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진정한 군단(2)
"그들도 아마 우리의 접근을 알아차렸겠지. 저것, 그들의 정찰기 같은데."
'예상대로.'
세력이 커지니 동시에 신경쓸 일들이 많아졌다.
이브 같은 괴랄한 멀티태스킹 능력도 없는 나는 내 본체가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일단 강도연과 관련된 일에서는 손을 떼고 최대한 다른 쪽에 집중해야했다.
'제대로 대응할까 싶은데. 우리 정보는 알고 있었겠지?'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1번대 비틀을 그들의 동맹인 연맹에게 보여주었다. 통신을 막을 순 없으니 정보는 가지고 있겠지. 하지만 정보라는건 그냥 들고 있어서는 쓸모가 없다."
'그 말이 맞아.'
나는 리하르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는 그간의 경험으로 뼈에 새겼다.
그 와중에도 지구연합군을 향해 돌격하는 군단병들은 조금도 쉬지 않았다.
이미 고블린들을 무력화 시켰으니 이 일대에서는 저들만 밀어내면 우리를 막을 수 있는 세력은 없다. 그리고 그렇게 넓힌 둥지에서 군단병들을 계속해서 생산한다.
차근차근 이 땅을 먹어치워 가려는 우리의 계획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다연장 미사일 포격이다."
저 멀리서 빛나는 불덩이 수십발이 연달아 하늘을 날았다. 적극적으로 싸우는 대신 인근을 철저하게 요새화 시켰다더니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당연히 우리도 손놓고 있지는 않았다.
하늘을 날던 수많은 비행종 스팅레이가 일제히 빠르게 고도를 상승하며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 속도가 대단했다. 이것 역시 리하르트가 통제하는게 아닌, 애초에 입력되어있는 수많은 명령어에 포함된 행동이었다.
'4번대 스팅레이도 공성에 큰 전력이니 너무 소모되어선 안 돼. 후속대를 계속 보내는게 낫겠어.'
"그렇게 하지."
소형 자동차 크기의 비행종들은 먼 하늘에 자신들의 몸으로 일종의 방어막을 만들어 포물선으로 낙하하는 미사일을 몸으로 방어했다.
펑펑 터져나가는 폭발에 비행종 스팅레이들이 빠르게 소모되었고, 나는 추가 병력을 계속해서 보낼 것을 지시했다.
"나는 이번 전투에 굳이 단 하나의 상위종도 배치하지 않았다. 만약 조합에 상위종들을 배합했다면 그 효율은 급격히 상승했겠지. 이걸 반대로 말해서 만약 양산형 군단병들만으로 지구연합군의 기지를 밀어버릴 수 있다면, 내가 제시한 새로운 체계와 시스템에 대한 비전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 아닌가."
꿈틀거리는 촉수로 얼굴의 절반을 덮고 있던 리하르트가 소리내어 웃었다.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이브도 지금 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성과를 보인다면 이 새로운 군단통제시스템을 이브가 가져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군단이 다시 한번 스텝 업을 할 수 있는 계기일 수 있을지도 몰랐다.
*
"이, 일단 포격은 성공. 지금 확인중입니다."
"이럴수가..."
"적 본대는 건재...합니다."
긴장한 얼굴로 화면을 보던 이들이 일제히 탄식했다. 연기와 화염이 사라졌으나, 중간에 생체 장벽에 가로막힌 미사일들은 땅을 가득 채운 적 본대를 일소하지 못했다.
"그래도 쉬지않고 계속 발사하도록! 계속 저렇게 막을 순 없을 테니까!"
호주 국적의 이 사령관은 서둘러 제정신을 차리고 계속해서 대응할 것을 명령했다. 그가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원거리 포격은 계속되었다.
단지 추정하길 수십만, 어쩌면 수백만 이상일 저 거대한 군세를 상대로 끝까지 버틸 수 있을지 아무도 확신하지 못했다.
"대체 저놈들은 뭔가. 마계의 마, 마수들과는 다르지 않나!"
"분명 연맹측에서 제공한..."
다들 바쁘게 움직이는 사이, 사령관은 구석에서 보좌관들을 닦달했다. 대규모로 정확히 이곳을 향해 몰려오니 당연히 공격했지만 사실 그들은 아직까지도 적들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다.
"나는 절대 저놈들이 평범한 짐승무리라고 생각하지 않네. 세상 그 어떤 짐승들이 땅에 있는 자기네 본대를 지키려고 몸으로 미사일을 막는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어영부영 대치나 하던 고블린들 따위를 상대할 때보다 더 큰 위기라는 것.
분명 지금 빼곡히 몰려오는 적들은 단순한 괴물들에 불과해 보이지만 사령관은 계속해서 치미는 불안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우리를? 어째서?'
그 근본적인 이유는 적들의 의도를 전혀 모르니까.
대체 무엇을 위해 저 다양하게 섞인 괴물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이곳으로 달려오는건지 알 수 없었다.
"연맹의 군대도 저놈들에게 당했다고 했지. 몰살당했다고. 우리가 버틸 수 있나?"
"..."
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화면에 비치는 괴물들이 무수한 포격에도 불구하고 이미 이곳에 점차 근접하고 있었다.
"쏴!"
수백발의 포탄이 쉬지 않고 하늘을 가로질렀다. 다른 지역과 달리 대치만 이어간 이곳의 연합군은 비축된 물자를 지금 이 순간 다 풀어내었다.
