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카테고리 Z(4)
이곳과 전혀 다른 환경을 가진 마계에서, 기존과 전혀 다른 노선을 선택한 군단은 효율적인 성과를 보고 지금도 계속해서 확장하는 중이다.
이브는 그 새로운 시스템의 장점만을 빼와서 자신의 군단에도 적용시켰다. 비록 즉각적인 반응이 힘들지만 군단의 컨트롤에는 큰 장점을 보이는 명령어 매크로 시스템과 일종의 병종을 구분하는 번대를 나누고 환경, 지형에 맞춰 수정하고 변형시켜 생산하는 체제등.
"신비로운 숲의 요정들이라더니, 인간과 다른 것도 없구나."
레이나는 둥지 위에 서서 게이트에서 뿜어지는 막대한 양의 병력을 조정했다.
좋은 시스템을 가져왔지만 이브는 자신답게 그 시스템을 곧이곧대로 적용해 쓰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이미 둥지로 삼은 큰 행성들이 여럿 있으니, 그것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우선 침투한 행성에서 최대한 침식을 진행하며 해당 행성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이곳 이든은 척박한 황무지나 극지가 대부분이던 마계와는 달리 어디에나 거대한 나무나 수풀이 우거진 푸르기 그지없는 행성.
너무나 다른 환경에 리하르트가 설계한 병력을 그대로 적용해 생산한다면 효율이 떨어질게 분명했다.
그래서 이브는 침투시킨 레이나가 직접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새로운 형태의 군단병들을 재설계했다.
가령 같은 돌격병 1번대 비틀이지만, 지금 이곳에서 생산되는 비틀은 빠르게 땅을 기어다니던 딱정벌레라기 보다는 보다 긴 다리로 민첩하게 나무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데 특화되어 있었다
'돌격형 1번대, 화력지원 포격형 2번대, 비행종 4번대 모두 해당 지역 특화 완료. 어때.'
"어리석은 요정들은 파도와 같이 몰아치는 아군의 공세에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정신 없이 쏟아지는 물량을 막아내기만 할때. 저희는 이렇게 이 땅을 천천히 먹어치워 나갈 것입니다."
군체의식을 통한 이브의 말에 레이나가 주변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미 군단의 둥지는 빠른 속도로 주변을 침식해갔다. 이렇게 게이트를 통해 병력 생산은 다른 곳에서 지원 받고 현지에서 흡수한 에너지를 온전히 침식에 필요한 에너지로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이 자꾸만 넓어지고 있어. 처음엔 연맹이니 연합이니 하는 놈들만 짓밟으면 되는 줄 알았지. 하지만 갑자기 카사라스니 어쩌니 하는 외계문명까지 끼어들지 않나...나는 어서 그놈들 모두를 잡아먹고 싶거든.'
"그래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런, 아무래도 이곳의 지배종이라는 요정들이 드디어 본질을 깨달은 모양입니다."
이브의 말에 대답하던 레이나가 이곳 상공 수천미터 위에 띄워 놓은 반투명한 마력의 시신경다발, 마법사의 눈으로 무언가를 보고 가면을 썼다.
군단의 침식이 시작된게 며칠째. 당연히 현지의 요정들도 다양한 방법으로 저항을 시작했다.
"제라님! 놈들이 알아챘습니다!"
"돌파한다! 반드시 둥지를, 정확히는 그 끔찍한 나무들을 파괴해야 한다!"
한무리의 인원들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그들은 이곳 이든에서 살아가던 현지인인 요정들. 스스로를 숲의 일족이라 부르던 이들은 최근, 끝도 없이 뿜어져 나오는 지옥의 괴물들에 맞서 종족의 명운을 건 전쟁을 치루는 중이었다.
"결국 놈들의 둥지를 파괴하지 않으면...영원한 싸움일 뿐이고 그렇게 되면 이 땅은."
선두에 있던 요정이 이를 악물었다.
적의 정보에 대해서는 이미 동맹을 맺은 연맹의 정보로 전부 제공받은 상태였다. 유사시를 대비해 함대 파견까지 되었지만 그 함대들은 지금 계속해서 몰려오는 군단의 함선체들에 발이 묶였다.
'그래도 버텨야 한다. 그래야 도움을 더 받는다. 무엇보다...이 땅을 지켜야 한다."
특공대를 이끄는 임무를 받은 요정, 제라는 각오를 다졌다. 죽을 각오로 적진으로 향하는 이유는 다른게 아니었다. 시간이 더 필요했다. 모든 주민들의 힘을 하나로 모으고 외부의 지원을 받을 시간이.
그들도 어차피 군단병들을 죽여봤자 소용 없다는걸 알고 있으니, 둥지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기 위해 적진에 잠입하는 중이었다.
"너무 많습니다!"
"돌파할 수 있어. 다들 마나를 끌어올려라!"
글라이더를 잡은 손에서 손을 뗀 그녀는 허리에 찬 짧은 단창을 빼들었다.
전방, 울창한 수관 위로 하늘을 검게 물들이듯 날아오는 수많은 군단의 비행종들이 그들을 막기 위해 이곳으로 직행하고 있었다.
이브가 돌리는 이 매크로 시스템은 리하르트의 것과는 속도는 물론 규모부터가 비교 불가능. 행성의 수명을 깎아가며 에너지를 착취하고 통제의 리미터를 풀어버리고 초단위로 수천수만의 병력이 쏟아져 나오는 턱에 전방위적 공세로 노선을 바꾼 이브가 이곳에도 이정도의 물량을 풀어놓는게 가능했다.
