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카테고리 Z(5)
'방어 설비에도 투자했어야 했나? 아니, 이제와서 그쪽에 투자해봤자다.'
이브에게 해당 지역 총지휘를 인정 받은 레이나는 빠르게 판단을 마쳤다.
일단 게이트는 강제로 닫혀서 다시 뚫으려면 최소 며칠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동안 둥지의 생산력을 순전히 확장에만 투자하고 있느라 방어가 부실했던 탓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와서 둥지의 방어력을 올리겠다고 그쪽에 에너지를 투입하는건 어리석은 짓.
레이나는 그냥 그대로 둥지가 생산하는 모든 에너지를 확장에 쓰이게 내버려두고, 현재 행성에 도착한 군단병들만 이용해서 적들을 이기고자 했다.
'내가 왜 싸우는가.'
레이나 본인도 더 이상 둥지에만 묶여 있지 않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본인의 장점을 극대화 하기 위해서는 대량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4번대 부유형 보급체 초대형종 서플라이. 이 거대한 갑각 해파리 위에 올라앉은 그녀가 촉수를 통해 에너지를 공급 받았다.
'어리석은 이들의 절망, 그리고 멸절!'
가면 속 6개의 안광이 번득였다. 이브가 이곳 이든을 먹어치우려는 목적은 적의 힘을 약화시키고 동시에 자신의 힘은 증강시키려는 전략.
특히나 기존 세력들을 중심으로 점차 격렬하게 돌아가는 분위기 속에서 위기감을 느낀 이브는 스스로의 체급을 올리기 위해 반드시 추가적인 확장이 필요했다.
앞으로 이런 확장전쟁은 이브가 성장과 탐식을 추구하는 이상 끊임 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 대상이 어디든간에. 그래서, 이브에게도 그만큼 승리가 중요했다. 결국 지금까지 달려 온 그 결실을 봐야하니까.
'맨틀까지 뿌리내리려는 신목의 작업을 자꾸 무언가가 방해하고 있어.'
"대체 무엇이 수만그루에 달하는 신목을 방해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나도 정확히는 몰라. 한가지 확실한건 형상력을 이용한 방법이라는건데, 역시 포로를 통해 얻었던 정보에 있는 그것 같아.'
공세로 전환하고 이동하던 레이나에게 이브가 정보를 공유했다 공유된 정보의 내용은 현재 둥지에 에너지 대다수를 공급하고 있는 신목의 작업을 방해하려는 힘.
"그들이 극진히 키우고 있다는 이 땅의 세계수. 확실히 창조목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는 것 같으니, 제가 불태우고 쓰러트리겠습니다."
레이나는 목표를 바꾸었다. 이미 획득했던 정보를 이용해, 적들이 가장 믿고 있고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부수기로.
'가능할 것 같아?'
"몇 가지 병종만 추가된다면 충분합니다."
이브는 그 즉시 명령어를 수정해 군단병들의 움직임을 바꾸었다. 그리고 둥지의 일부가 에너지를 확장에서 생산으로 전환, 6번대에 속하는 초거대 병종 일부가 생산에 들어갔다.
"땅을 통째로 갈아버린다면 나무 주제에 버틸 수 있을지."
무차별 돌격을 멈추고 한점에 서서히 결집하기 시작하는 대규모 군단병들의 모습에 레이나가 히죽였다.
이렇게 되면 자칫 포위당해 사방에서 공격 받을 수도 있지만 레이나는 그냥 정면으로 상대의 본대를 뚫어버릴 생각이었다.
군단경의 대다수가 오직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 기본틀에서 몇가지 개조를 거쳐 특화시킨 병력들. 이곳 이든에서의 전투력은 충분하다.
*
"놈들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역시 게이트를 타격한게 효과가 있었나?"
"...고결한 희생이 의미를 가지려면, 우리가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스탠스를 바꾼건 군단이 둥지 확장에 온 힘을 쏟는 사이 그 빈틈을 잘 찌른 자폭공격을 성공시킨 지상의 연합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도 군단의 행성침식에 맞서는 이번 전투는 중요했다. 다차원연합이 결성된 이후 사실상 처음 맞이하는 대규모의, 그리고 제대로 된 방어전이었으니까.
반드시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어야 이 뒤에, 언젠가 있을 다른 전투에서 희망을 얻을 수 있었다.
당사자인 이든의 숲요정들은 물론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다른 연합 인사들도 각오를 다졌다.
"이름을 입에 담기도 힘든 그 괴물들의 끔찍함, 겪어보지 않고서는 모르니까."
지금 긴장한채 저 먼 하늘을 보고 있는 이 역시 이곳 이든에서는 아주 오래전에 멸종한 인간종인 가이샨족의 전사 파울로.
처음에는 전사장 가르의 휘하에서 영문도 모른채 군단과 싸우다, 군단이 가진 포악함과 공포스러움을 겪고 이제는 스스로 연합에 속해 싸우기를 자처하는 덩치 큰 전사였다.
"자네 말이 맞아. 지금 나도, 고향이 짓밟히며 뼈져리게 느끼고 있으니까."
"모두가 도울 것입니다."
