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새로운 질서(10)
'...마법?'
전장 한복판에 있던 강도연은 순식간에 먹구름이 모여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 구름들이 머금고 있는 짙고 무거운 마력이 형상력을 감지하는데 특화뇐 그녀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알고는 있었어. 언데드형 마물들. 뭐지? 리치? 스켈레톤 워리어?'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오윤아가 군체의식을 통해 자신이 보고 있는 정보를 공유했다.
어느새 일대에 내려앉은 진득한 마력이 작용하기 시작했다. 분명 시체가 되었던 고블린들이 징그럽게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땅에서는 새하얀 뼈로 된 손들이 불쑥 불쑥 튀어나왔다. 아스랄드의 마력과 대지가 합쳐져 만들어진 언데드 군단이 땅을 까뒤집고 그 모습을 드러냈다.
'문제가 되나?'
'잘 모르겠는데.'
"끄륵...끄이아아악!"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고블린의 시체가 기괴한 괴성을 지르며 오윤아와 이야기하던 강도연에게 달려들었다.
생전엔 두려워하며 도망만 치던 이들이, 죽음 이후 두려움을 거세당하고 술사의 철저한 도구가 된 것이었다.
강도연은 검붉은 형상력이 휘몰아치는 팔을 고블린을 향해 뻗었다.
뿜어진 에너지가 탄환이 되어 날아가 고블린의 몸에 명중해 크기 대비 고화력의 대폭발을 일으켰다.
당연히 고블린은 되살아날 시체조차 남지 않았다.
'고블린들의 시체는 걸림돌일 뿐이야.'
그녀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마법도 쓰지 못하는 고블린들의 사체는 그냥 짤뚱한 좀비일 뿐. 놈들의 이빨과 발톱은 군단병들의 갑각은 커녕 근육조직에 생채기 하나 만들지 못했다.
'진짜는 저 해골들이지.'
하지만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아스랄드의 언데드 군단은 달랐다. 병종도 나누어져 있는 이 해골병들은 검과 창을 휘두르고 활을 쏘며 마법도 쓸 줄 알았다.
그녀의 눈에, 푸른 검기가 둘러진 검을 휘둘러 단단한 갑각을 가진 중형의 전갈형 군단병을 반으로 가르는 해골기사의 모습이 보였다.
[어디 한번 대응을 볼까. 저 괴이한 벌레들은 이제 어떻게 대처할까]
"왜, 왜 이렇게 여유롭냐고 하신다! 놈들은 강하다!"
[하신다? 그 플레이언지 뭔지 하는 잡신이 말이냐? 뭘 모르는군, 여유로울 수밖에. 죽음의 군단은 지치지도 않고 두려움도 모른다. 살아있는 생물이, 어찌 이길 수 있을까]
탑에서 전황을 내려다 보던 아스랄드는 소리내어 웃었다. 고블린들의 플레이어가 한마디 할 정도로 그는 여유로웠다.
이유는 간단했다. 충분한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가 부리는 언데드 군단은 지금껏 그 어떤 전쟁에서 패배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언데드 군단의 유일한 약점인 신성의 속성마저도 지금 그가 상대한 이들은 갖추지 못했다.
그렇다면 남은건 체급과 물량으로 점철되는 끝 없는 싸움뿐이고, 그 싸움에서 지금까지는 언데드 군단이 상대에게 밀릴 가능성은 현격히 적었다.
[흐음...]
하지만 분명 지금 맞상대하는 이들은 지금껏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적들. 그의 예상대로 일이 순탄하게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우선 그동안 흩어져 활동하던 상위종들이 군체의식을 통한 동시다발적인 소통을 통해, 단숨에 해골기사나 마법사 같은 고급 병종들에게 달려들었다.
'특이한 짐승들이다. 저것들이 과연 살아있는 생물이 맞긴 한것인가?'
두려움도, 고통도 모르는건 군단병들도 마찬가지였다. 과격하게 돌진하는 해골병들을 향해 군단병들 역시 한치의 물러섬 없이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며 맞대응했다.
[이거 얌전히 구경만 하고 있을 때는 아니군]
결국 아스랄드는 직접 몸을 움직여 지상에 착지했다.
마침 곁에 있던 군단병 하나가 검을 든 해골병 둘을 가볍게 부숴버리더니, 네발로 뛰어 그를 향해 이를 드러내고 덮쳐들었다.
[끔찍한 고통으로 죽어라!]
아스랄드는 군단병을 향해 주문을 시전했다. 상대에게 강한 고통을 주는 마법이었다.
뿜어진 검은 마력이 이 짐승형 군단병의 몸을 휘감았으나, 전신의 신경을 잡아뜯는 강렬한 고통에도 군단병은 아랑곳 않고 버둥거리며 그를 향해 덤벼들었다.
[무슨 이런...]
군단병은 당황한 그가 지팡이 끝으로 머리를 관통하고 나서야 활동을 멈췄다.
'과연 기존의 방법으로 상대가 가능한 놈들인가?'
잠시 멈춰서 생각하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만큼 지금 상대하는 외계의 괴물군단은 그의 상식과 맞지 않는 부분들이 너무 많았다.
[역시 다른 방식으로 가야할것 같군. 칼타스 그 작자는 설마 여기까지 본 것인가?]
결국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든 아스랄드는 기존의 계획을 폐기하고, 다른 전술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어쩌면 쉽지 않을지도.'
탑에 있던 아스랄드가 전장에 개입한 직후. 강도연은 베리어를 강화해 쏘아진 푸른 참격을 견뎌냈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는 언데드 군단은 분명 아스랄드가 자신만만할 정도로 충분히 강하고 많았다.
이건 군단 전체의 역사를 놓고 봐도 굉장히 드문, 파멸균들과의 싸움 이후 맞이한 진정한 의미의 군단과 군단의 전쟁이었다.
