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휴대폰에서 군단이 자란다-176화 (176/254)

176화-새로운 질서(1)

"모두 반갑습니다. 제 말, 들리시죠? 번역기 상태는."

"문제 없습니다."

우리가 이 우주 함선에 탑승했을 때. 우리를 맞이한건 미리 탑승해 있던 인원들과 군복이 아닌, 일반적인 정장처럼 보이는 제복을 입은 연맹의 간부였다.

"저는 이번 프로젝트에 함께 하게 된 아레스 의회의 소의원 크리스티안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의원이라고 간단히 소개한 그는 곁에 있던 보좌관에게 착용하고 있던 번역기를 점검 받은 뒤 다시 우리 앞에 섰다.

"차후 일정에 대해 이미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어...일정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원래는 급히 개척지 시안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예상외로 일이 잘 풀려서요."

그는 일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역시, 나와 이브가 예상한 것과 똑같았다. 이브가 개척지를 향한 침공을 그만둔 상태인데도, 급하게 진행한 일정을 강행할 이유가 있는건가.

"그럼 어떻게 합니까. 듣자니 그 개척지라는 곳이 상당히 위험한 상황인 것 같던데."

"그렇죠. 대신 저희는 다른 곳으로 갑니다. 폴, 설명 드려."

누군가의 질문에 그는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이곤 자신의 옆에 있던 보좌관에게 설명을 떠넘겼다.

보좌관은 익숙한듯 손목에 차고 있던 장치를 이용해 허공에 화면을 띄웠다.

"내가 뭘 잘못 보고 있나? 왜 트롤이 저기 있지?"

"트롤이 아니야. 그냥...거인인가?"

헌터들 사이에 술렁임이 퍼졌다. 연맹의 기갑부대와 보병들로 추정되는 이들과 싸우고 있는 괴물들. 그들은 분명 마계의 트롤과 비슷한 생김새를 가진 보라색 피부의 괴물들이었다.

"맞습니다. 아주 사악한 괴물들이죠."

사람들의 술렁임에 크리스티안이 맞장구를 쳤다. 사실 이렇게까지 놀랄 일은 아니다. 전 우주에 손을 뻗친 게임을 통해 차원의 벽이 허물어진 이상 외계종족의 등장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나, 그리고 이브는 다른 부분에 집중했다. 대체 왜 연맹이 저들과 싸우고 있는지. 동시에 왜 우리에게 이것을 보여주는지.

"저곳엔 가슴 아픈 사연이 있습니다. 저희는 사악한 악에 맞서, 저곳을 해방시키기 위해 그들을 돕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번엔 이걸 봐주십시오."

평소 성격인지 조금 과장된 리액션을 보이던 그를 이어서 그의 보좌관이 새로운 자료를 보여주었다.

저 행성의 이름은 현지인들이 부르는 식으로 라쿰. 최근 저곳을 발견하게 된 연맹은 지구에 그랬던 것 처럼 우호적으로 접근했으나, 두개의 세력으로 갈라진 그들 중 유독 강세인 세력이 연맹을 배척하고 반대파를 학살하고 있다는 내용의 자료였다.

"따라서 저희는 생존권을 위해 도움을 청하는 약소세력의 지원요청에 따라 병력을 파견하여 정의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전투를 치루고 있습니다."

'자유? 정의?'

흔들림 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보좌관의 모습에 이브가 코웃음을 쳤다. 이브와는 달리 대놓고 내색은 안했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다.

연맹에 대해, 그리고 지금 우주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다소 무지할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모를지 모르겠지만 지금 나와 이브는 연맹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대항 세력이었던 반군연합이 이번에 새롭게 다차원연합을 결성하여 결과적으로는 여러가지 힘을 손에 넣은 것 같으니 자기들도 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연맹에겐 다차원연합군과는 다른 치명적인 한가지 요소가 있었다. 바로 여러 세력을 강제로 단결시켜줄 목숨을 위협하는, 말도 통하지 않는 강력한 괴물세력이 없다는 것.

'근데 그걸 채우기 위해 선택한게 이거야? 갈라치기? 인간놈들이란...'

이브는 대놓고 그들을 비웃었다. 조금 오글거리는 표현이긴 했지만 나도 그것에 반박하진 못했다. 진짜 종족특성이 있는건지.

"그러면, 우리보고 저곳으로 가서 저 트롤...이 아니라 거인들과 싸우라는 건가요?"

"단순한 거인들이, 아니 생명체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가진 힘이 군대의 화력을 극복할만큼 독특하고 강하기에 저희는 이런 상황에 익숙한 여러분이 큰 도움이 될거라고 판단했습니다."

크리스티안은 순순히 인정했다. 어차피 우릴 용병삼아 데려온 이유야 이전부터 명확했으니 반발은 적었다.

"필요한 지원이라던지 자료는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푹 쉬시고, 곧 본성에 도착하니 그곳에서 자세한 이야기들 들으시죠."

그리고 지금 곧장 전장으로 밀어넣지도 않았다. 약간의 자유시간을 받은 우리는 함선 내 배정된 공간으로 뿔뿔히 흩어졌다.

'놈들의 얕은 수작질. 전부 알겠어. 그리고 어쩌면 이용할 수 있을지도.'

'이용한다고?'

'건방진 놈들, 연맹은 분명 나를 갑자기 나타난 쓸만한 장애물 정도로 여기고 있는게 분명해.'

혹시 모를 의심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우주가 보이는 창가 앞에 서서 군체의식으로 대화를 나눴다.

'언제는 연맹도 연합도, 온 우주가 너만을 보게 만들겠다더니?'

