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카테고리 Z(6)
"결국 언제나와 똑같아. 그 누구든 생존을 위해 싸우고 발버둥쳐. 약육강식, 적자생존. 그것이 생물의 본질이니까. 저 외계인들도 연맹도 마계의 마물들도 전부 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게 있어. 너도 언젠가는 내 말을 이해할걸?"
가까스로 적들을 밀어냈다지만, 그럼에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전장의 밤. 겨우 휴식을 취하고 있던 차지연은 갑자기 찾아 온 이브의 말에 당황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신우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이브를 제어하거나 말릴 수 있는 존재는 그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연맹의 군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는 이 자리에 없었다.
"틀리지는 않아. 하지만 나는...그렇게 생각 안해. 적자생존, 강자존, 당연한 상식이지만 우리는 협력과 단결로 그 법칙을 거스르고 극복할 수 있어. 그게 우리 인간의 장점이야."
그녀는 반쯤 나간 정신에도 고개를 저으며 이브의 의견을 부정했다. 그것은 자신의 신념이었으며, 이제 자신에게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다. 말싸움을 한다면 반박할 자신도 있었다.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생각해도 되고. 하지만 생각은 충분히 바뀔 수 있지."
다만 지금의 이브는 굳이 그녀에게 반박하지 않았다.
'아직 덜 여물었어. 그 마음마저 완전히 부숴졌을때. 차지연은 허무와 분노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는, 반쯤 뜬 이브의 눈이 은은히 빛났다. 나름 고위층인 카사라스의 기사 계급을 하나 잡아다 고문한 결과로 이브가 알아낸건 단순한 정보 몇개가 전부가 아니었다.
카사라스의 지배층 카르코스. 최고위인 그들에게 주어진 형상력이 천혼술과 동일하다는걸 알아차린 이브는 그 정보를 숨겼다.
당연히 차지연의 정체와 그녀를 컨트롤하던 플레이어의 정체까지 유추할 수 있었다.
이브에게는 좋은 이야기였지만 끝까지 입을 다물기로 결정한건, 보다 완벽한 때를 위해서였다. 이미 레이나와 리암을 통해 극한에 몰린 인간이 어디까지 떨어지는지, 그리고 그 당시의 감정을 기폭제로 어디까지 성장하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이브는 서브마인드로 낙점한 차지연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내버려두면 그가 주워갈게 뻔했으니까.
"그럼 어디 한번 내기 해보자고. 그 잘난 단결과 협력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너...아니다. 그런 마인드니까 네 성장폭이 미쳤다는 말이 나오는거구나."
이브의 말에 차지연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떨궜다. 하지만 사실, 지금 이브는 그녀를 보며 그런 말을 한게 아니었다.
지금 펼쳐지고 있는 또다른 시야. 그 시야에, 곧 이브가 생각하는 철저한 약육강식이 희망이라는 이름아래 뭉친 단결과 협력과 전쟁을 벌이기 직전이었다.
이제 단순한 정복이 아니었다. 절대 공존할 수 없는 신념과 이념이 부딪히는 진정한 전쟁이었다.
'철저히 짓밟아. 약자는 살아남을 자격도 가치도 없다는걸 증명해.'
"그리고 그 약자는, 반드시 저들이 될 것입니다."
이브가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는 전장. 레이나가 집결한 대병력을 움직였다. 이브도 연합도 이 이든방어전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머지않아 양측이 현재 짜낼 수 있는 최대한의 대병력이 짧은 대치를 풀고 전투에 임하기 시작했다.
"3방향 동시공격."
군단병들 중 레이나의 명령을 시작으로 가장 먼저 활동을 시작한건 초대형종을 넘어선 초거대 병종들을 뜻하는 6번대의 데스웜 3마리.
현지 둥지의 에너지를 순간적으로 짜내서 생산한 이 거대한 이계의 지저생물은 거대한 땅굴을 파며 땅 속을 말그대로 분쇄해 나가기 시작했다.
거기다 이렇게 데스웜이 뚫어놓은 땅굴은 그대로 군단병의 돌격로가 된다. 주력이 있는 지상, 적들의 후방을 교란할 지하, 그리고 사방에서 몰아치는 하늘 3곳에서 동시에 몰아닥치는 수많은 검은 물결들.
그리고 이번의 군단병들은 그 돌격을 서포트하는 강력한 화력도 갖추고 있었다. 레이나가 지팡이를 들어, 수km 앞에 보이는 거대한 나무를 대놓고 겨누었다.
전력을 다한 그녀의 마도직사포의 사거리는 지상에서 함선이 떠있는 저 먼 하늘에 도달할 정도. 곧 거대하게 응집한 에너지가 순수한 광선이 되어 세계수를 향해 뿜어졌다.
만약 이 일격을 막지 못한다면, 이 전쟁은 더 이상 볼 가치도 없이 세계수의 줄기가 폭파되며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 세상은 군단의 것이 된다.
"이건...!"
"세계수가 움직인다!"
그러나 침략해온 외계의 괴물들에 맞서, 생존경쟁을 통해 살아남기 위해 발악하는건 요정들 뿐만 아닌 이 세상 모든 생물들의 마음과 똑같았다.