연합군의 가장 큰 장점은 당연히 화력이었다. 현대 화기, 게다가 마계와의 전쟁이 계속되며 잠시 주춤했던 전지구적인 무기 사업도 다시 부흥하기 시작했다.
초고성능의 포탄이 자탄을 뿌리자 일대가 단숨에 뒤집어졌다. 수백마리 군단병이 파편이 되어 바닥을 굴렀다.
"끝도 없어 보이는데."
"하지만 효율적으로 막아내고 있습니다."
한 사내가 최전방의 방벽에서 망원경을 통해 자욱한 연기와 폭음이 연달아 울려퍼지는 저 앞을 주시하고 있었다. 망원경을 내린 그의 허리춤에는 검 한자루가 달려 있었다.
"그럼 우린 나서지 않아도 됩니까? 마족들의 공격이 아니라면서요."
"그건 그렇긴 한데..."
현장 지휘관은 그의 말에 침음했다. 그는 이 주둔지에 대기하는 헌터들의 대표격인 인물이었고 헌터들의 임무는 마족들의 공세에서 진중에 난입해 화력전개를 방해하는 특출난 강자들을 맞아 싸우는 것.
즉 지금 상황에서는 살짝 애매하다는 뜻이었다.
"그럼 일단 지금은 들어가시죠?"
결국 지휘관은 일단 지금 당장 할 일이 없는 그들을 후방으로 빼려했다.
"이런. 나서지 않는건 아무래도 안되겠습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본 그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쓰게 웃었다. 하늘을 빼곡하게 채우며 날아오는 비행종들이 마침내 포격을 뚫고 주둔지에 먼저 도착했다.
연합군은 당연히 모든 대공 수단을 동원해 하늘을 향해 난사했다.
"역시 있는게 도움될 것 같지 않습니까?"
"윽...그럼 잘 부탁합니다!"
그는 번개 같이 검을 빼 휘둘러 이곳을 덮치려던 비행종 하나를 반으로 갈라버렸다.
갑작스런 습격에 놀란 지휘관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가슴을 쓸어내리더니,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나 그랜트인데. 지금 모두 활동해야 한다고 연락해."
그는 무전기를 꺼내 한마디 전하고는 다시금 검을 휘둘러 독침꼬리를 휘두르던 비행종을 베어냈다.
산개해서 그 엄청난 화망을 뚫고 미친듯이 돌진해오는 군단병들이 점차 주둔지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유일한 변수는 뭉쳐있을 때 핵폭탄 급의 포탄을 맞고 전멸하는건데, 여기까지 왔으면 그럴 걱정은 없겠지."
벌써 수만마리가 죽었다. 하지만 이 전투의 설계자인 리하르트는 오히려 재미있게 전장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군단병들은 일정 거리에 도달한 순간 수십km단위로 산개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연합군의 포격도 그만큼 분산되었다. 그리고 이정도 화력으로 죽어나가는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나름의 계산을 내린 리하르트는 살아남은 병력의 절반만 주둔지에 도달해도 승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으아악!"
"커흑..끅.."
게다가 군단의 무기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진중에 난입한 비행종 스팅레이들이 입에서 뿜어낸 검은 가스가 바람을 타고 진지 한가운데 퍼졌다.
가스에 담긴건 0번대의 가스 살포식 세균형 군단병. 이렇게 살포하는 감염균들은 형상력을 지닌 이들에겐 소용 없지만 대다수가 일반인인 지구연합군에게는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이럴 수가..! 화생방!"
"방독면 착용!"
이브조차도 컨트롤의 부담이 커 대규모 대용량으로 쓰지 못하는 세균형 군단병들을 리하르트가 조작할 수 있는 것 역시 명령어를 통한 매크로에 가까운 방식 때문이었다.
연합군 보병들과 포병들이 난입한 비행종들과 퍼지기 시작한 감염균들에 단숨에 무력화되며 검은 혈관이 돋은 얼굴들로 바닥에 털썩털썩 쓰러지기 시작했다.
내려둔 명령은 마비를 통한 움직임의 제한 뿐이었으니까. 물론 이것만으로, 부상자를 챙겨야 하는 연합군의 부담은 몇배로 증가했다.
"이게 대체..."
수호자 연합 소속의 헌터 그랜트는 크게 당황해 주춤거렸다. 내면에 형상력을 갖고 있던 그는 가스 살포식 감염균에 당하지는 않았지만 습격으로 포격이 뜸해진 사이 사방에서 주둔지를 덮쳐드는 괴물들을 상대해야 했다.
"후퇴! 후퇴! 전 병력 신속히 후방으로 물러나라!"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상부에서는 후퇴 명령이 떨어졌다. 하늘을 빼곡히 덮은 비행종들도 다 처리하지 못했는데, 어느새 수많은 비틀이 방벽을 넘고 있었다.
그나마 감염되기 전 방독면을 챙겨 쓴 이들이 사방은 물론 하늘에서도 몰려오는 군단병들에게 총을 쏘며 저항했지만 근본적으로 총기에 대항하기 위해 설계된 군단병들을 행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완전히 무력화 시키기 위해선 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후퇴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직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방독면을 쓰고 달려 온 지휘관의 말에 그랜트가 고개를 저었다. 저 앞의 자주포에도, 대공포대에도 쓰러져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부상자들이 많았다.
"가서 구해올테니 엄호를!"
그는 결국 몇몇 헌터들과 함께 병력들의 엄호를 받으며 앞으로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