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진정한 군단(7)
솔직히 겉으로 보이는 초고속의 엄청난 성장은 우주진출을 방점으로 끝난지 오래였다.
리하르트가 새로운 양식의 양산형 군단병들을 설계할때 군단 내부에 저장된 데이터를 취합하면서도, 자신의 의도에 맞는 병종을 생산하는데 조금의 불편함도 느끼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비대해지고 성장하는 이브의 자아에 맞춰 군단의 성장은 단순히 덩치를 키우는데서 멈추지 않는다.
덩치를 키우는데 성공했으니 이제는 그 큰 덩치를 보다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시스템이나 구조에 대해 연구하고 적용했다.
자기들만의 자아를 가진 서브마인드나 일부 상위종들 역시 경험과 군단의 투자를 받아 나름의 성장을 이어갔다.
'아직 부족해. 더 많이, 그리고 더 강해질 수 있어.'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떨리는 마음으로 군체의식을 통해 내 의사를 전했다.
거체의 해골룡을 단숨에 부숴버린 강도연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녀석의 감정을 내가 느낄 수 있기에 더더욱 잘 안다.
지금 동생은, 마음의 갈등을 겪으면서도 그것을 바탕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무, 무슨 문제 있으십니까?"
"기다려. 그 자리에서."
멈춰서서 멍하니 화면을 보던 나를 보고 놀랐는지 레비크 중위가 놀라 다가왔다. 그러나 내가 미처 신경쓰지 못하는 사이, 그녀를 째려 본 이브가 한마디로 그녀를 멈춰세웠다.
그녀는 움찔하더니 그 자리에서 그대로 멈춰섰다.
'승리했잖아. 뭐가 문제야?'
'아직 끝난건 아니니까.'
군체의식을 통해 전해지는 이브의 말에 나는 여전히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적들의 우두머리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비록 동생을 포함한 수십의 상위종들과, 수만에 달하는 비행종들에 포위당한 상태였지만.
[@?&☆%!!]
놈이 지팡이를 휘적거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당연히 알아들을 수 없다. 우리에겐 마족들의 언어에 대한 데이터가 없었으니까.
'그냥 죽여. 뼈다귀긴 하지만, 산산히 부수고 서플라이의 뱃속에 던져넣으면 소화시킬 수 있을테니까.'
강도연은 놈이 뭐라고 떠들던 간에 마음을 정한 상태였다. 동생이 다시 한번 출력을 끌어올리자 놈이 크게 당황한 것 같았다. 허둥대는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우리가 처리할게. 저 간사한 놈이 혹시 발악하면서 또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몰라.'
그때 오윤아가 나섰다. 합당한 전략이었다. 놈에 대해서 잘 모르는건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또 무슨 헛짓거리 하기 전에 원거리에서 산산히 부숴버리는 것도 좋지.
[@%*?÷!!]
사방에 퍼져 있던 오윤아의 유닛, 청산족 출신 위자드 타입 상위종들이 오윤아와 함께 지팡이를 쳐들었다.
군단식 집단공명마법을 통한 마도직사포가 놈을 향해 수십줄기의 에너지 광선의 형태로 뿜어졌다.
'막혔다.'
'누군가 난입했다.'
'상당한 강자가.'
그러나 그렇게 응집한 광선이 대폭발을 일으킨 순간.
지켜보던 우리 모두 이번 공격이 완벽히 틀어박히지는 않았음을 깨달았다. 폭발의 여파가 가시는 그 순간까지 모두가 긴장을 유지했다.
'마족?'
'아니야. 조금 달라...'
연기가 가시고 나타난건 은색 갑주와 함께 보라색 피부와 큼직한 뿔을 가진 남성체 마족. 하지만 지켜보던 나도, 강도연도 놈에게선 다른 분위기를 읽어내었다.
*
[마, 마왕...설마 칼타스가!]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가 나를 깨워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대충 듣기는 들었다."
직사포를 견디지 못하고 박살나 머리만 남은 아스랄드의 두개골을 들고 있던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공기가, 그리고 대지가 울린다. 당연하다. 그는 이 땅, 마계의 주인. 마계의 모든 것은 마의 정점에게 복종한다. 한때 용사의 목숨과 교환되어 봉인당한 존재가 지금 돌아왔다.
전대 마왕 칼타스에게는 아무렇게나 대하던 아스랄드 역시 그에게는 입도 벙긋 못했다.
"징글징글한 신성의 힘을 두른 인간들은 어디가고...이런 끔찍한 벌레들이 이 땅을 침공한거지?"
[대륙인들은 용사를 마지막으로 모두 죽...]
"이질적인 느낌이 든다. 이것들, 분명 심장과 피를 가졌을 생물들인데 몇몇을 제외하면 마치 주술사의 명령으로 움직이는 자동인형 같다."
어느 정도 통찰의 권능을 가지고 있는 금색 눈동자를 번득인 그는 단숨에 하늘과 땅을 포함한 사방을 가득채운 군단병들의 특성을 알아챘다.
그의 눈에, 모두가 하나의 존재나 다름 없는 군단의 군체의식은 상당히 이질적인 기운을 뿜어내는 기괴함과 괴이함 그 자체였다.
