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휴대폰에서 군단이 자란다-175화 (175/254)

175화-제 3세력(10)

상황이 그리 좋지만은 않다. 혼자서 군단 전체를 통솔하는 이브는 갖지 못한 다양성, 그리고 그 다양성에서 나오는 시너지를 바탕으로 한 연합군의 힘이 생각 이상이다.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있을거라 생각한 우리의 예상과는 다른, 지금까지와는 다른 진흙탕 싸움의 시작이다.

"식량을 만들어야 하고, 자원을 캐서 가공해야 하고, 인구수를 늘리기 위해 교미를 하고 육아를 해야 하는 그놈들도 알게 되겠지. 그 끝에 진정한 승자가 누가 될지."

이브는 분노를 삭혔다. 사실 따지고보면 익숙한 일의 반복일 뿐이었다. 최근 적들의 뒤통수를 연달아 치며 임팩트 있는 등장을 알렸지만, 결국 우리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머쥐었을 때는 도전자의 입장에서 기존 세력을 축출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우리는 그 근본이 지키는 존재가 아닌 빼앗는 존재, 쥐고서 수비하는 쪽이 아니라 공격하는 쪽이었으니까.

오히려 좋다. 우리에겐 하나하나 차근차근 공략해 나가는 것이 전심전력으로 쳐들어 오는 적들을 상대로 방어하는 것보다 쉽다.

"지금까지 아무 일 없었잖아요. 그러니까 앞으로도 아무 일 없이 돌아올 수 있을거야."

"하지만 뉴스에선..."

"정말 아무 문제 없어요."

나는 어머니를 끌어안으며 안심시켰다.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른다. 정말 아무것도. 지독한 불효지만 진실을 알려드리는건 장담컨데 더한 불효다.

"이렇게 어린 애도 데려 간다니...아무리 잘 싸운다지만 너무한 것 아니냐."

"자, 자원한거니까."

어머니는 이번에 곁에 있던 이브도 안아주었다. 신신당부한 덕에 기분이 별로인 이브도 지금은 얌전히 있어주었다.

동생일의 여파인가, 어머니는 생판 남인 이브를 유독 걱정했다.

'기분이 묘해보이네.'

'...인간들이 날 위해줄 때마다 그날 이후로 계속 헷갈려. 머리로는 알고 있기에 내 행동에 영향은 없지만 그래도 혼란스럽거든. 이 감정을 차단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

작별인사를 끝낸 어머니가 자리를 떠날때. 나는 이브와 군체의식을 통해 대화를 나누었다. 이브는 오늘 의외로 자신의 상태를 순순히 인정했다.

지금 말하는 그날이란 내 의도대로 인간으로 위장해서 활동하던 이브가 큰 충격을 받고, 흔들리던 마음을 다잡고 군단의 하이브마인드임을 되새기던 그때를 의미했다.

평범한 헌터 맥스가, 자신을 위해 희생한 그때를.

'이상할거 없어. 굳이 종으로만 모든걸 구분하려 하지마. 나는 지금도 지구연합군과 싸우고 있는 마계의 마족놈들이 인간들과 손잡은게 믿기지 않아. 너도 마찬가지야. 우리의 편인가, 아닌가만 고려해. 설령 인간이라도 우리 편이 될 수 있는거야.'

나는 이브가 무차별적인 포식 말고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에 아직도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혼자서 싸우는 것에 한계를 느끼면 분명 도움을 찾지 않을까?

본인도 분명 그걸 알고 있기에 리암 같은 서브마인드를 만든 것이다.

'그 말이 맞아. 짜증나더라도 지금은 수단을 가릴 때는 아닌 것 같네.'

현재 현실의 벽에 부딪힌 상태인 이브는 내 말에 동의했다. 물론 온전히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이동해야 합니다. 이쪽으로."

"...여기가 지구인걸 감안하면 장관이긴 하네."

대상자들과 그 가족들의 작별인사까지 끝나자 출발 준비가 최종적으로 끝났다. 나는 하늘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대도시 마천루들의 스카이라인 위로, 거대한 함선들이 떠 있었다. 물론 도심과 우주전함 모두 군단의 기록을 볼 수 있는 내게는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이곳이 지구임을 생각해야 한다.

외계인 논쟁이 한창 뜨겁던게 불과 십여년 전인데, 여기까지 온 것이다.

"저기 보이는 기함 탄틀라스가 여러분을 연맹의 본성으로 수송할 전함입니다. 그리고 그 곁에 있는건 이제부터 지구연합군과 함께 마계와 싸울 저희 측 병력들입니다. 중간에 불미스러운 일들도 좀 있었지만...어쨌든 제 역할은 여기까지군요. 이제부턴 그들이 여러분을 안내할 겁니다."

로멜중령이 다른 대륙을 돌며 다른 이들을 태우고 이곳으로 오고 있는 거대한 전함을 가리키며, 자부심이 느껴지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리하르트의 탈주 과정에서 벌어진 폭발 사건을 필사적으로 은폐한걸 뻔히 아는 나는 그냥...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궁금하긴 해. 나는 분명 개척지에 대한 공세는 함락 직전에서 중단했어. 하지만 놈들이 급하게 추진한 차출작전은 그대로 가고 있잖아. 의도가 뭐지?"

