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제 3세력(8)
'죽인다.'
두 존재는 지금 이 순간 오직 그것만을 생각하고 상대를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터져나온 충격파에 대기가 울리고 발을 디디는 땅이 뒤흔들렸다.
그때 이브의 검이 가르의 도끼에서 역으로 흡수한 에너지를 증폭시키더니, 참격의 형태로 뿜어내었다.
그는 당황하길 잠시, 전력을 당한 내려찍끼로 참격을 상쇄하고 땅을 부수며 이브에게 공격까지 가했다.
"너에게는, 너에게만큼은 절대 질 수 없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이브를 노려보는 그의 그 일격에 땅이 쩍 갈라지더니 폭발했다. 일대가 뒤흔들리고, 둥지가 덮었던 땅은 어지간한 운동장 크기 이상으로 깊게 파여 그 속살을 드러냈다.
'지금까지 내가 상대했던 모든 이들도 간절하고 절박했어. 이놈이라고 다르지 않아.'
금이 간 베리어를 복구한 이브가 검으로 땅을 찍으며 몸을 바로하고 다시 한번 달려들었다.
이브는 그가 말하는 짐을 짊어진다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간절한 마음가짐? 지금까지 목숨을 걸고 싸우던 이들 중 간절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언제나 자신의 승리였다. 그런 경험을 토대로, 이브는 자신이 가진 본성이 상대의 힘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퇴각, 윽...퇴각해야 합니다!"
군인들이 몰려드는 군단병들을 향해 사격을 지속하며, 구덩이 속에서 이브와 계속해서 격돌하는 가르를 향해 다급히 외쳤다.
그러나 지금 가르는 그 외침에 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도끼와 검이 서로 떨어질 줄 모르고 어지러이 날았다. 조금의 틈만 찾으면 단번에 상대의 몸을 베어내기 위해서.
서로가 뿜어내는 힘에 의해 지형이 조금씩 바뀌어 갔다. 묻혀있던 배관이 터져 물이 흐르거나, 무너져 내리는 구덩이 안으로 시체들이 떨어져 내렸다.
"상위종들이라는 다른 괴물들과 똑같다! 단지 그 안에 담긴 투력만 기상천외하게 높을 뿐, 분노와 살육 일변도인 네 검은 절대 나를 벨 수 없다!"
고함친 가르의 도끼가 이브의 검을 쳐냈다. 뭉쳐든 그의 붉은 투기가, 마침내 터져나왔다. 그것을 억누르던 공명법이 깨졌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죽어라!"
경지에 이른 전사의 참격이 이브를 향해 정통으로 뿜어졌다. 최악의 결과를 예상한 이브는 아바타의 모든 출력을 폭주시켜 방어에 투자했다.
"한가지는 다르군. 그 분노, 상위종들과는 확연히 다르게 느껴지는구나."
이브는 끌어올린 에너지로 펼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어 마법을 시전했다. 복잡하게 중첩된 마법진들이 금이 쩍쩍 간 상태로 그의 참격을 막아내었다.
'이게 마지막.'
인간을 초월한 한계치의 에너지를 뿜어낸 가르도, 그걸 막아낸 이브도 이제 서로의 힘이 거의 다 떨어졌음을 직감했다.
'그럴리가 없어. 내가 질리가...없어.'
이브와 가르가 서로를 향해 다시 한번 땅을 박찼다. 그 순간 이브는 계산의 결과를 부정했다. 이건 효율이니 계산이니 따질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무조건, 반드시 이기고 싶었다.
"큭..."
서로 힘이 많이 빠진 상태인데도 아직 상대방을 죽일 예기가 살아있었다.
콧수염까지 파르르 떨리던 가르는 자신의 가슴을 찌르려는 검을 후들거리는 팔로 가까스로 막아내었다.
"집념 하나만큼은...인정해야겠구나."
숨을 헐떡이는 가르가 점차 밀려났다. 수천 수만종의 생물 데이터를 가지고 있는 군단의 정수가 모여 만들어진 아바타의 근육이 한계를 벗어나 터지고 파열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이브는 힘을 거두지 않았다. 오직 그를 죽이기 위해, 모든 것을 건다.
"하지만 그런건 나도 할 수 있다.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은 언제나 빼앗기 위해 싸우는 것보다 위대하다. 이건, 복수가 아닌 후퇴하는 전우들을 위한 것이다."
"...!"
씩 웃은 가르의 무게중심이 순간 무너졌다.
온 힘을 다해 내려 찍던 이브의 검이 순식간에 빨려들어가, 도끼를 들고 있던 그의 한쪽 팔을 베어버렸다.
그러나 그 대가로 이브는 그가 제대로 휘두른 정권에 가슴을 얻어맞았다. 주먹에 휘감긴 투기가 폭발해 강력한 충격파가 터지며, 갑각이 부숴지고 신체 내부가 으깨지며 심장부의 동력기관이 파손되었다.
'아...'
이브의 의식이 튕겨나오고 아바타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는 군단병들의 시선을 통해 회수되는 그를 보는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전투는 끝났다. 그들은 결국 우리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후퇴한다. 하지만 진정한 승리는 어느 쪽인가]
군단병들이 끝내 영영 밖으로 적군을 완전히 몰아내었다. 전체적인 결과만 놓고 보면 결국 수비에 성공한 모양새였다.
'내가 졌다.'
하지만 이브는 자신이 졌다고 단언했다. 자신이 원했던 결과는 이런게 아니었다.