뜬눈으로 수십km 밖에서 쏘아지던 이 강력한 광선포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연합군은, 특히 현지인인 숲의 일족들은 경악했다.
한차례 꿈틀거린 세계수가 스스로의 힘을 끌어올려 푸르스름한 마나의 역장을 만들더니 레이나의 직사포를 막아내었다.
'...지하에서 길을 뚫던 데스웜들이 방해를 만났다. 질기고 거대한 나무의 뿌리다.'
동시에 지하에서도, 땅속을 전부 까뒤집으며 전진하던 데스웜들이 저지당했다.
"이렇게까지 몰렸는데 우리는 절대 져서는 안돼. 세계수는, 아니 이 세상은 살아남고 싶어해."
"그, 그렇게 대단한건가?"
슈리아가, 거대한 힘을 뿜어내고 있는 세계수를 올려다 보며 감탄했다. 세계수가 어떤 존재인가. 탄생부터 이 세상과 함께 해온 이 행성의 정령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 세계수에게 지면을 침식해 들어가며 열이며 마나며 에너지란 에너지는 닥치는대로 빨아가는 군단의 등장은 자신의 몸에 기생하며 순식간에 세력을 불려가는 지독한 전염병이자 암세포였다.
"반드시 이겨야 해. 이 세상도, 살아남기 위해 우리의 편을 든거야."
슈리아는 단단히 각오한 눈으로 바람을 두르며 스스로의 몸을 띄워올렸다. 요정들은 물론, 파울로나 연합의 인간처럼 세계수에 대한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도 어쨌든 자연스럽게 전의를 끌어올렸다.
"이럴수가."
"전승으로나 전해지던 세계수의 군대가..."
점차 두 집단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을때. 세계수의 지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강력한 마나를 배분받은 대수림의 수많은 나무들이 안광을 번쩍이며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뿌리가 뭉쳐 다리가 되고, 가지가 꼬이더니 팔이 되었다.
그렇게 일대의 나무들을 희생해서 만들어진 나무정령군단이 셀수도 없이 많다. 총력전, 오직 승리를 위해 모든 것을 건 셈이었다.
"건방진 연합을 짓밟아라!"
그 광경을 보고 가면 속에서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린 레이나가 두번째 마법을 준비하고, 휘하 위저드 타입 상위종들과 함께 대규모로 시전했다.
중첩된 공명식으로 위력을 극대화한 광선포가 아닌 평범한 화염구. 문제는 그 화염구의 숫자로, 수만개에 달하는 화염구가 전장을 가로질러 연학의 진영에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
"놈들의 돌격병들이 몰려온다. 가자!"
이를 악물고, 다른 이들이 온갖 방법으로 쏟아져 내리는 화염구들을 막아내고 있을때.
파울로는 자신을 포함한 다양한 전사들과 함께 전방으로 뛰쳐나갔다. 어쨌든 끝도 없이 몰려오는 적들에 맞서 긴급히 만든 방어선을 반드시 사수해야했다.
'미친.'
그의 눈에 울창한 숲을 말그대로 으깨고 부러뜨리며 달려오는 괴물들의 모습이 보였다. 1번대에 속한 초대형종 바이슨.
하지만 그 형태가 이곳 이든에 맞게 개조된 이 돌격병들은 수십톤에 달하는 덩치와 강한 힘으로 울창한 나무와 수풀을 그냥 밀어서 부수고 짓밟으며 진격하는 중이었다.
묵직한 망치머리대신 한쌍의 팔을 더 달게 된 이든의 바이슨은 마치 켄타우로스 같이, 4발로 뛰며 어깨부위에 단 또다른 팔을 휘둘러 그 끝에 달린 거대한 칼날을 좌우로 휘두르며 지면에 방해되는 모든 장애물을 베어버렸다.
"포격!"
반군연합이 제공한, 끝까지 아끼고 있던 가장 강한 화력의 지상 포대가 전방의 바이슨들을 향해 뿜어졌다.
찰나의 순간 가장 장갑이 약한 부위에 포격을 당한 몇마리가 고꾸라지며 대열에 틈이 생겼지만 군단병들은 늘 그렇듯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전진만했다.
'이제 진짜 우리 차례다.'
거대한 초대형종의 몸 뒤에 가려져 있던 징글징글하게 많은 군단병들이 초토화된 잔해를 밟고 몰려들었다.
숨을 들이킨 파울로가 자신의 도끼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강력한 투기가 타오르는 그 도끼로, 땅을 도약해 덤벼드는 1번대 중형 돌격병인 비틀을 단번에 베어내었다.
오직 적들뿐인 앞으로 전진하는데 두려움은 없었다. 지금 옆에는 그들만 있는게 아니었으니까.
"그렇지!"
"나무정령들과 함께라면 밀고나갈 수 있다."
싸우던 이들이 환호했다. 세계수의 힘으로 깨어나게 된 수많은 나무들이 달려가 자신들의 무게와 크기로 찍어누르며 군단병들을 공격했다.
나무정령들은 숫자에서 크게 밀리지도 않았다.
주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씩 웃은 파울로도 버둥거리는 군단병들을 차근차근 쓰러트리며 앞으로 전진했다.
"...상위종!"
10m가 넘는 나무정령을 단칼에 반으로 절단낸 존재가 그의 앞에 등장한게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