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진정한 군단(8)
시간을 벌었으니, 남은건 확장 뿐이다. 수많은 군단병들이 휴식 없이 움직여 살아있는 모든 생물들을 잡아먹으며 전진했다.
"분명 이미 알고 있었을 상대는 우리가 개량한 신형 군단병들에 의해 정보에 착란이 발생했고 그덕에 의도한대로 중요한 순간 방심했다. 상대를 방심시키는 것, 이것만큼 좋은 전략이 있나?"
리하르트는 자신의 의도대로 군단병들을 움직여 둥지를 확장해갔다.
"놈들이 알기나 할지 모르겠군. 스스로 방심한건지, 우리가 그렇게 만든건지도 모를게 뻔한데. 설령 우리에게 할줄 아는게 그것 뿐이냐고, 비겁하다고 욕해도 나는 이런 능력을 버릴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군단의 기조를 받아들여 언제나 최고한도의 효율을 추구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승리, 그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면서.
'쓸만한 전략이야.'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이브가 그것을 인정했다.
변화, 그리고 진화. 어찌보면 극적인 진화가 아니라 옆그레이드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지속된 변화는 그것만으로 상대의 정보를 혼란시키고 착각을 불러일으켜 방심을 유도한다.
이미 본대의 체제를 가다듬고 있던 이브는 무의미한 소모전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이미 이브 본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마계에서 벌어진 대단위의 실험으로 충분한 데이터를 얻었다.
'놈들은 좋아하겠군. 소모전 원툴이라며 자기들 입장에선 불리한 소모전을 극도로 싫어하는 것 같던데.'
이브는 그동안 연합군과 군단의 둥지를 포함 여러곳에서 소모성 공방전을 벌이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뭉쳐버린 적들을 압도적으로 찍어누를 힘은 아직 부족하고, 미리 생각해본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아직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하지만 리하르트가 주도한 신우의 군단이 체제의 변환을 통해 기존의 군단과는 새로운 집단으로 거듭나는걸 보며 이브는 실마리와 함께 가능성을 보았다.
'레이나. 출격 준비해. 모든 자료를 공유해주지.군단을 이끌고 리하르트처럼 해봐. 변화와 진화를 통해 적 행성을 공략해.'
"시도해 보겠습니다."
군단의 둥지가 된 행성 센젤에 주둔하고 있던 레이나가 눈을 번득이며 기동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굉장히 기뻐했다.
연합군이 극한의 화력형인 그녀가 주둔한 센젤엔 잘 오지 않아 그동안 영 심심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군단은 한줌의 병력으로 시작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어. 너는 다를거야. 내가 모든 지원을 동원할 거니까.'
"반드시 그 행성을 군단의 일부로 안들겠습니다."
레이나가 센젤에 주둔하던 자신 휘하 주력 병력과 함께 움직였다.
워프가 가능한 기함급 함선체 수십체와 호위함급 함선체 수천. 분명 일방적인 공방전에 쓰이던 물량은 아니었다.
게다가 우주함대는 미끼에 불과했다. 함대전력의 화력에서 연합군을 상대하는게 비효율이라고 판단한 이브는 마계에서의 사례를 예시로 들어 침공의 대전략을 수정했다.
함대는 이제 그저 길을 뚫는 용도일 뿐이다.
우주방어를 뚫고 지상을 습격하여 게이트의 좌표를 따고, 그 뒤로는 제공권을 반반만 가져가며 적의 지상 공격을 막는 역할이면 족하다.
이미 강력한 암세포처럼 폭발적인 증식력을 갖추고 있던 군단에게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춘 바이러스와 같은 변이 능력까지 적용된다면 행성을 파먹는 속도는 더 빨라질 테니까.
전투에서 승리하는게 아니라 철저히 침식하고 파먹기 시작하는것. 그것이 이번에 바뀐 이브의 자세였다.
"워프 인."
레이나는 단숨에 함선들과 함께 워프했다. 일단 목적지로 삼은 행성은 반군연합의 행성이 아니었다.
최근 소속된 플레이어를 통해 공식적으로 다차원 연합에 합류한, 이든이라는 이름의 세상.
이브는 모르고 있지만 이곳의 요정들은 사실 군단과 인연이 있었다. 군단의 고향인 미궁 속, 그곳에서 살아가던 달빛요정 생존자 무리를 유닛으로 거느리던 플레이어가 바로 이 세상 출신이었다.
"연합의 함대. 역시 주둔하고 있었나."
레이나는 행성 근처에서 달려오는 함대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감시하고 있던 그녀의 함대를 추격해 워프해 온 또 다른 함대 역시 뒤에서 나타났다.
하지만 애초에 그들과 충돌하는게 목적이 아니었다. 군단의 함대는, 쐐기꼴 진형을 갖춘채 무작정 행성을 향해 돌진했다.
'내가 왔는데, 감히!'
함선체와 연결한 케이블 같은 촉수로 에너지를 공급 받은 레이나가 지팡이를 들어 거대한 마법을 시전했다.
함선급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어야만 시전 가능한 대규모 마법에, 그녀를 막아서려던 연합의 함대는 기겁하며 물러서거나 피격 당해 터져나갔다.
자신들을 위한 방어도 해야 하고 어떻게든 막기도 해야 하는 자들이, 무슨 수를 써서든 뚫고 지나가기만 하려는 이들을 완전히 틀어 막을 수 있을리 없다.