여기까지 성장한 이상 무난하고 단순한 승리 따위는 바라지 않았다. 자신은 모든 면에서 우월해야 하고, 적들을 압도적으로 짓눌러야했다.
그런 입장에서 상대가 자신과 대등한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자신이 공들여 만든 아바타까지 파손시켰다는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놈들의 함대가 이곳 상공에 나타났습니다.'
'알아. 센젤에도, 발렌에도, 심지어 에덴에도. 놈들의 반격은 이제 시작인가?'
게다가 제대로 된 연합군의 진짜 공세는 이제 시작이었을 뿐. 레이나의 보고를 받은 이브는 자신의 세력 전반에 접근하는 연합군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전이었다면 연맹의 거대함선 자코프의 등장처럼 상대의 발버둥에 오히려 즐거워 하고 좋아했겠지만, 지금의 이브는 공허함을 느끼고 있었다.
*
"신문물을 들고 온 연합군의 공격에 이길 수 없어서 그래?"
"...그런게 아니야."
내 말에 지금 바쁘게 병력을 통솔하고 있는 이브는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싸우는건 가능해. 소모전으로 끌고가서 이기는 것도 가능하지. 그건 우리만의 강점이니까. 애초에 이 상황도 뭐, 의도한거라고 치지."
이브가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분명 자기 자신이 바라던 바이긴 했다. 적들이 뭉쳐서 자신에게 맞서는 것.
하지만 이브가 이렇게 의기소침해진 이유는 기껏 적들을 뭉치게 만들었는데도 그들의 강점을 흡수하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결국 자신이 벼려 온 내면의 검이 상대의 것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졌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냥 이겨서는 의미가 없어. 그 자신만만한 콧대를 전부 짓밟지 않고서는."
"...그래. 일단은 당장 눈앞에 닥친 일들부터 처리하고."
지금 당장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브가 이렇게 패배감에 휩싸인건 사실 개인적 이유일 뿐 객관적으로 말하면 둥지가 조금 상한게 전부다.
게다가 곧이어 벌어질 전투들에서도 우리가 일방적으로 패배할 가능성은 낮았으니까.
나는 이브를 두고 혼자 밖으로 나왔다. 밖은 한창 바쁘다. 이제 우리가 시범 케이스가 되어 지구를 떠날 날이 머지 않았다.
"어?"
"응?"
그때, 그녀와 딱 마주쳤다. 서로의 일로 바빠 미디어가 아닌 이렇게 얼굴을 대면하는 식으로는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사람이었다.
"신우야."
"어떻게 여기 계세요?"
당황한 나는 마찬가지로 놀란 것 처럼 보이는 차지연에게 어떻게 여기 있냐며 먼저 말을 걸었다.
"알고 있을 것 같지만, 나도 그 사이 많이 바빴지."
"한국쪽에서 쭉 활동한거죠?"
"응."
곁에 앉은 차지연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슬쩍 살폈는데 분위기가 전에 비해 많이 바뀌어 있었다.
일단 굉장히 지쳐보였다. 깊고 맑았던 눈은 탁하고, 표정도 거의 변하지 않고 인형 같이 딱딱하게 굳은 상태였다.
"사람이 닳거나 지친다는게 뭔지 최근에 깨달았어."
"플레이어의 짓이죠?"
"그렇지. 대놓고 유닛간의 경쟁을 견제하는 수호자 연합에 외부세력의 개입까지. 이젠 거의 포기하고 대신 포인트 벌이에 집착하는 것 같아. 아니면 우리를 이용해 뭔가 외교적인 수단에 몰입하거나."
크리스와 같은 소속인 그녀는 그와 비슷한 말을 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난 상관 없었어. 마물들을 죽이고, 사람들을 지킬 수만 있다면. 하지만 이제 좀 지치기도 하네."
"이번에 파견되는 명단에...들어 있던데요."
나는 혀를 찼다. 이번 파견에는 그녀를 포함한 에볼루션의 헌터들도 여럿 포함되어 있다. 나야 내 의지로 자원한거지만, 그녀는 아닐 것이다.
"이젠 상관 없어. 전장에서 죽는게 낫다고 생각해. 내가 나인 상태에서. 혹시 내가 천혼술의 영혼 공진에 대해 말해줬던가?"
고개를 떨군 그녀가 영혼공진이라는 술법에 대해 말해주었다. 말그대로 영혼의 스트링을 이용한 술법이며, 연결된 이들의 혼을 공진시켜 능력을 극대화하는 기술.
그러나 그 대가로 연결된 존재들의 영혼은 점차 하나로 뒤섞여 뒤죽박죽이 되어버리며 끝내 자아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최악의 주술이었다.
"몇 번이나 남았을까. 3번? 5번? 빈껍데기 인형이 되기 전 명예롭게 죽는게 낫다고 생각해. 물론 플레이어는, 신경 안쓰겠지만."
"..."
나는 입을 달싹였다. 그녀가 처한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이렇게 마음이 쓰이는 이유는 단순했다. 그녀와 함께한 시간이 분명 있었으니까.
도움을 주는 것? 어쩌면 지금의 이브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물을 증오하고 사람들을 수호하는 진짜 영웅인 그녀가 탐식과 살육 그 자체인 군단과 엮이는게 가능할까 싶었다.
"너는 여전히 그 애랑 같이 다니지?"
그때, 그녀가 먼저 이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