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진정한 군단(3)
'하나하나의 전투력은 고위 마족들에 비하면 그리 높지 않다. 더 늦기 전에 구하면 돼.'
그랜트는 자신의 이능을 발현했다. 그의 이능은 신속. 남들보다 확실히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그는 턱을 쩍 벌리고 달려드는 비틀들을 빠르게 베어내고 포격을 멈춘 자주포의 뚜껑을 열었다.
"어서 나오시죠."
그랜트는 그 안에 마비 상태로 쓰러져 있던 이들의 팔다리등을 붙잡고 질질 끌어 꺼내었다.
'이런.'
그러나 그렇게 그들을 구출했을 때. 그는 심장이 철렁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자주포에 내려 앉은 비틀이 그의 뒤를 잡았다.
"하앗...어?"
한쪽 팔 정도는 내줄 각오로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두른 그는 깜짝 놀라 눈이 커졌다. 기회를 잡은 비틀은 그를 공격하는 대신 자주포를 향해 턱을 드러내고 그 쇳덩이를 무슨 종잇장마냥 씹어대기 시작했다.
"뭐지?"
눈치를 보다가 슬쩍 부상자들을 양 어깨에 짊어진 그는 살짝 당황했다.
바닥을 기어 온 지룡이 목을 뻗고는 탄약고를 향해 광선을 뿜자, 대폭발이 일어나며 일대가 뒤흔들렸다.
어느새 주둔지 일부를 점령한 군단병들은 총이나 이능을 이용해 저항하는 이들에게 달려드는 한편 이렇게 사람이 타지 않은 장비도 철저히 파괴해 나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도망치는 사람은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듯 무시하는 행위가 빈번히 일어났다.
'살육보다 장비 파괴가 우선이다? 아니 그보다 이 자식들,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고?!'
순간 소름이 돋은 그랜트가 서둘러 짊어진 부상자들을 후방으로 옮겼다.
이미 어느정도 눈치 있는 이들은 위화감을 발견하고 그 원인을 알아챘다.
애초에 집단적으로 전술적으로 움직이는 군단병들은 노골적인 자신들의 움직임을 숨길 수도 없었고, 군단병들을 지휘하는 이들 역시 굳이 숨길 생각조차 없었다.
"놈들은 분명 마물놈들이 부리는 일종의 군대입니다."
그랜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물론 정보가 부족해 정확한 판단은 내리지 못하고 큰 오해를 하고 있는 상태지만 어느 정도의 맥은 짚었다.
"놈들은 인명살상보다 장비와 주둔지의 파괴에 몰두하고 있다. 이틈을 노려 인명이라도 구하라!"
예상치 못한 습격과 치명적인 약점을 허용하며 결국 함락 직전의 사령부가 결국 최후의 결단을 내렸다. 끝도 없이 쏟아지는 물량의 괴물들에 주둔지는 말 그대로 단숨에 쓸려나가는 중이었다.
펑펑 터져나가는 전차와 미사일사일로등이 불에 타 타오르고, 간이 막사들은 우르르 무너지고 짓밟혔다.
"여기다! 여기 지원을!"
가까스로 재정비한 연합군은 군단병들이 장비와 시설 파괴에 몰두하는 사이 구조 작업을 진행했다.
군단병들은 자신들의 파괴 행위를 막거나, 격렬하게 앞길을 막지 않는 이상 당장 보이는 장비들의 파괴를 인명살상보다 우선순위로 두었다.
"하지만 이래서야, 저희는 더 이상 이곳에 주둔할 수 없을겁니다."
"...대체 이놈들은 뭔가. 만약 이런 놈들이 다른 전선에도 나타난다면 우리는!"
그랜트의 말에 반나절도 안 되어 요새화된 주둔지를 잃게 된 사령관이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군단병들을 마족이 부리는 군대로 단단히 착각한 탓이었다.
'다만 생각해보면 마족놈들이 이렇게까지 장비 파괴에만 몰두할리가 없는데. 놈들 특성상, 오히려 살육을 지시했을것이다. 이건 너무 비효율적이야. 마치 의도적으로 살육을 최소화 하는 것 같은.'
결국 게이트를 통해 빠르게 병력들을 후퇴시키는 사이 그랜트는 여기 저기 불길이 치솟는 주둔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다시 생각해보건데 이 정체불명의 괴물들이 마족들이 부리는 괴물이라기엔 어색한 부분들이 많았다.
"그치만 마족이 아니더라도 저희의 적인건 확실합니다. 이제 저희가 이곳에서 밀려나게 되면 가장 이득보는 곳이 어디겠습니까. 고블린 놈들 아닙니까. 이제 고블린 놈들은 더욱더 거리낌 없이 약탈 행위를 계속할겁니다."
"혹시...모르지. 이 문답무용의 괴물들이 고블린들까지 공격하지 않을지."
울분이 가득한 동료의 말에 그랜트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그로서는 자신의 직감뿐이지만.
결국 애써 요새로 만들어 온 주둔지를 희생한 연합군은 가까스로 지구로 탈출, 그 이후로 게이트까지 닫아버리는데 성공했다.
그럼에도 군단병들의 파괴행위는 그 뒤로도 계속되었다.
마침내 마지막 남은 수송트럭까지 박살낸 비틀 한마리가 턱을 딱딱거리며 한때 게이트가 있던 자리까지 도달했다.
