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제 3세력(9)
"그 애를 처음 인터넷으로 봤을때 솔직히 좀 놀랐어."
"실력이 뛰어나서요?"
묘하게 콧대가 간질거렸다. 자식이 칭찬 받는 기분이 이런건가?
"아니, 그 애의 검과 살의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어서."
그러나 차지연의 말은 무지성 칭찬이 아니었다. 물론 방금 언급한 것들은 나도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내가 억제하거나 유도하지 않았다면 이브에겐 지구도 결국 먹어치울 땅에 지나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망설임이 없다는건 그만큼 고뇌하고 결국 스스로 자멸할 일도 없다는거니까. 그 힘을 분출하는 방향만 잘 잡아준다면 충분하겠지. 오히려 그런 면은 부러워."
"...길은 있을겁니다. 단지 새로운 기회가 왔을 때. 그때가 되면 선택을 해야겠죠."
욕심을 좀 내도 괜찮지 않을까? 차지연의 힘들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리암 같은 이도 서브마인드로 만드는데 괜찮지 않을까?
설령 이브가 탐내지 않더라도 나는 다르다. 나 역시 군단의 하이브마인드로서, 언제나 강해질 방법을 구상한다.
"오랜만에 만나서 즐거웠어. 앞으로 볼 일 많을테니까...그때 보자."
차지연은 그길로 자신의 방으로 떠났다. 나는 그 뒷모습을 그냥 가만히 지켜보았다. 일단은 기회를 조금 노려봐야 하니까. 그녀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설득의 순간은 그녀가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는 순간이 될 것이다.
*
[...]
"잡음이 섞여서 아무리 청각을 강화해도 잘 들리진 않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시점, 문에 찰싹 달라붙어 귀를 대고 있던 이브는 변형시킨 귀를 다시 평범한 인간의 귀로 되돌렸다.
[합일을 이룬 이후 집착은 좀 나아진 것 같더니]
"합일이 무색하게도, 그는 다시 내 손아귀를 벗어나버렸잖아."
투덜거린 이브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군단 내에서 서로 대등한 위치에 서게 된 덕에 이브는 더 이상 군체의식을 이용해 신우가 무엇을 듣고 말하는지 일방적으로 살피게 되지 못했다.
"게다가 합일 이전에도 그의 마음을 뒤흔들던 암컷이니까. 안절부절 못하던 그때 생각만 하면 아직도 짜증이 나."
[그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는 것 같던데]
"시끄러. 일단 지금 중요한건 따로 있으니까."
고개를 저은 이브가 이번엔 의식을 다른 곳에 집중했다. 지금 이곳에선 이렇게 여유롭게 굴고 있지만, 사실 우주 너머에 있는 본진들이 지금 동시다발적인 전쟁을 앞두고 있었다.
'일단은 대대적인 개편을 해야겠어.'
모든걸 가질 순 없다. 라는 대명제를 이해하고 있던 이브는 분하고 화가 나더라도 일단 승리를 먼저 챙기기로 결정했다.
일단 그것을 위해 가장 먼저 결정한 것은 지상군 개편이었다.
'이제 상대하는 적들이 우주군인 만큼, 그놈들에 맞춰서 가야지.'
지금도 프로그램 입력하듯 반자동으로 활동하고 있는 둥지들에선 군단병들이 쉬지 않고 생산되고 있다. 이브는 그들의 형태와 힘을 목적과 쓰임새에 맞게 개조하고 개편해 나갔다.
지금까지 생산되던 지상군은 몇몇 병종이 추가된걸 제외하면 모두 미궁에서 기어나와 마법사들을 상대하던 때에 고정되어 있었으니까.
'화력에 견딜 수 있는 튼튼한 장갑과, 기동력.'
이브는 새롭게 만들어지는 중대형의 양산형 군단병들은 철저히 원거리 화력전을 주특기로 하는 우주군에 맞춰 설계했다.
자연스레 그 형태도 방어력을 올리기 쉬운 갑각류나, 벌레, 기동력을 살리기 위한 네발 짐승등으로 고정되었다.
[그렇게 되면 벽을 탄다거나 하는 유연한 움직임은 힘들어질텐데?]
"상관 없어. 놈들 틈에 숨어 있는 초인들은 어차피 어중간한 물량으로는 잡을 수 없으니까. 놈들은 상위종에게 전담하게 하고 놈들의 일반 병력을 밀어버리는게 나아."
그동안의 전투에서 우주 함대나 초인들에 비해 상대의 지상군은 사실상 무시해온 이브는 방침을 바꾸었다.
압도적인 화력으로 아군의 물량을 커버하는 적들을 지상에서도 확실하게 밀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화력에도 집중한다.'
군단병의 근본이 생물체라는 특성상, 형상력을 쓰지 않는 이상 기계화 병력의 화력을 화력으로 이기는건 불가능.
하지만 이브는 최소한의 화력을 갖추기 위한 병종도 더욱 강화했다.
여기 쓰인건 과거 잡아먹은 퇴화용종들의 유전자가 적극적으로 쓰였다.
기존부터 운용하던 지상포대인 지룡은 물론 부유하는 소형 포대로 만든, 곰치를 닮은 비룡까지.
이브는 달린 머리를 두개로 늘리는 등 화력 증강에 힘썼다. 그동안 세력을 타 행성으로까지 확장하며 먹어치운 수많은 생물종의 데이터가 고스란히 쓰였다.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군단은 지금도 이렇게 상대에 맞춰 꾸준하게 진화하고 있다]
"아직 부족해."
경험과 학습을 통해 진화한건 사실이나 이브는 아직 만족할 수 없었다. 결국 양산형이 아신 가장 중요한, 적들의 중요 요인을 상대해야 할 상위종들 역시 업그레이드가 필요했으니까.