그런 그와 함께 있던건 현지인인 숲의 일족중에서 자신의 부족을 이끌던 부족장이던 요정중 하나.
처음 보는 낯선 이들과의 깊은 연대? 인간을 혐오한다는 종족 단위로 새겨진 감정의 골? 당장 눈앞에 닥쳐 온 지옥의 괴물들 앞에 그딴건 문제될거 하나도 없었다.
파울로를 비롯한 연합군이 자원해서 이곳에 파견된 이유는 다른게 아니었다. 이곳이 넘어가면 적들의 힘은 더욱 강해질 것이고, 그 강성해진 힘은 다음 행성으로 향할 것이니까.
"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다른 지역들에서 보내온 정보를 종합한 결과, 놈들이 대량의 군세를 이끌고 이곳으로 직행하는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들 역시 군단병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감시하고 있었다. 곧바로 소집되었다는 회의에 연합의 중진들이 모두 모이기 시작했다.
"놈들의 움직임에 맞추어 아군도 수송선을 동원해 이곳으로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습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해보면 놈들도 조바심을 느낀 것이겠지요. 그 증거로, 지금 특수종 검은 마도사가 방어지에서 벗어나 수십만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직행하고 있습니다."
반군연합 출신 사령관이 모여든 이들 앞에서 연합군 지휘관의 자격을 가지고 먼저 입을 열었다. 모두가 그의 입에 집중했다.
허공에 띄워진 화면엔 그들이 정의한 레이나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떠오르고 있었다.
"게이트를 파괴했으니 당분간은 놈들의 병력 보충이 크게 줄 것이고, 저희는 이틈에 놈들을 소탕하고 전진하여 둥지까지 파괴해야 합니다. 그게 기본이고, 전부입니다."
"그, 함대의 지원은 여전히 불가능한가?"
"저희 함대가 물러서면 놈들도 함대로 이곳을 포격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질문에 사령관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함께 함대를 배제하고 지상에서 힘싸움을 하자는 군단의 의도는 너무나 뻔했지만, 그걸 파훼할 방법이 없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고향을 지키기 위해 싸웁니다. 이곳 이든이 사라지면 그 다음은 어디가 될지 모르니, 놈들의 침략을 막아내고 반드시 고사시켜야 합니다."
"맞는 말이오. 어서 전투 준비를 서두릅시다."
동기도 저항의지도 충만했다. 굵직하고 중요한 내용의 회의는 거기서 끝났고, 남은건 지휘관 역할을 맡은 이들의 세부 사항 조정 뿐이었다.
가이샨족의 전사 중 하나였던 파울로는 지휘관이 아니었기에 금방 회의장을 나왔다.
"언제 봐도...크군."
회의장을 나온 그는 저 앞에 보이는 거대한 나무를 보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가 살던 곳은 극지에 가까웠기에 그 두께만 수백미터에 달하며 수관의 끝이 구름에 닿을 기세인 거대한 나무는 볼때마다 신기한 것이었다.
"엘덴의 세계수들에 비하면 아직 어리지만, 훌륭한 나무지."
"당신네들 세상에도 이렇게 큰 나무가 있나?"
"나도 신기해. 이 우주에, 우리와 흡사한 종족이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하지만 결국 당신네들과 같은 종이라는 연합의 인간들을 생각하면 우리 뾰족귀들도 이 우주 어딘가에 동류가 없으란 법은 없지."
그런 그에게 다가온건, 은은한 연두색 머리칼을 늘어뜨린 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이곳 이든의 요정들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종족인 엘덴의 요정.
파울로와 마찬가지로 이곳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존재였다.
"놈들, 역시 이 나무를 노리고 오는건가?"
"그래. 세계수는 세상과 함께 탄생하고 세상과 함께 자라오며 세상과 함께 죽는 이 세상의 화신이자 수호자. 세계수가 죽으면, 이 세상도 죽는다."
그녀는 동류의 요정 답게 세계수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중요성 역시.
"그래서...그 은혜 밑에서 살아 온 이들이라면 당연히 이 나무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켜야 해."
그녀는 무장하고 있는 현지 요정들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현지 요정들은 연합의 도움을 받아 말 그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장했다.
아직 마나 수련이 부족한 이들은 총을 비롯한 화기로 무장하고, 간단한 금속조차 혐오하며 일체 쓰지 않던 이들이 신성한 땅과 나무들에 연합군이 제공한 자동 포탑을 배치하고 장비했다.
급하게 땅을 갈고 그곳에 군사시설을 만들고 활주로를 만들었다.
여차하면 자신들의 고향인 이땅에 불을 지르고 포탄을 쏟아부을 각오도 마쳤다. 상대는 일말의 자비도 대화의 여지도 없는 일종의 재난 그 자체다.
쓸데 없는 고집이나 부리며 대비하지 않으면 죽음과 패망뿐이라는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내 이름은 슈리아인데. 어차피 계속 얼굴볼거."
"가이샨족의 파울로라 한다."
분주한 와중에 두 사람은 서로 통성명을 나누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든방어전이라고 기록되고 있는 전투 중, 가장 중요한 기점이 될 전투가 초읽기로 다가오고 있는 순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