"...어쩌면 그게 중요한 키가 될 수도 있지."

도시를 넘어 강을 넘어 점차 다가오는 그 전함을 보며 이브가 남들이, 특히 연맹 사람들이 들으면 뒤로 뒤집어질 중대한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 밖으로 꺼내었다.

연맹이 급하게 지구의 수호자 연합과 동맹을 추진하고 헌터들을 자기네 땅으로 데려가려는 이유는 분명 이브의 침공일게 뻔했다.

하지만, 연합군의 공세를 막아내는데 집중하느라 현재 이브는 그들의 개척지를 향한 공격은 중단한 상태. 그럼에도 연맹은 급하게 추진하던 이 일을 멈추지 않았다.

'연맹의 신무기 요새급 전함 자코프는 그동안 동력의 안정화 문제덕에 실현 불가능으로 여겨지던 꿈의 병기. 하지만 그게 성공했다는건, 무언가 있다는 것이겠지.'

연맹 출신이자 이제는 내 서브마인드가 된 리하르트는 그 이유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상대적으로 세력이 적은 반군들도 소속되어 있던 유닛이나 플레이어들을 이용해 여러 세상의 세력들을 끌여들였어. 연맹이라고 못할까."

"연맹도 연합군에 맞먹는 새로운 질서를 만드려는 건가? 여유가 넘치네."

이브는 내 말에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그 웃음엔 씁쓸함도 섞여 있었다.

결국 이브는 대규모 인류 세력인 연맹과 연합 모두가 경계하는 집단이 되는데 실패한 셈이니까.

*

"본성에서 온 통신인데, 지금 선별했던 지구인들을 모두 태웠다고 합니다."

"잘 진행되고 있구만? 계획들은 착착 진행되고 있고. 골칫거리였던 개척지도...구하는데 성공했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창 밖을 내려다 보았다. 적들의 공격에 반파되어 고물이 되어버린 상시 워프 시설 홀 밑으로, 푸른 행성이 보이고 있었다.

"그 괴물들이 싹 사라진 것, 역시 반군놈들 때문이겠지?"

"그럴겁니다."

그의 말에 보좌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견 함대의 사령관인 그에겐 이 덩치 큰 함선은 개입하지 못하던 지상의 일이 유일한 골칫거리였으나 최근 그 일도 어찌 잘 마무리되는 분위기였다.

지상을 뒤덮고 미친듯이 몰아치던 괴물들. 그러나 끝도 없이 몰려오던 그 괴물들은 지금 모두 없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우수한 인력인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상부는 여전히 욕심을 부릴 것 같나?"

"제가 보기에는...그렇습니다."

움찔한 보좌관은 그의 질문에 긍정했다. 그들은 연맹의 세력 중 하나인 아레스 소속이다. 아레스는 운좋게도 연맹 중 가장 먼저 플레이어와 유저를 이용, 지구라는 지금까지 탐지할 수 '없었던' 세상을 발견하는데 성공했다.

지구는 일반적인 개척지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고, 세력의 수뇌부는 지구에서 얻은 수확에 취해 더 큰 이득을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의 기폭제가 된 것이 바로 반군연합이 결성한 일종의 다차원연합군.

연합군은 무차별적인 군단의 습격에 살아남기 위해 뭉친 것이지만 어쨌든 연맹은 자신들의 숙적인 그들의 힘이 급격히 커지고 발달하는걸 경계했다.

"그러면, 우리에게 자코프와 함대를 이끌고 이 좌표로 이동하라는 명령 역시 그것과 관련 있겠지?"

사령관은 쓰게 웃으며 홀로그램으로 떠오른 화면을 가리켰다. 보좌관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자고...내가 볼때는 그 우주괴물들부터 빨리 처리해야 하는데, 상부는 그 괴물들을 쓸만한 장기말 정도로 생각하고 있으니 원."

혀를 찬 그가 모자를 고쳐쓰며 본격적으로 임무 시작을 알렸다.

우직한 군인인 그에게 상부의 이번 명령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초에 연맹의 상층부는 예전부터 세력 다툼에 한창이었다. 그들에게 갑작스레 나타난 우주괴물 세력은 마침 거슬리는 적들이었던 반군들을 대신 공격해주는 좋은 장기말이었을 뿐이다.

개척지가 공격당했을 때는 움찔했지만 신무기 자코프의 등장과 군단의 내부사정으로 격퇴에 성공했으니 그저 하나의 헤프닝으로 넘겼다.

이런 상황에서, 소위 '뽕맛'을 제대로 느낀 아레스 상부는 세력 다툼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지구 이후로도 적극적으로 플레이어와 유저를 찾아다니며 새로운 세상을 개척해 나갔다.

"저희에게 제공된 정보에 의하면 동물의 모습을 한 인류, 즉 수인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라고 합니다. 명령서에는 만약 그들이 협력을 거부한다면..."

"우린 군인이지 우주 해적 집단이 아니야. 협력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야지. 지금 내각은 탐욕에 눈이 멀었어."

사령관은 워프를 시작하는 진동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