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새로운 질서(6)
'군단 전체의 성장에 대해 길을 잃은 느낌...맞아. 그건 내가 인정해. 지금 우리는 어딘가 뒤섞인 상태지.'
이브는 무언가 느끼는게 있는 듯,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존재 답지 않게 자신이 어딘가 부족하다는걸 인정하고 수긍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주진출 이후, 아니 정확히는 나와의 합일 이후 이브에게 최우선 중요한건 더 이상 자기 자신이기도한 군단의 성장이 아니었다.
어쩌면 고등한 자아가 생긴 부작용 중 하나일 수도 있다. 분명 이브의 행동들은 어느 순간부터 하이브마인드인 자신의 자아 성장을, 전체적인 군단의 성장보다 우선하게 되는 결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군단이 점차 파멸을 불러오는 무차별한 괴물이 아닌 다양한 감정과 욕망을 바탕으로 모순을 일으키는, 마치 인간과 가까워지는 되어가는 기점이기도 했다.
'성장이란 피할 수 없으며, 피해서도 안 되는 일이야 이브. 너는 에덴의 미궁에 있을때보다, 미궁을 나온 직후보다 성장했어. 설령 그 결과가 과거에 비해 마음에 안 든다고 하더라도 성장하지 않고 진화하지 않는다는 것, 그건 네가 그토록 혐오하는 도태의 지름길이야.'
'그건 나도 알아.'
나는 혹시나 이브가 지금이 틀렸다고 여기며 과거로 돌아가려 할까 흠칫했다.
분명 과거의 이브는 파괴적이고 잔혹했다. 폭주하는 감정과 철두철미한 계산의 콜라보는 자신의 방해꾼들을 철저하고 유린하고 짓밟았다.
그러나 그 이후 많은 일들을 겪으며 자아를 성장시킨 이브는 다양성을 얻어가는 대신 과거의 칼날에 비해서는 조금 무뎌진게 사실이었다.
'맞아. 내게 되찾아야 할 근본은 없어. 근본은 지금 만들어나가는 중이니까. 하지만 재정비할 필요가 있는건 사실이야. 리하르트, 그놈의 방식은 내게도 꽤 흥미로운걸.'
이브는 내가 구축한 새로운 시스템에, 특히 리하르트의 방식을 마음에 들어했다. 나는 순간 이브가 리하르트를 탐내는게 아닌가 싶었지만 생각해보니 애초에 이브에게 서브마인드의 협조나 동의 따위는 필요 없었다.
서브마인드는 군단의 일부. 그리고 이브는 군단 그 자체. 불완전한 하이브마인드인 나와는 달리 군단 내부의 권능을 움직이는건 일도 아니다.
리하르트가 나에게 보고한, 새롭게 설계한 시스템이나 양산형 군단병들의 설계도를 군체의식에서 빼가는건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쉬웠다.
'그거로 대체 어쩌려고? 우리쪽에서도 아직 시험중인 것들이야. 무엇보다 오직 마계의 환경과 지형에 맞춰서 생산한 개체들이라 다른 곳에서는 효율이 별로일텐데.'
'내가 이것들을 완전히 배끼겠다는게 아니야. 피드백을 받아들이겠다는거지. '
이브가 후후 거리며 웃었다. 무언가 결심한 것은 확실했다. 내게는 우리 성과를 홀라당 가져가겠다는 이브를 말릴 방법이 없었다. 애초에 내가 이브에게 받은 초기 지원도 상당했으니까.
'일단은 이 명령어 시스템, 나도 가져야겠어. 그렇다면 내게 걸려있는 리미트도 한단계 풀어낼 수 있겠지. 현재 내가 동시 조작할 수 있는 최대 개체수는 단순계산으로 6,689,478,127개체. 계산대로면 내가 굳이 실시간 통제하지 않아도 되니까 100배 이상 불리는 것도 가능해.'
'에, 에너지 부족으로 어차피 반의 반도 못 채우잖아.'
'에너지는 부차적인 문제야. 나는 그냥 길을 잃어버린 내부 체제를 정돈하고픈 것 뿐. 압도적인 숫자의 군세. 분명 그것도 우리의 장점 중 하나니까. 어쩌면 어딘가 정체되기 시작한 전장의 흐름에 새로운 자극이 될 수 있겠지..'
앞으로 이브의 군단을 상대해야 하는 이들에게 명복을. 새롭게 내부 시스템을 가다듬은 군단의 물결이 어느 정도일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본체가 내 시스템을 가져갔다라. 나쁘지 않군. 그렇다면 더 많은 데이터를 얻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게 그렇게 되나?'
"게다가 그정도 존재라면 나보다도 잘써먹겠지. 어쩌면 시스템 자체를 더 진화시킬지도 몰라."
이브와 있었던 내 이야기를 들은 리하르트는 오히려 이브의 반응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애초에 리하르트의 가장 큰 목적은 자신의 실험과 연구가 성과를 거두는 것이니까.
"지금 내게도 전장의 상황이 보인다. 계산대로, 연맹의 지상군은 발악하며 저항하지만 우리를 이길 수 없다."
리하르트의 말에 나는 정찰삼아 허공에 머물고 있는 비행종의 시선에 집중했다.
지상은 지금 검은 물결이 포탄과 화망을 몸으로 부딪히며 기어이 뚫어내고, 당황한 적들을 급습하는 중이었다.
