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진정한 군단(6)
"이제 곧 도착합니다. 모두 준비해 주시길!"
"알겠습니다."
우리 담당인 레비크 중위가 상기된 얼굴로 방에 찾아왔다. 화면으로 전장의 상황을 살피고 있던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 그녀에게 답해주었다.
곧 목적지에 도착한다. 우리는 높은 확률로, 그곳에서 생판 처음 보는 외계인들과 싸워야했다.
"마계에서의 전쟁이 끝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하겠는데?"
"잘 하겠지. 애초에 내가 직접 관여한다고 무슨 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야."
이브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전쟁이 한창이지만 나는 정말 걱정하지 않았다.
이브마저도 자신이 자신 없는 함대전 같은건 리암 같은 서브마인드를 이용하는데, 내가 지휘한다고 드라마틱한 효과를 볼 수 있을리 없다.
"그리 쉽게 끝날 전쟁도 아니고."
"전쟁, 그리고 또 전쟁."
한숨과 함께 내뱉은 내 말에, 의자에 앉아 자기 무릎을 끌어안고 있던 이브가 희미하게 웃었다.
"이제 전쟁은 끝나지 않아. 이 우주에서 어느 한쪽이 절멸할 때까지 계속 반복돼. 그게 게임의 목적이고 동시에 내 목적이니까. 설마 너, 전쟁을 지겹다고 생각하는거야?"
"아니. 그럴 순 없지."
단호하게 부정했다. 이제 나는 인간이 아닌 군단의 하이브마인드. 군단의 번성과 증식이 나의 최우선 목적이다.
그런 입장에서 전쟁을 지겨워해서는 안되었다.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테니까. 결국 돌고 돌아서 전쟁은 우리에겐 생존의 문제였다.
"내가 관할하는 행성들에서도 전쟁은 계속 되고 있지. 이번엔 나도 너희를 본받아서 군단 전체의 시스템을 손보기로 결정했어. 변이와 진화는 우리가 가진 강점. 감히 적응하고 익숙해지려는 이들에게 대응하지 못할 타격을 주는거지."
이브는 리하르트의 시스템을 감명 깊게 보았고, 그것을 자신에게 이식하기로 판단했다.
잠시 잊고 있던 자신의 강점을 기억해내고 적극적으로 이용하려는 이브의 결단에 지금도 수많은 군단과 싸우고 있는 연합군은 고생 좀 더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리하르트 그녀석, 설계자의 능력은 뛰어나도 지휘관으로의 능력은 미지수인데."
"딱히 걱정 안해. 거기 강도연도 있으니까."
시간이 다 됨에 따라 우리 둘다 짐을 챙겨들었다. 이브에게 말한대로 계속 화면을 보면서도 나는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고블린들을 몰살하고 큰 돈을 번 상점을 만지작 거렸지만 아끼기로 결정했다. 언데드 따위에게 척살권은 의미가 없으니까.
우리 능력은 충분하다. 그러니 믿고, 지금의 나는 다른 일에 집중할 때였다.
*
[이놈들...감히!]
상식을 벗어난 두 집단이 벌이는, 그 정확한 끝이 존재하지 않는 전투가 지속되며 군단의 의도를 알아차린 아스랄드는 이를 박박 갈았다.
보급형 개체인 서플라이의 등장과 함께, 사망한 개체의 시신은 물론 아스랄드의 능력으로 되살아난 이들까지 통째로 서플라이의 촉수에 붙잡혀 잡아먹혔다.
시체가 줄어든다. 곧 물량이 줄어든다.
크랙의 역할을 할 강자들이 서로를 마크할 수 있는 이 상황에서, 군단끼리의 싸움에서 물량이 밀린다는건 곧 패배를 의미했다.
[다, 당장 저 괴물들을 떨어트려라!]
아스랄드는 휘하 해골마법사들에게 서플라이를 공격할 것을 지시했다.
화력 부족으로 가능할지 몰랐지만, 가장 강한 그 본인은 지금 섣부르게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조금만 더.'
지금 당장 자신을 찢어 죽이기 위해, 해골기사들을 부수고 짓이기는 강도연이 가면에 떠오른 4개의 눈을 번득이며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그 강렬한 시선에 생전 느껴본 적 없던 섬짓함마저 느낀 아스랄드는 그녀가 해골기사들의 마크를 뚫고 자신에게 덤벼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 군단 지휘보다는 전투에 사력을 다해야 했다.
'막았어. 역시 급해진 모양이다.'
그런 상황속에서 서플라이를 향해 쏟아지던 공격은 전투에서 이탈한 오윤아를 비롯한 상위종들이 나서서 막았다.
상위종들의 빈 공백은 별로 의미가 없었다. 해골기사등 고급 병종들은 마력이 일렁이는 검을 휘두르며 일반적인 군단병들을 상대로 무쌍을 찍었지만 그것도 어지간한 경우의 이야기.
사방에서 끝도 없이 몰려오는 군단병들에게 끝끝내 질량으로 짓눌리면 아무리 초인적인 힘을 내도 방법이 없었다.
전열이 점차 뒤로 밀리고 검을 놓친 해골기사가 바닥에 깔려 버둥거렸다. 군단병들은 굳이 이 단단하기 짝이 없는 해골에 시각을 쏟느니, 그냥 계속해서 짓밟으면서 앞으로 계속해서 전진했다.
'지금 바로 날 도와. 이놈, 역시 다시 도망칠지도 몰라.'