결국 레이나를 포함한 함대 일부가 행성의 궤도권에 진입하자마자, 뒤에 남은 함대는 돌변하여 연합군의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
'고맙다고 말해야겠네. 네가 말한 '내부 피드백'이라는게 뭔지 확실히 알거 같아. 상상 이상으로 쓸모있어.'
'...그걸 알면 뭔가 대가를 줘. 통제시스템도 전략도 홀랑 빼먹는건 너무하잖아.'
'그정도는 뭐 좋아.'
이브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면을 보고 있는 나도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안다. 마계에서의 일을 보고, 이브는 전략을 바꾸었다.
'이게 맞는거지. 역시 나는 공격하는 쪽이 좋아.'
'...'
이브는 그저 기분이 좋아보였지만 나는 살짝 걱정이 되었다. 내 행동으로 인해 이브의 스탠스가 바뀌었고, 이제는 적극적인 공세에 나섰다. 더 강해진 것이다.
'레이나를 포함한 주력이 빠진걸 눈치챈 놈들이 허겁지겁 센젤로 몰려오네. 하지만 이제 난 신경 안 써.'
자신의 본진 중 한곳이 직접 타격 받는 상황까지 가도 이브는 공격을 강행했다. 조금 타격을 받더라도, 전부터 준비한 연합 붕괴 계획을 밀고 나갈 생각이었다.
연합의 주축인 반군연합에 속한 다른 세상의 주민들부터 죽여나가면서, 힘을 쫙 빼버리겠다는 계획을.
'연맹이 이렇게 거들먹 거리며 그럴듯한 힘을 모으기 전에, 놈들을 붕괴시키고 그 땅을 전부 차지하는게 내 목표.'
"이쪽입니다!"
이브가 눈짓함과 동시에 누군가 우리를 불러 모았다. 함선에서 작은 비행체로 건너 탄 우리는 순식간에 대양과 대륙을 횡단하여 이제 새로운 세상에 도착해 있었다.
'혹시 몰라서 하는 이야기지만 조심해. 연합군이 예상 외로 강할 수도 있잖아.'
'나는 늘 위험 속에서 싸워왔지. 종족, 즉 나 자신의 명운을 결고. 이제 와서는 굉장히 멍청하고 어리석은 짓이지만, 분명 감수할 가치가 있는 일이야.'
이브가 자기 손목에 찬 장치를 작동시켰다. 그 몸을 타고 푸른색 나노 슈트가 몸을 덮어갔다.
'네 동생이나 잘 간수해. 강인하기에 더 부러지기 쉬워. 지금껏 내가 고문했던 인간들의 데이터에 의거한거라 정확할걸.'
'...그래야지.'
나도 슈트를 착용한채 밖으로 나갔다. 동생인 강도연 일은 아직 끝을 보지 못했다.
녀석의 손에 희생당하거나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같잖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녀석에게, 아니 우리에게 분명한 맹점이었다.
어쨌든 애써 그냥 같은 인간종일 뿐 전혀 다른 세상 사람, 아니 다른 생물이라고 스스로를 세뇌하듯 다짐하며 지금까지의 살인 행각을 정당화하고 방어해 왔으니까.
대상이 지구인이 된다면 스스로 설정한 명분에 금이 가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네. 죽고 죽이는게 세상 이치인데."
이브는 곁에서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모두 반갑소."
"트롤이 말을 한다..?"
누군가가 작게 중얼거렸다. 문제 되지는 않았다. 여기 있는 모두가 헌터 출신, 트롤이 어떻게 생겼는지 다 아니까. 그만큼 흡사하게 생겼다.
"나는 이곳 라쿰에서, 여러 동지들을 이끌고 있는 족장 보로라고 하오."
번역기는 이 덩치 큰 트롤...아니 종족명 네벌리나의 말을 다소 고풍스럽게 번역했다. 물론 길게 늘어뜨린 수염이나 얼굴에 깃든 세월의 풍파를 가늠하면 어울리는 말투였다.
"당연히 극진히 대접해야 하지만 지금 상황이 그리 좋지 않소."
"그렇습니다. 지금 셀리엔스의 군대가 방어선으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즉시 이동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슈트를 입고 있던 연맹의 의원 크리스티안이 보로의 말을 자르고 호들갑을 떨며 우리를 재촉했다. 셀리엔스는 이 땅의 주력 세력이며, 보로가 이끄는 약소부족들을 학살하려 드는 이들로 즉 우리의 적이다.
근데 기본적인 작전 계획은 다 듣긴 했다쳐도 다소 급한 움직임이었다.
"대체 연맹은 저들을 도와주고 뭘 얻는 겁니까?"
"안정을 찾으면, 그들이 저희에게 뛰어난 전사들을 지원하기로 했거든요."
그냥 넌지시 물어봤는데, 레비크 중위는 헬기에 탑승하는 내게 순순히 답을 해주었다. 어차피 뻔한 대답이었기에 영양가는 없었지만.
"뭘 기대한거야?"
"혹시나 싶었지."
"...새로운 세상이야. 휴대폰, 가져왔지?"
옆자리에 앉은 이브는 대뜸 휴대폰의 유무를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와서는 표본이라는게 거의 의미가 없어졌지만 혹시 쓸만한 표본이 있을지 모르니 준비하라는 의미였다.
'여전히 휴대폰을 써야 하다니. 레벨이 의미가 있나?'
[최후의 양심이다]
흙먼지를 일으킨 헬기가 이륙함과 동시에 글자 몇개가 시선에 일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