'...현실을 보기로 했어. 어차피 서로 끝까지 소모만 하면서 싸워도 내가 이겨. 그러니 이렇게 적당히 치고박으면서 시간을 끌겠다면, 다른 방법도 생각해 봐야지.'

이브는 툴툴거리면서도 과거의 자신이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고 인정했다. 억지로 수긍하면서도 끝내 감정과 마음으로는 분노하고 증오하던 때에 비하면 상당히 발전한 것이다.

'무슨 짓이야?'

'여러가지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잘 크고 있네.'

'...하이브마인드가 된 그 순간을 기점으로 너도 슬슬 이상해지는 것 같아.'

내가 자랑스러운 자식 대견해 하듯이 이브의 머리를 슬슬 쓰다듬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돌아보는 몸이 움찔거렸다. 이상하다고 하면서도 손길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나는 아직 이브의 마음 속에 내가 가진 영향력이 분명 존재함을 재확인했다.

'이상해진게 아니라 나도 성장한거지. 언제까지 힘 없고 존재감 없이 끌려다닐 순 없었어. 너처럼, 나도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 것일 뿐.'

나는 이미 불완전한 하이브마인드가 된 순간부터 방황하던 나의 길을 확고히 정했다. 지금도 나는 달린다.

내 의식은 지금 이곳에 있지만, 나와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 지금도 다른 세상에서 왕성히 활동하고 있다.

내 동생, 내 동생의 친구, 그 친구의 유닛 등등...그런건 이제 부차적인 문제다. 우리는 군단, 여럿이자 하나. 그리고 오직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존재한다.

그 목적이 곧 나의 목적이다. 악인도, 선인도 아니었던 애매한 일개 소시민이었던 나는 지금껏 매번 끌려다니며 발버둥만 치다 처음으로 욕심을 부렸다.

나는 둘 다 가질 것이다. 이브도, 이 세상도.

'그래서. 현 상황에 새롭게 짠 계획은 뭐지?'

'간단해. 당분간은 연합군과 물고 물리는 싸움을 계속해서 힘을 계속 빼놔야지. 그러면 그걸 본 연맹이 가만히 있을까? 내가 보기에, 연맹은 지금 리미터를 넘은 것 같은데?'

'...절대 가만히 있을리 없지.'

나는 이브의 계획에 동조했다.

지금 연맹은, 정확히는 연맹의 세력 중 하나인 아레스는 폭주기관차의 시동을 걸고 가속페달을 밟은 상태다.

그 진정한 목적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어쨌든 실마리를 찾았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지금 힘을 탐하고 있다.

그 힘을 어느 정도 손에 넣었을 때. 과연 가만히 들고만 있을까. 문득 헛웃음이 나왔다. 여기에서도, 이 우주에서도 인류는 또! 자기들 끼리의 내분으로 고난을 겪는건가?

'하지만 그렇게 힘을 비축한 연맹이 힘빠진 우리까지 쓸어버리면 어떡하려고.'

'그건 앞으로 대비해야지. 새로운 행성을 먹어치우고, 더 많은 병력을 생산하고, 쓸만한... 서브마인드들도 만들고.'

이브는 이미 계산을 마친듯 나를 보며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우리가 있던 방의 자동문이 지잉 하고 열린게 그때였다.

"아...미, 미안! 기척이 분명...둘이 같이 있는 줄 몰랐.."

몸을 돌려 확인하니 찾아온 이는 차지연이었다. 나는 놀라서는 황급히 떠나려는 그녀를 붙잡으려 했으나, 이브가 내 팔을 확 잡아 끌었다.

"이따 다시 와. 지금은 우리 둘만 있을거니까."

그러고선 히죽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순간 기가 찬 나는 어쩔 줄 모르고 후다닥 자리를 벗어난 그녀를 잡을 수 없었다.

'왜 그리 경계해? 차지연은 그냥...'

'저 여자는 내가 찜했어.'

'...뭐?'

'눈치를 보아하니 역시 네가 탐을 내는 것 같은데, 다른건 다 줘도 저 여자 만큼은 네게 못줘. 네게 주느니 차라리 내가 가질거야.'

이브가 날 올려다 보며 싱긋 웃었다. 심지어 진심임이 확실했다.

*

"다들 잘 있나? 곧 정거장에 진입한다."

"평범합니다. 관계도라던가 기본적인 성향 등의 정보는 사전에 제공받은 자료와 동일합니다."

안전을 위해 규정대로 행성과 멀리 떨어진 좌표에 워프를 끝낸 함선이 점차 행성에 가까워졌다.

헌터들을 안내했던 의원 크리스티안은 다들 쉬는 동안에도 상황실에서 일을 쉬지 않았다.

"포섭을 통해 완전전향 가능성이 있는 이들을 더 알아보게. 되도록 실력이 뛰어난 이들로."

그 일이란 다름아닌 헌터들의 감시였다. 카메라는 기본 음성까지 도청하여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알아내는 중이었다.

"좀 특이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사전 제공 자료에서도 주목하라 하긴 했는데."

"...한 쌍의 남녀로군."

"약 49분간 단 한마디 대화도 없이 서로 붙어있기만 했습니다."

보좌관 폴이 특이하다며 제시한 자료는 방의 창가에 서 있는 두 남녀였다. 그 말대로, 두 사람은 이따금씩 눈을 마주치거나 스킨쉽을 하는 것 외에 밖에서 외부인이 찾아 올 때까지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뭐 상관 없네. 실력만 확실하다면. 그리고 연인 관계면 오히려 좋아. 서로를 이용해 다루기 더 쉬우니까. 앞으로도 잘 주시하게."

크리스티안은 대수롭지 않게 그들을 눈여겨 보고, 자료에 앞으로도 신경쓰라는 의미로 따로 표시를 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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