그렇기에 강도연은 일종의 크랙 역할을 맡은 자신이 적들의 고급 병종들을 잡아먹고 휘젓는다면 결국 균형을 부술 수 있을거라 판단했다.
"..."
하지만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다. 전원 검기를 번득이는 해골기사들도, 대단위 마법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해골마법사들도 실력이 상당했다.
'놈들의 형상력이 점점 더 강해진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게다가 그녀의 눈에는 사그라들기는 커녕 전투를 반복할수록 점차 거세게 타오르는 놈들의 마력이 보였다.
소모되기만 하는 자신의 형상력과는 전혀 다른 광경에 그녀는 놈들에게 섣부르게 덤벼들 수가 없었다.
[확실히 특별해 보이긴 하는군]
그 상황에 아스랄드가 그녀를 찾아왔다. 한손에는 해골이 달린 지팡이를, 반대편 손에는 푸르게 빛나고 있는 수정구 하나를 들고서.
'저거다.'
그녀는 그 빛나는 수정구가 일종의 증폭기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마력을 가진 이들의 숫자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수정구는 그들의 힘을 마치 공명법처럼 공명시켜 강화했다.
칼타스가 쥐어 준, 또 다른 세상의 귀물이 기가막힌 상성을 찾아 그 가치를 극대화한 것이었다.
'우두머리, 한점 돌파로 죽인다.'
[분명 다른 놈들과는 다른, 제대로 된 혼을 가진 이 무리의 우두머리렷다]
번득이는 붉은 안광과 푸른 안광이 부딪혔다. 서로 생각을 끝내는데 걸린 시간도 짧았다.
날개를 펼친 그녀가 최대출력으로 해골병들 사이에 있던 아스랄드를 향해 돌진하고, 주변에 호위를 단단히 두른 아스랄드는 지팡이로 땅을 내리찍었다.
[큭...]
강도연은 한순간 모았다 펼친 날개로 4갈개의 참격을 사방으로 뿜어내었다. 참격은 아스랄드의 주문을 단번에 부수고, 해골기사들의 몸까지 부수며 한순간 그 호위벽을 약화시켰다.
[어, 언데드로 만들면 최강의 데스나이트가 되겠군]
풍압만으로 일반 해골병들은 부서지고 날아갔다. 하지만 그녀가 뻗은 손은 움찔거리는 아스랄드의 코앞에서 멈췄다.
어느새 그녀의 몸에 들러붙은 해골기사들이 뻗은 손이며 몸이며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네 심장은 이제 내 것이다]
아스랄드는 강도연이 그 속박에서 벗어나기 직전, 그녀의 가슴팍을 지팡이로 찍었다.
대상의 심장에 각인을 새겨, 그 심장을 터트리고 언데드의 핵으로 재구성해 반시체인 상태로 자신의 하수인으로 부리는 강력한 주문이었다.
[..?!]
그러나 아스랄드는 또 한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빗나갈리 없는 주문이 빗나갔으니까. 강도연의 몸에 심장이 없다는걸 알 턱이 없는 그의 실수였다.
'전 군단, 돌격.'
그녀는 그틈에 해골기사들을 뿌리치고, 손을 휘둘러 아스랄드의 한쪽 팔을 베어버렸다.
잘려나간 팔에서 빛을 잃은 수정구가 바닥을 구르며 깨져버렸고, 그 순간 해골병들을 강화하던 주문도 꺼져버렸다.
동시에 다시 한번 군단병들이 해골들을 들이 받았다.
[이놈들...]
아스랄드는 안광을 불태웠다. 단순한 수정구가 아니었다. 체급이 밀리는 해골병들의 화력을 강화해 군단의 상위종들은 물론 대형종들에 대항하는 수단이었는데, 그것이 사라진 것이다.
그가 쏘아낸 광선으로 베리어를 두른 강도연을 베리어째로 저 먼 하늘까지 밀어냈지만 이미 본대의 힘차이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혼자서 십만 단위인 적들을 다 죽일게 아니고서야, 군단끼리의 전쟁에서 개인의 무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건 내가 방심했군]
전장을 둘러보던 아스랄드가 한숨을 쉬었다.
이제 군단의 상위종들에게 해골병들이 밀리기 시작했다. 화력을 담당해야 할 중심인 리치와 해골마법사들이 상위종들에게 시선이 끌리니 본대의 화력이 팍 죽어버렸다.
초대형종이 건물까지 부수며 돌진하여 본대를 사정없이 짓밟고 깨부수면 제아무리 죽지 않는 언데드 부대라도 답이 없었다.
"으, 으아아..."
탑에 있던 고블린 왕은 사방에서 새하얀 해골들이 점차 줄어드는 모습에 기겁하며 몸을 떨었다. 아스랄드가 그나마 희망이었는데, 이제 그 희망까지 꺾여가고 있었다.
[죽기 싫다면 도망쳐라. 이 요새는 이제 지킬 수 없다. 놈들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그, 그게 무슨 소리냐!? 이곳은 우리의 전부다....!"
어느새 고블린 왕의 곁에 아스랄드가 나타났다. 그는 전투를 이미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싫다면 몰살당하는 수밖에]
"그게 할 소리냐! 라고 하신다!"
[지금 그 누구보다 화가 나는건 나다!]
빽 소리를 지른 고블린 왕을 걷어찬 아스랄드가 이를 갈며 푸른 안광을 불태웠다.
[목숨이나 연명하다 내가 저놈들을 다시 이 땅에서 몰아낼때, 다시 돌아오든말든 해라. 탐색전은 여기까지다]
그는 손을 튕겨 모든 해골들을 한줌 흙으로 되돌렸다. 자신의 판정패, 아니 완전한 패배를 인정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