[이, 이상한 놈들인건 확실하다. 그래도 일단은 이곳을 벗어나는게 맞다. 만만히 볼 괴물들이 아니야]
"칼타스도 내게 그렇게 말하더군. 아스랄드 네놈이 섣부르게 싸우다 패퇴할 경우, 목숨이라도 건져오라고. 하지만 이 내가 감히 이 땅에 발디딘 이 징그러운 벌레들을 내버려 둬야 하나?"
그는 아스랄드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경악한 아스랄드가 뭐 말려볼 새도 없이, 그는 대놓고 드러내고 있던 자신의 마력을 끌어올려 창의 형태로 가볍게 쏘아보냈다.
그 마력의 창은 가장 가까이 있던 강도연에게 날아갔다. 강도연은 베리어는 물론 4장의 날개를 교차해 그 일격을 막아내었다.
"막았다고?"
강도연이 품고 있던 마력과는 조금 다른 군단의 형상력을 파악하지 못한 그는 강도연이 베리어를 희생해 자신의 공격을 막아내자 살짝 움찔했다.
[그냥 도망가자니까!]
"시끄럽다. 이대로 부숴버리기 전에 닥쳐."
호전성을 드러낸 그가 본격적인 전투를 위해 힘을 끌어올렸다. 지금 이 주변에 오직 적뿐이었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마계의 주인인 그는 이 땅 자체에서 자신의 마력을 공급 받을 수 있으니까.
[아]
"...?"
그러나 그 순간. 그의 몸이 자신의 의지를 벗어나 쓰러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아스랄드의 뇌리에 칼타스가 남긴 한마디가 스쳤다.
게임, 게임의 관계자에게는 문답무용 적의 육체에서 혼을 이탈시킬 수 있는 수단이 있다고.
[이 괴물들, 그 유닛인지 플레이언지 어쩌고...으아아아악!]
생명이 끊긴 마왕의 육체와 함께 아스랄드의 머리도 지상을 향해 추락하기 시작했다.
수십만의 군단병들이 이빨과 발톱을 번득이며 대기하고 있는 땅을 향해서.
[신기하긴 하군]
[흐아...]
하지만 그들이 땅까지 추락하는 일은 없었다. 무언가가 축 늘어진 육체와 아스랄드의 두개골을 붙잡았다.
[강제로 유체이탈 시키는 힘은 신기하군. 전혀 대응하지 못했다]
육신에서 이탈한 마왕의 혼이 마력을 이용해 물리력을 행사한 것. 반투명한 영체 상태인 그가 단숨에 하늘로 치솟았다.
[일단은 돌아간다]
그래도 영체인 상태로 지속적인 싸움은 불가능했다. 강도연을 비롯한 상위종들이 긴급히 공격을 퍼부었지만, 주문을 이용해 단숨에 공간을 도약한 마왕은 자리를 벗어나 버렸다.
'척살권이...이렇게 무용하다니.'
'우리가 할 소리는 아니긴 해.'
오윤아와 강도연은 순식간에 사라진 적이 있던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신우의 명령으로 척살권을 사용한건 마찬가지로 고블린들을 사냥해 포인트를 벌었던 오윤아였다.
단지 상대에게 척살권은 그다지 효용이 없었을 뿐. 어차피 어느 정도 수준 있는 적들에겐 통하지 않는게 기본값이 되어버렸지 오래였다.
'비록 완전히 마무리 짓는건 실패했지만 우리는 승리했고 원하는걸 얻었어. 지금도 우리를 막지 못한 마계연합은 더욱 더 둥지를 넓히고 생산량을 늘릴 우리를 막지 못해.'
애초에 그녀들에게 아쉬워 할 틈은 없었다. 이번 전투를 승리로 규정한 신우는 일단 군단병들을 복귀시켰다.
마무리는 못지었어도 힘싸움은 이겼다. 전체적으로 볼때 군단에게 가장 중요한건 결국 체급 자체인 땅따먹기 싸움.
적들의 군대를 밀어내는데 성공했으니 지구연합군과 마계 모두를 상대로한 전투에서 승리한 군단의 둥지는 더 넓어질 것이고, 그 폭발력은 더욱 폭발할 것이다.
"...후."
강도연은 가면을 벗고 어느새 져가는 태양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군단의 승리와는 별개로, 그녀 스스로도 의미가 있었던 전투였다.
"척살권 없이 붙었다면 이겼을까?"
"몰라. 그만큼 강해서."
마찬가지로 가면을 벗은 오윤아가 다가와 말을 걸었으나 강도연은 그냥 고개만 저었다. 그녀는 마지막에 만난 상대가 유닛과 플레이어의 등장 이전 이 땅의 지배자였던 마왕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지만 그래도 형상력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그 격은 알 수 있었다.
'철수해서 휴식하는게 좋겠군. 하지만 양산형 군단병들은 쉬지 않는다. 양분을 보충하고, 즉시 옆으로 뻗어나간다. 다음 목적지는 지구인들이 웨어울프라고 부르던 마족들이 영역으로 삼고 있던 마계 서남부 지방이다.'
"...그래요."
그녀의 기분을 살필 생각은 전혀 없던 리하르트는 군체의식을 통해 어서 자신이 설계한 계획대로 움직일 것을 촉구했다.
한숨을 쉰 그녀도 몸을 움직여, 하늘을 부유하며 이동하는 초대형 비행종인 서플라이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일시에 움직인 군단병들은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지형이 바뀔 정도의 격전이 일어났던 자리에서 썰물 빠지듯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