 그러지? 설마 자살이라도 하려는건가? 플레이어가 그걸 용납할리 없어."
"그럴리가.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야."
우리도 그녀의 뒤를 따라 수송기에서 내렸다. 격렬한 전장과는 살짝 떨어진 후방 지역이라 그런지, 수많은 피난민들이 몰려드는 지역이었다.
그들의 시선이 단번에 우리에게 집중되었다.
"오늘은 따로 움직여. 조용한데 얌전히 있는걸 추천해."
"넌 그녀를 따라다니려고."
"맞아."
이브는 자신은 차지연을 따라갈 것이니, 쫓아오지 말라고 말했다. 차지연은 이미 몸에 번개를 두르고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간 상태. 우리는 일단 같이 차량에 탑승했지만 이브는 전장에 투입되는 그 순간 단번에 모습을 감춰버렸다.
[지금 이브가 차지연을 향해 뛰어가고 있다]
"그래. 보여."
나는 화면을 통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다 알 수 있었다.
이브의 몸이 골격부터 뒤틀리기 시작했다. 만능세포를 이용한 육체의 변형. 비효율의 극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게 아니니까.
'이거면 충분하지.'
어느새 인간의 모습을 버린 이브는 어느새 유전 정보를 완벽하게 복사한 카사라스의 기사가 되어서, 검을 빗겨든채 차지연을 향해 덤벼들었다.
차지연은 늘 그렇듯 전격을 뿜어내며 자신에게 덤벼드는 적들을 공격하고 사람들을 구했다. 지금 그녀가 지키는 사람들은 미처 대피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시민들과 부상병 수십.
이를 악문 그녀는 힘을 조금도 아끼지 않고 전부 쏟아내었다.
[분노하고, 원망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맞아."
그 모습은 지금까지 보여주던 모습과 전혀 달랐다. 태워 죽이는 적들을 마치 자신의 플레이어라고 생각하듯 전력을 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