그 순간 계속 아스랄드만 노려보던 강도연은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성급했다]
아스랄드는 특유의 성격으로 이번에도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스스로 분석한 패인은 정보 부족. 감정에 휘둘려 더 침착히 적들의 정체를 알아보지 않고 정면승부를 본게 패착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도주할 생각이었다.
애초에 군단의 지휘자이자 중심으로, 그는 늘 자신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삼아왔다. 자신이 살아남아야 언데드 군단도 있을 수 있으니까,
[이, 이런...]
그러나 강도연은 이미 그런 아스랄드의 의도를 꿰뚫고 있었다.
상위종 몇이 비행종의 호위를 받으며 강도연이 싸우고 있던 전장에 난입했다.
물론 아스랄드가 그녀를 저격하기 위해 동원하고 있는 해골기사의 숫자는 고작 상위종 몇으로 이겨낼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지만, 이제 혼자가 아니었던 그녀에겐 이 찰나의 틈이면 충분했다.
[우아아악!]
최대 출력을 끌어올려, 틈을 부수고 나온 그녀가 날개를 펼치곤 조금의 망설임 없이 아스랄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끝을 변형시킨, 군단의 갑각으로 이루어진 날카로운 손톱이 타오르는 검붉은 기운과 함께 크게 당황한 아스랄드에게 휘둘러졌다.
'이걸로 끝.'
[나를 지켜라!]
그녀가 그 끝을 직감한 순간, 아스랄드가 최후의 고기방패들을 급히 불러내었다.
번득이는 금속에 태양빛이 반사되어 번쩍였다. 동시에 가면 속 강도연의 눈이 커졌다.
지금 달려와서 아스랄드의 앞을 가로막은 한쪽 팔 없는 시체는 전신을 금속으로 바꾼, 연합군 소속 헌터의 시체.
언데드로 일으킨 헌터의 이능을 이용할 수 있다는걸 깨달은 아스랄드가 자신의 곁에 두던 이들이었다.
[뭐냐, 너]
그녀의 일격은 단번에 언데드가 된 헌터의 몸을 갈라버렸다. 하지만 아스랄드는 그 찰나의 순간 발생한 미세한 변화를 알아보았다.
[설마하니 마음을 가진 존재였느냐]
잠시 당황한 그는 히죽 웃었다. 강도연의 공격이 곧바로 쇄도했지만, 그는 이렇게 번 시간으로 방어막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더욱 거세진 분노를 담아 강도연은 그의 방어막을 두들겼다. 풍압과 충격으로 대지에 금이 가고 주변에 있던 이들이 날아가거나 부숴질 정도였다.
[위선자]
그녀가 듣던 말던 아스랄드가 웃었다. 사실 그녀 스스로도 지금 자신이 가진 감정이 혼란스러움을 잘 알고 있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아스랄드의 방어막을 두들기던 강도연은 어느새 다시 자신에게 들러붙는 해골기사들을 상대해야했다.
그 사이 아스랄드는 몸을 빼기 위해 하늘로 날아올랐지만, 그녀는 그걸 놓쳐버렸다. 자신을 비웃던 해골의 안광이 여전히 뇌리에 선명했다. 가슴이 찔렸다.
분명 굳게 마음먹었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을 안죽여본게 아니다. 그녀의 손에 직간접적으로 죽은 사람들은 이미 네자리 수를 넘어간다. 그러나 고작 같은 세상 출신이라는 것 만으로 가치가 달라졌다.
[다음은 분명 다를 것이다]
아스랄드는 그렇게 유유히 하늘로 솟았다.
'정신 차려. 복수 안할거야?!'
그러나 아스랄드는 자리를 쉽게 탈출할 수 없었다. 급히 날아 온 오윤아가 지팡이를 휘둘러 쏘아낸 마법으로 그를 저격하고, 동시에 흔들리고 있는 강도연을 다그쳤다.
[이놈들이...]
오윤아에게 발목을 잡힌 아스랄드가 당황했다. 적어도 이 하늘에선 자신이 열세였다. 사방을 가득채운건 군단의 비행종들이고, 서브마인드가 되어 상당한 출력을 가진 오윤아 역시 가볍게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저리 꺼져라!]
아스랄드는 어차피 밀리는 지상군을 포기하고 그 마력을 대가로 새로운 언데드를 이 하늘에 불러내었다.
거대한 몸, 찢긴 피막에 덮인 날개와 길쭉한 목과 꼬리. 오윤아는 허공에 나타난 해골룡의 모습에 순간 기세가 눌려 주춤거렸다.
[길을 뚫어라!]
해골룡의 머리 위에 앉은 아스랄드의 명령으로, 해골룡은 입을 쩍 벌리고 탁한 마력을 입안에 응집했다.
직후 쏘아진 브레스가 베리어를 두른 오윤아의 몸을 스치고 사방에 자리한 비행종들을 대규모로 떨어트렸다.
그리고 그렇게 빈 공간으로 몸을 날렸다.
[차라리 마력을 보충할 방법을 찾아서...]
하지만, 뒤도 안돌아보고 도망치려던 아스랄드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밑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힘의 파동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걸 볼 수 있었다.
'잘 모를때는 그냥 단순해지자. 오빠가 시키는대로 움직이자. 복수를 위해서.'
혼란을 느끼는 스스로를 다그친 강도연이, 해골룡의 가슴을 극대화한 베리어를 두른 몸으로 들이 받아 부숴버렸다.
강대한 마력의 충돌로 베리어도 부숴졌지만 마지막 한수마저 무력화된건 아스랄드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