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카테고리 Z(2)
[인간들의 영웅이 되어라. 아군이 그에 맞춰서 연기해줄테니, 너는 그들을 죽이고 영웅이 되어라. 인간들의 희망이 되어 그들의 내부에서 입지를 넓혀라]
"..."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가장 중요한 순간 우리를 위해 인간들을 죽여라]
글자가, 일말의 감정도 담기지 않은 글자가 눈에 아른거렸다. 이제 무슨 생각을 하기에도 지친 차지연은 그냥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플레이어 라스. 그는 게임을 통해 그동안 우물안 개구리였던 동족들은 보지 못하고 겪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봐 왔다.
[오직, 우리의 승리를 위해]
전쟁에 대한 인식과 관념의 변화 역시 그중 하나였다.
고결함, 고고함, 명예와 긍지 등등. 오만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카사라스의 지배계층이 보통적으로 가지는 사상을 그는 정면으로 부정했다.
고결한 전쟁 따위는 없다. 그는 그동안 수많은 생물과 세력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모습들을 전부 봐왔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명예도 긍지도 아니었다. 죽는 이는 그저 도태되는 것 뿐이다.
오직 살아남는 이가 진정한 강자인 세상에서 그는 아직도 과거의 전통과 오만함에 빠져 있는 다른 동족들과는 달리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마침 연맹에 뿌려진 자신의 유닛들을 철저히 이용해 먹으려는 것도 그 사상의 발현이었다.
'이제, 그만.'
차지연은 저항할 수 없었다. 과거의 라스라면 이런 공작질은 치졸하고 더럽다며 거들떠도 보지 않았겠지만 지금의 라스는 달랐다.
졸지에 그녀는 사람들을 위해 싸우다 죽으려는 각오가 무색하게, 억지로 싸우고 억지로 살아남아 거짓된 영웅이 되어 최후에는 자신이 지키던 사람들을 죽이는 용도로 쓰이게 되었다.
"곧 도착합니다! 꽉 잡으십시오 지금 우주권역은 물론 행성 내부에서도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빠르게 우주를 항해하던 함선이 워프를 통해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우주 한복판에 도착한게 그때였다.
"진짜 괜찮은거 맞죠?"
"으응...?"
"곧 싸워야 해요."
도통 정신을 못차리고 있던 차지연에게 그가 다가왔다. 안그래도 꽤 이전부터 한계에 몰려있던 그녀의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을 수 있게 도와주는 존재가 그였다.
천만다행으로 그 역시 그녀를 따라 이곳까지 왔다. 하지만 차지연은,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제 대기권에 진입합니다!"
"대체 저놈들은 왜 양동으로 싸우는거지?"
무리를 감수하고 급하게 기동하느라 거칠게 흔들리는 기체 안에서, 손잡이를 붙잡은 이브는 창문 밖을 보고 혀를 찼다.
건물들이 끝도 없이 늘어선 어느 한 도시에서, 침투한 적 함선들과 연맹측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화력도, 기술도 더 강하다며. 그런데 대체 왜 함대전으로 압살하지 않고 굳이 이렇게 강습전을 벌이냐고."
'마치 우리 같이.'
이브가 군체의식으로 투덜거리자, 신우가 쓰게 웃었다. 전적으로 맞는 말이었다. 결국은 살아있는 생명제인 함선체의 체급과 화력을 키우는데 한계가 있던 이브의 전술은 결국 본진이나 마찬가지인 지상을 동시에 공격하여 혼란스러운 난전으로 끌고가는 것.
그런데 발달되고 오래된 고대외계문명이라는 놈들이 하는 짓이 자신과 똑같으니 그 목소리에 실망감이 가득했다.
"목표지 도착 1분 전!"
"일단 싸우는데 집중하죠. 지구 걱정은 너무 하지 마세요. 거기 연맹군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응..."
그는 차지연을 마저 달랬다. 미처 그녀의 플레이어가 지금 그들이 싸워야 하는 적들의 동족이라는 점, 그리고 그녀는 그들을 위해 이용당해야 한다는 점을 눈치 채지 못한 탓이다.
가까스로 대답한 그녀의 눈이 탁하게 가라앉았다. 어느새 함선은 시가전이 한창인 전장의 한복판에 도달했다.
"홀로그램 디스플레이에 위치와 타깃이 표시됩니다. 그곳으로 가서 부디, 도움을 주십시오!"
"일단 알겠습니다. 가자."
다른 지원군들과 함께, 급히 이곳으로 오게 된 3인의 지구 출신 헌터들이 함선에서 내렸다.
차지연과 마찬가지로 사실 두명도 순수한 순혈 헌터는 아니었다.
'결국 이놈들과도 싸워야 하니까 최대한 많은 데이터가 필요해. 휴대폰 준비해. 좀 쓸만해 보이는 놈을 본진으로 날려버려서, 더 많은 데이터까지 뽑아낼거니까.'
"좋아."
그는 군체의식을 통해 전해지는 이브의 말에 슬쩍 품을 만지작거렸다. 지금 겉에 입은 나노슈트 안, 평상복 주머니에 여전히 휴대폰이 들어있었다.
"나 먼저 갈게."
"어 잠ㄲ..."
차지연이 자신의 이능인 전격을 뿜어내더니 붙잡을 새도 없이 먼저 하늘로 날아올랐다.
"알아서 하라고 해. 지금은 우리 일에 집중하고."
"라쿰에서도 날뛰던거 보면 죽을 것 같지는 않은데, 싸우다 죽는게 목적이라 말한 사람이라 불안해서 그렇지."