"당황했겠지. 놀랐겠지. 그리고 그 당황은 곧 공포가 될 것이다. 군단병들은 두려움이 없다. 생물이 가지는 당연한 생존본능? 그딴 것도 없다. 내가 보기에 군단이 가지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이것이다. 그런데, 이 죽음의 군단의 주인인 하이브마인드가 본능을 가져버리고 인간처럼 굴면 그 장점을 잡아먹는 것이다."
'감정을 통해 이득을 보는 장면도 분명 많았어.'
"물론 그렇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상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단지 앞으로의 일을 말한 것 뿐."
'그게 걱정이라면 문제 없겠군. 명령어 시스템을 가져간 이브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이 직접 군단병들을 컨트롤하지 않을테니까.'
리하르트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았다. 다만 걱정하지는 않았다.
점차 다양해지고 복합적으로 성장하는 이브의 자아가 군단의 주축을 차지하는 양산형 군단병들에게도 영향을 준다는건 사실이었지만, 어차피 그것도 보완될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건 이 마계를 쓸어버리는 일만 남았군!"
그가 낄낄거리면서 웃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어찌보면 우리 내부에서 가장 똑똑한 인물은 그일 것이다. 다만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들었던, 젋고 유능하고 냉철한 엘리트의 이미지는 이제 완전히 날아갔다.
*
"본대! 본대 제발 응답 바람!"
"틀렸어...너무 많아!"
대지를 달구는 뜨거운 태양이 서서히 넘어간다. 여명과 함께 시작한 전투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던 것이었다.
머리에 쓴 헬멧에 장착된 통신기를 붙잡고 있던 병사 하나가 오열하듯 소리쳤지만, 이미 파손된 듯 통신기는 묵묵부답이었다.
곁에 있던 다른 병사는 반쯤 정신을 놓은 채 들고 있던 소총을 전방에 난사했다.
부서진 전차를 타넘는 커다랗고 기괴한 벌레들이 나노슈트를 입은 사람도 단숨에 으깨 죽이는 턱을 딱딱거리며 몰려오다 총탄에 맞고 진득한 체액을 흘리며 쓰러졌다.
"커헉..."
하지만 총탄에 직격당해 쓰러지는 벌레들은 전체에 비하면 정말 한줌에 불과했다.
탄환이 떨어진 사이 한마리와 정면으로 충돌한 그는 총을 놓치고, 바닥에 쓰러졌다. 어느새 억새고 뾰족한 다리가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개자식...죽어! 제발!"
그는 슈트에서 뽑아낸 플라즈마 커터로 그 다리를 잘라버렸으나 한쪽 다리가 잘려나간 이 거대한 벌레는 마치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듯이, 조금의 흔들림 없이 다른 발로 그의 팔을 짓눌러 검을 봉인해 버렸다.
"아..."
거대학 턱을 쩍 벌린 벌레의 양 턱이 바닥을 긁으며 양쪽에서 그의 목을 향해 쇄도했다. 그는 그 무심한 8개의 붉은 눈을 보고 그제서야 직감했다.
지금 자신들이 상대하는 괴물들은 그동안 쫓아내왔던 마계의 마수들과는 그 근본부터가 다른 진짜 괴물들임을, 일확천금을 노리고 회사의 모집공고에 자원한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었음을.
'진격, 그리고 섬멸.'
그의 머리를 아주 가볍게 몸과 분리시킨 이 벌레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한가지 생각만 하는 존재였다. 5개뿐인 다리로 빠르게 다음 타깃을 정한 뒤 그곳으로 돌진했다.
"도망쳐..후퇴! 후퇴!"
"대체 지원은 언제 오는거야!?"
한번 무너진 방어선은 조금의 멈춤 없이 끝까지 밀렸다. 이 벌레들은 포탄이 터지고 총탄에 맞아도 움직일수만 있다면 앞으로 전진하고 연맹의 군인들에게 달려들었다.
그 어마어마한 숫자보다도 문제가 되는건 바로 이 이질감에서 비롯되는 공포심. 심지어 이런 존재들과의 전투 경험마저 없던 이들이기에, 더 쉽게 빠지게 된 공포심은 그나마 우수한 장비와 화력으로 버티던 최후의 저항마저 부숴버렸다.
"으아악!"
탑승물에 타고 몰려들던 벌레들에 기관포를 난사하며 버티던 이가, 저 앞에서 또 다른 탑승물이 버티지 못해 벌레들에 뒤덮여버리곤 조종사는 끄집어내어져 토막나 죽는걸 보고 패닉에 빠져 대열을 이탈해 뒷걸음질 쳤다.
"어디가 미친...아악!"
"뚫렸다!"
군단병들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자신이 죽든말든 그곳으로 몸을 우겨넣고 틈을 째고 벌렸다.
이렇게 공포심으로 무너진 진형에 파고든 군단병들의 턱이 번득이면, 다리가 휘둘러지면 토막나고 관통당하는 연맹군의 시체가 바닥에 쌓여갔다.
이미 주변엔 참혹한 시체들과 파괴당한 장비들 뿐이었다.
지나간 자리에 그 무엇도 남기지 않는다는, 메뚜기들이 만드는 끔찍한 재앙 황충. 그에 걸맞는 재앙이 지금 이곳에서 재현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