이미 해는 완전히 져버린 가운데, 주둔지는 뭐 하나 온전히 남은게 없는 완전한 폐허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것 역시 실험적인 전투였을 뿐이다. 우리의 진정한 힘은 고작 이정도가 아니다. 비록 적들도 우리에 대한 정보가 적어 완벽히 대응하지 못한것이지만."
'하지만 실험은 성공적이네.'
"그렇지. 이것으로 또 한번 증명했다."
늦은 밤에도 불타오르는 폐허가 된 주둔지에서 군단병들이 물러사기 시작했다. 리하르트의 계획상, 이번에 동원한 군대는 전력도 아니었다. 더 많은 특회된 병종, 더 많은 숫자. 거기다 상위종의 조합까지.
상위종들의 베리어나 마법으로 포격을 막고, 게이트를 이용한 빠른 기동전, 더 다양한 병종을 동원해 상상치도 못한 난전을 걸 수도 있었다.
'계획대로 간다. 이제 이 일대는 우리의 땅. 둥지를 만들고, 병력을 생산해 영역을 넓혀간다.'
성공적으로 지구연합군 한개 사령부를 통째로 몰아내버린 군단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충분히 증명했으니 더 이상 망설일 것도 없었다.
척박한 황무지마저도 먹어치우는 둥지의 확장은 물론 병력의 양산 속도에도 속도가 붙었다.
"이것 좀 보세요."
군단병 몇을 데리고 늘 하던 정찰을 나갔던 오윤아가 한가지 소식을 들고 온게 그때였다.
"...이 해골은 분명."
'참 기분 나쁜 짓을 하는군.'
허공에 떠서 현장을 관측하는 정찰병들의 시선에 잡힌 것은 군단의 둥지에서 북서쪽으로 떨어진 지역에 있는 지구연합군의 또다른 주둔지였다.
그곳은 일종의 거점기지로 연합군이 전진 타격을 위해 점령한 지역이기도 했다. 지금 그곳이, 대규모 군세에 의해 공격당하고 있었다.
"다른 의미로 신기하긴 하군. 마치 우리가 가진 군체의식을 대체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진 것 아닌가. 이거 시체 처리를 못한게 실수로군."
'마법의 일종에 가깝겠지.'
리하르트는 공격측을 흥미롭게 보았다.
일단 가장 눈에 띄는건 새하얀 백골들이나, 좀비가 되어 몸을 일으킨 시신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평범한 언데드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더 많은 사기,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하다!]
폭음, 그리고 비명과 고함이 가득한 전장의 한복판에서 아스랄드가 수십만의 언데드를 부리며 푸른 안광을 거세게 불태웠다.
남동쪽 전장에서 패퇴한 그가 이를 갈며 굳이 이곳에 등장한 이유는 간단했다.
산자들의 생기를 빨아먹어 자신의 마력으로 채우고, 그 시체로 자신의 병사들을 보충할 생각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거점기지를 사수하기 위해 출격한 전폭기 편대들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수십발의 미사일을 퍼부었다.
[쇳덩이로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쏟아지는 미사일들을 향해 그가 한손에 든 지팡이를 휘두르자, 음속을 돌파한 속도로 쇄도하던 미사일들이 일제히 허공에 강제로 정지하더니 그대로 하늘에서 폭발했다.
설령 몇몇개가 착탄에 성공해도 상관은 없었다. 병력을 조금 잃는 것 정도는 그에게 아무 상관 없었으니까.
"저놈! 저놈인가?!"
"팀장님!"
이 혼란 속에서, 해골병들의 파도를 뚫고 나름 전방지역에 있던 아스랄드를 향해 달려오는 몇 사람이 있었다.
전신을 번쩍이는 금속으로 바꾸는 이능을 가진 리더를 포함, 이 거점기지를 사수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헌터들이었다.
[웃기는군]
아스랄드는 그들을 비웃었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임을 용케 알아보고 달려오고 있지만, 그는 애초에 잔챙이들을 상대로 직접 나설 생각도 없었다.
"으아악!"
대신 그들을 덮친 것은 해골병들도, 지금 이곳에서 일으킨 연합군의 시체도 아니었다.
검은갑각을 두르고, 오직 전투만을 위해 설계 된 탄탄한 몸과 기술을 가진 괴물들이 그의 명령에 따라 헌터들을 습격했다.
질량과 체급으로 밀어붙이는 중대형 군단병들의 공격은 해골기사등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공격이다.
결국 버티는데 실패한 헌터들이 갈가리 찢겨 바닥에 쓰러졌고, 아스랄드는 기뻐하며 그들의 영혼을 움켜쥐고 그 육신은 자신의 언데드로 일으켰다,
[시체에도 잔존하던 특이한 의식을 제거하는데 공을 들였지만, 나름 쓸만하지 않은가]
땅을 진동시키며, 망치머리의 반절이 부러진 상태인 거대한 초대형종이 달려왔다.
지난 전쟁에서 빼돌린 군단병들의 시체마저 자신의 인형인 언데드로 부릴 수 있게 된 그가 언데드의 물결에 그대로 밀려 함락당하는 거점기지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더,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하다. 이 다음에 붙었을 때 그 결과는 다를 것이다 검은 날벌레야.'
그의 눈이 시퍼런 광기로 번득였다. 머릿속에는 이미 자신을 패배시켰던 군단과의 재결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직 그것만을 위해 단독으로 치열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전장에 난입한 것이고, 오직 그것만을 위해 만단위의 연합군을 학살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