피식 웃은 그가 차지연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고 먼저 앞으로 달려나갔다. 이브가 그 뒤를 빠르게 쫓았다.
"안내하겠습니다!"
그 곁으로 마찬가지로 슈트를 입고 총기를 든 보병들이 함께 움직였다. 둘이 처리해야 할 목표물은 지금 함선에서 내려, 시내 한복판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적이었다.
*
"역시 인간놈들, 징글징글하게 많군."
눈을 찌푸린 그는 지상에서 50cm정도 떠오르더니 강력한 에너지를 끌어올려, 마침 곁에 떨어져 있던 부숴진 전차들과 도로의 잔해들을 한번에 들어올려 내던졌다.
종족 전체를 관장하는 지배계층인 카르코스 바로 밑, 전사 계급의 최상단인 기사가 그의 계급이었다.
"으아악!"
"피해라!"
강력한 염동력이 그들이 기본적으로 타고나는 형상력이다. 쏟아지는 화력은 염동역장으로 모조리 막아내고 내던진 잔해물들로 적들의 화망을 무력화시킨 그는 곁에 있던 하위 계급, 돌격 전사들에게 돌격을 명령했다.
타고나는 순간부터 구조적으로 정해진 신분에 따라 신체 구조 부터가 다른게 그들이었다.
염동력 대신 거대한 체구와 근육질의 강인한 신체를 가지고 그 육신을 강화하는 형상력을 타고난 돌격 전사들이 일제히 바리케이트를 향해 돌진해 그것들을 부숴버렸다.
"이토록 쉬운데, 대체 이 멍청한 놈들은 왜 파멸의 길을 골랐는가."
곁에서 돌격 대신 멀리 있는 적에게 손에 든 광선포를 쏘는 또다른 하위 전사들을 거느린 그는 둥둥 떠서 돌격전사들이 뚫어 놓은 길을 따라 전진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는 이들은 이내 한가지 이질감을 눈치챘다. 격렬히 저항하는 연맹의 군인들이 시가전 교범에 따라 건물에 들어가 저격하고, 폭탄을 터트리는 와중에도 카사라스들은 건물을 파괴하거나 무차별적으로 공격하지 않았다.
"전사답지도 못한 놈들이다."
코웃음을 친 그는 염동력을 이용해 달려 오던 기갑부대를 탑승물 째로 터트렸다.
왜 그들이 우주전에 집중해서 제공권을 장악하고 땅 위를 싹 쓸어버리지 않는지, 그 이유가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저기 놈들의 전사들이 다시 옵니다."
"죽으러 오는군. 하지만, 이렇게 정면으로 대놓고 오다니 숨기나 하는 놈들에 비해 기백은 있구나."
그들은 미처 대피하지 못하고 차량 안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아이와 엄마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들에게 전쟁이란, 전통적으로 전사와 전사가 맞붙어 승부를 가리는 일종의 의식. 그렇기에 비무장 민간인은 애초에 대상도 아니었다.
물론 인간들은 그런건 싹 무시하고 어떻게든 화력을 퍼부어 그들을 잡으려 하지만, 그들의 이런 자신감은 괜히 나오는게 아니었다.
"...검?"
기껏해야 총을 든 인간 몇일 뿐이다. 평범한 소총은 전방에 나가 있는 돌격전사들의 특수한 갑주에 흠집하나 못낸다.
신체의 일부이기도 한 그들의 번쩍이는 갑옷은 강한 물리력을 동일한 힘으로 받아쳐 상쇄하는 기능을 자동으로 탑재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달려오는 인간들의 선두에는, 총이 아닌 검을 든 두 남녀가 있었다.
"전사들이..."
그리고 믿기지 않는 일이 연달아 벌어졌다. 체급으로도 압도적으로 앞서는 돌격 전사의 몸이, 어느 순간 쩍 갈라지더니 푸른 피를 뿜으며 비틀거리다 쓰러졌다.
"더럽게 단단한데."
신우가 하나를 처리한 사이, 땅을 도약한 이브가 다시 한번 참격을 뿜어내 푹 파인 땅과 함께 또다른 돌격 전사를 크게 베어내었다.
"말도 안돼. 인간놈들이 어떻게..."
"지금 인간놈들만 문제요?! 생전 처음 보는 해괴한 짐승들도 섞여 있다고 하지 않소!"
전면적인 전쟁 개시 채 이틀이 되지 않아 여러곳을 동시에 들이친 카사라스들은 크게 당황했다.
자신들만의 압도적인 강점을 활용해 무난하게 밀어버릴 수 있을 줄 알았던 연맹측이 비장의 한수를 꺼내며 전쟁의 판도가 크게 꼬여버렸다.
그들이 태생적으로 가진 다양한 형상력에 대응하지 못했던 인간들이, 지구의 헌터들을 포함 이세계의 용병들을 긁어오며 정면으로 맞서는 것 때문이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소. 왜 인간들이 장막에 가려져 있던 곳들에 집착하고, 왜 우리가 그걸 막아야 하는지."
가만히 지켜보던 라스는 동족들이 당황한 이 순간에 치고 나가 순식간에 발언권을 얻었다.
"인간들이 그 힘을 손에 넣은 이상 더 이상 오만하게 싸워서는 안되오. 지금 당장 전군에 명령해 새로운 작전을 구상하라 해야 하오."
"...그게 맞는 건 같소."
계속해서 급하게 도착하는 명확한 사실들에 다른 카르코스들도 결국 그의 말에 동의했고, 라스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주도권을 챙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