하지만 이미 고화력을 갖춘 만능형인 상위종들의 업그레이드는 곧 하이브마인드인 이브 본인의 업그레이드이기도 했으니 쉬운건 아니었다.
'놈들의 부대가 완전히 근접했습니다.'
"발렌에 남겨 둔 함대를 나누어 파견한다. 아마 그렇게 해봤자 놈들은 또다시 지상에서 승부를 보려고 하겠지."
이브는 철저하게 준비를 마치고 시간차 공격을 들어오는 상대를 보며 혀를찼다. 간파한대로, 연합군은 전력을 온전히 써먹기 힘든 우주 함대전은 피하고 지상의 둥지를 테러하기 위해 강습 작전을 실행했다.
심지어 이브는 상대 함대를 무시하더라도 그 압도적인 함대 전력을 지상에 투자하기도 힘들었다.
지상은 오직 자신의 둥지뿐이니, 지상의 적들을 향해 포격한다면 결국 자기 살을 깎아먹는 행위였다.
"함대는 놈들을 적당히 견제만 한다. 나는, 절대 맞고만 있을 수 없어."
눈을 번득인 이브는 병력과 함께 함대의 일부를 빼돌렸다. 일방적으로 맞는건 이브가 가장 혐오하고 싫어하는 것이다.
상대가 이미 대비를 다 해놨을 확률이 높지만 지금의 이브에게는 그들을 뒤흔들 방법이 필요했다.
'소수 함대와 소수 병력을 파견해 무차별 공격하여, 놈들의 다른 행성들을 쑥대밭으로 만들거야.'
그 과정이 어떻든 일단은 무조건 이겨야하는, 물고물리는 지독한 전쟁의 시작이다. 그러나 이브는 그 와중에 상대의 약점과 자신의 강점을 정확히 이용하고자 했다.
서로 다 같이 죽어도 된다. 어차피 자신이 지금의 병력을 복구하는데는 몇달이면 충분하고, 적들은 일개 잡병 하나 만드는데도 십수년 이상이 걸리니까.
'다른거 다 필요 없어. 게이트 좌표만 알아 와.'
곧 이브의 명령을 받은 일부 병력이 몰려오는 적군을 눈앞에 두고 그대로 워프했다. 목적지는 당연히 연합군을 차출해 보낸 행성.
자신의 둥지 위 우주공간에서 본대끼리의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 이브는 긴급히 모여든 수비군을 향해 병력들을 돌진시켰다.
"예상대로 놈들이 왔습니다...!"
"요새는 수비용으로 쓰고, 워프가 가능한 기함급 함선체와 호위함급 함선체 십여체를 보냈군. 역시, 놈들은 우주에서 함대전을 할 생각이 없어. 전군 포격 준비!"
본대와는 달리, 행성을 지키는 방위군의 입장과 군단의 입장이 뒤바뀌었다. 이번엔 군단이 뚫는 입장이고, 그들이 방어하는 입장이다.
"지상은 걱정 말고 최대한 숫자를 줄인다..! 지상엔 그들이 있다!"
방위사령관은 몇 없는 고물 함선들을 긁어모아 무장시키고 온 힘을 다해 저항했다.
뾰족한 대형으로 진형을 잡은 군단의 함대가 그들의 저항과 포격을 뚫고, 마침내 기함급 함선체를 대기권에 보내는데 성공했다.
비록 여기저기 상처 입고 파손되어 다시 워프하는건 불가능하지만 그것만으로 역할을 다했다.
계획대로 행성 내부로 진입한 함선체 내부에서 대기하던 수천의 군단병들이 일제히 튀어나갈 준비를 마쳤다.
"...다른건 모르겠고 이것만 기억하시오. 싸울 때, 내 곁에 오지 마시오."
거대한 함선체가, 드넓은 대양에 떨어지며 거대한 해일을 만들었다. 저 멀리서 벌어진 그 광경을 지켜보며 서둘러 해변에 집결한건 미리 소집된 행성의 방위군.
이미 그들은 무엇을 해야하는지 전부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무엇을 상대해야 하는지도.
"우선, 개수작부터 좀 막아볼까."
심지어 믿는 구석도 있었다. 없는 장비 있는 장비 다 긁어모아 무장한 방위군과 함께 이곳을 지키기로 한 자는 보라색 피부를 가진, 원래의 세상에선 마족으로 불리던 자.
마계 연합 칼타스의 지령을 받고 연합에 파견된 이 고위마족의 마법이 터져나오며 일대에 옅은 마력풍을 흩날렸다.
"무...슨 짓을 한겁니까?"
"놈들이 게이트 좌표를 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힘을 조금 흩뿌렸을 뿐이오. 이제 남은건 싸우는 것 뿐이니 집중하시오. 고향을 지켜야 하지 않소."
그는 당황한 현지 지휘관의 말에 피식 웃으며 전방을 가리켰다.
대양에 가라앉기 시작한 함선체에서 튀어 나오는 수천의 군단병이 하늘이며 바다를 가르고 이곳을 향해 직행하고 있었다.
"쏴! 쏴버려라!"
바다에 뜬 해군과 육지에서 쏜 포병들의 포탄이 바다에 떨어지며 대폭발을 일으켰으나, 군단병들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결과가 어찌 나오든, 훗날 끔찍했던 전쟁으로 이름 남겠군.'
히죽 웃은 그가 마력을 끌어올리며 땅을 뒤틀고 자신의 몸을 휘감게 만들어 거대한 석상이 되어 본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렇게 끝끝내 화망을 뚫고 돌진해오는 군단병들에게, 등 뒤에 지켜야 할게 산더미인 연합군은 피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서서 정면으로 부딪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