"우리 목적은 놈들을 죽이는게 아냐. 반드시 돌파해서, 둥지에 타격을 주고 게이트를 파괴해야 해!"
물론 이든의 요정들에게 희망이 없는건 아니었다. 제공받은 정보에 의하면, 게이트는 외부의 충격으로 강한 타격을 받으면 강제로 닫힌다. 또한 강제로 닫힐 경우 다시 연결을 뚫어야 하니 시간이 걸린다는 맹점이 있었다.
"대열 맞춰!"
오직 둥지의 타격과 게이트 폐쇄라는 목적을 가진 그녀의 지휘하에 글라이더를 탄 요정들이 쐐기꼴의 대형으로 군단의 비행종들과 충돌했다.
깃털 날개와 함께 전갈의 꼬리를 가지고 있는 4번대 대형비행종 에시드.
머리는 벌의 형태를 하고 있는 이 대형 비행종들은 입에서는 강산성의 맹동 기체를 뿜으며 꼬리의 산성독을 찌르려 했다.
"큭..."
그녀가 이끄는 요정들은 형상력을 통해 조작하는 바람을 이용, 오히려 속도를 올리며 덤벼들던 에시드 들을 떨구고 가까스로 뚫어내는데 성공했다.
"며, 몇이나 살았지?"
"그래도 반절은 넘게 살았습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그들은 또다시 적진에 한걸음 가까워졌다. 글라이더를 잡은 제라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변했다.
방금 전 격전에서 앞장서서 길을 뚫느라, 독침에 스치고 말았다. 마나를 끌어올려 최대한 억누르고 있지만 이미 한쪽 팔이 빠르게 썩어가고 있었다.
'여차하면 몸을 던져서라도 반드시.'
이를 악문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이 임무에 자원한 순간 살고자 하는 생각은 버렸다. 여기 있는 모두가 그랬다.
모든걸 걸고, 시간이나마 벌고자 여기까지 온 것이다.
"빨리 가자. 설마 놈들도 우리가 이렇게 직접 곧바로 날아올지 몰랐던 것 같으니까!"
글라이더들이 점차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우주에서도 격전이 벌어지고 있다지만, 그래도 연합이 제공하는 위성 사진과 영상은 제대로 요정들의 손에 들어왔다.
그 자료를 토대로 확실히 빈틈을 제대로 찌른건 사실이었다.
"북서쪽 1300km지점. 용케 여기까지 온건가? 목표는 설마 해당 지역의 제 6 게이트?"
하지만 요정들의 앞길을 마지막 남은 게이트키퍼가 가로막았다.
방금 전 일어난 전투로 단숨에 그들의 위치정보를 파악한 레이나가, 둥지에서 끌어오는 에너지를 자신의 몸에 연결해 이동포대의 역할을 수행했다.
'100중첩공명식ㆍ마도직사포'
지상에서 우주에 있는 함선도 저격하는 초대형 포격이 요정들을 향해 정확히 뿜어졌다.
스치기만해도 흔적도 남기지 않고 녹아내릴 순수한 에너지 광선이 저 너머의 지평선에서부터 날아들었다.
"아..."
제라는 그 광선을 보자마자 임무 실패를 직감했다. 실제로 채 몇초 되지 않아 스쳐간 광선에 그녀를 제외한 모든 요정들이 소멸했다.
'아직, 아직이야.'
전신에 화상을 입은 그녀는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았다. 레이나의 포격은 연발이 불가능. 이 찰나의 틈이 기회였다.
나무며 풀들을 모조리 잡아먹은 점액질이 땅을 뒤덮었고, 자라난 검고 뒤틀린 지옥의 나무가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며 뿌리를 내려 행성의 에너지를 강제로 빨아먹는다.
그리고 그 둥지 한가운데 있는, 군단병들이 쏟아져 나오는 6개의 게이트 중 하나. 그녀는 그곳을 향해 몸을 돌진시켰다.
'이런, 막아!'
살짝 당황한 레이나의 외침에 대기하던 게이트 수비병력이 단숨에 하늘로 날아오르거나 하늘을 향해 포격을 시작했다.
"...이런."
'연결이 손상되어, 터널을 재구축해야 해.'
"상관 없습니다. 충분합니다."
'기분이 안좋아보이네? 그 요정, 상위종의 공격에 팔도 다리도 잘려나가고 가까스로 목이 베이는것만 피했어. 운이 좋았을 뿐이야.'
레이나는 저 멀리서 보이는 거대한 버섯구름을 보며 이를 갈았다. 끝끝내 자폭이 성공한 것이다. 수십km에 달하는 거점 둥지 하나가 게이트 연결과 함께 증발했다.
"그런게 아닙니다. 목숨을 바친 헌신! 투철한 사명! 그딴 같잖은 마음가짐이 통했다는 희망 따위가, 절망하고 두려워 해야할 놈들에게 착각을 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쁜 것 뿐입니다."
'...역시 넌 진정한 정복군주야.'
레이나는 자신의 성향대로 증오와 분노를 마음껏 드러내었다. 그녀에겐, 적들이 절망과 고통대신 희망에 차 저항하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짜증나는 일이었다.
정작 이브는 자신의 의도대로 착실히 움직여주는 레이나를 마음에 들어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