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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휴대폰에서 군단이 자란다-172화 (172/254)

172화-제 3세력(7)

이브가 스스로 결정한 존재 이유는 끝없는 탐식과 성장이며 지금까지 오직 그것만을 위해 달려왔다.

무엇이든 먹어치우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존재 그러나 그런 존재도 차마 갖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강렬한 감정 그 이상의 것을 담아야 합니다. 저도 아직 잘 모르겠지만. 스승님은 그것이 곧 경지라고 하셨습니다."

내게 검술의 기초를 알려주던 과거의 지창현도 그런 말을 한적이 있다. 단순히 무기를 휘두르는게 전부가 아니라고.

단순히 힘만 담아 휘두르는 검으로는 기적을 만들 수 없다고. 그 당시 나는 어렴풋이 보이는 그 실마리에 그것이 거짓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내가 가진게, 살육을 위한 본능뿐이라고?"

이브가 이를 뿌드득 갈았다. 비단 내 옆에 있는 인간형 아바타만 그런게 아니었다. 전 우주에 퍼져있는 모든 군단이 격분했다.

압도적인 질량의 물리력으로도, 폭발하는 형상력으로도 얻지 못한 힘이라는 사실을 견딜 수 없는 것 처럼 보였다.

"진정해 이브."

'맞아. 난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내 목적을 잊어본 적 없어. 살육! 그리고 전쟁! 그것은 일개 수단에 불과하지만, 분명 내 목적을 이루는데 있어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었지.'

분기탱천한 이브가 전심전력으로 병력을 움직였다. 목적지는 지금 공격 당하는 라티스.

수백 수천개의 게이트가 열리고, 다른 행성에 주둔하고 있던 배 이상의 군단병들이 그곳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내가..내가 잘못한거야? 투쟁과 사투는 지금껏 존재해 온 나의 전부야. 내가 괜히 버려진 척박한 행성이 아니라 인간놈들이 살아가는 행성을 공격하는게 아니야. 나는 싸워야만 해. 투쟁하고, 그걸 통해서 진화해야 해.'

"...아니야. 그것이 네 진정한 모습이라면, 넌 잘못한게 아니야."

나는 자기 분을 못이기고 눈물 흘리는 이브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우주 진출을 계기로 무언가를 깨달은 이브는 진득히 시간을 두고 버려진 행성들을 파먹으며 차분히 힘을 기른다는 선택지는 애시당초 진지하게 고려하지도 않았다.

그런 척박한 행성은 행성 에너지 추출 효율이 떨어진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이브의 성향 때문이기도 했었다.

이브는 창조하고 만드는 것 보단 모방하고 빼앗는걸 근본으로 두었다. 착실히 차근차근 발전하는것보다는, 대등하거나 그 이상의 상대와 격렬한 전쟁을 통해 미친듯이 스텝 업 하는걸 선호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것이 현재까지 발달시켜온 '이브'라는 존재의 근본이며, 자아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내 눈이 가라앉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살육의 괴물 그 자체인 이브는 원래부터 이렇게 될 존재였는지, 아니면 그 과정이 이렇게 만들어 버린건지.

[네가 자책할 일은 전혀 없다. 지금까지의 너는 선택지 중에서 가장 최선인 수만 선택해 왔으니까]

이브를 안아준 내 눈에 글자들이 아른거렸다.

다만 이것이 정말로 최선의 수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만약 내가 이브와의 합일을 거부하고 끝까지 밀고 당기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성공했더라면, 혹은 아예 처음부터 이브에게 나만의 가치관을 가르치고 주입시켜 그 본성을 억누르게 만들었다면.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의미가 있느냐]

"혹시 모르지. 다음 회차의 내가 다른 선택을 해줄지도 모르니까."

[...]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당신들이라면 무슨 짓이든 가능할 것 같았거든."

말문이 막혔는지 떠오르지 않는 글자들에 나는 피식 웃었다.

"뭐 이해해. 당신에게도 제약이 크게 걸려있는 것 같으니까."

[억측은 그만둬라]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지."

회차가 반복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걸 희미하게나마 알아챈건 조금 되었다. 그렇게 알고 있는 티를 내는데 어림짐작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시간을 돌린다고? 그게 가능해?"

한창 전쟁으로 바쁠 이브가 이 와중에 흥미를 보였다.

[...아무,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다. 설령 사실이어도 너희에겐 무슨 소용이냐. 회귀하게 되면 지금의 너희는 사라진다. 이브 너는 다시 미궁 최하층의 세포덩어리가 되는 것이고, 강신우 너는 아무것도 모르던 평범한 대학생이 되는 것이다]

"만약 반복시키는게 사실이라면 그 이유가 뭘까."

"자기들 마음에 안드는 결과가 나왔나보지. 공정한 게임인 척 하더니 순 지들 마음대로였잖아."

나도 이브도 그냥 무시하고 말을 이어갔다. 이브가 말한 것 처럼, 리셋의 원인이 뭔지가 중요하다.

그리고 나는 어쩌면 그 원흉이 이브일 것이라는 추측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냥 지금처럼 해라. 일부는 별을 먹는 탐식의 괴물이 되어 전 우주를 적으로 돌리려고 하고, 일부는 암세포가 되어 그 균형을 맞추어라. 그거면 족하다]

"하! 내가 네 말에 순순히 따를 거 같아?!"

코웃음을 친 이브가 뭐 있지도 않은 허공을 보며 당당하게 선언했다.

[그게 싫다면 지금 라티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서 순순히 항복하면 된다. 그건 못하지 않나?]

"이이익..."

그러나 그 역시 한마디도 안졌다. 발끈한 이브가 씩씩거렸지만, 그 이후로 딱히 반박하지는 못했다.

"상황이 많이 안 좋은거야? 치열해 보이기는 하는데."

"그럴리가 없어. 소모전으로 가면 내가 이겨."

우리는 화제를 돌렸다. 감히 터치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시스템적 존재에게 성을 내봤자 아무 소용 없었으니까.

이브는 자신의 강점을 이용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며 호언장담했지만 글쎄, 내가 보기에는 이미 이브는 반쯤 지고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적이 강하면 오히려 좋아."

적의 강점을 빠르게 모방한다는 특성은 확실히 사기적인 특성이다. 전투를 지속하다보면 상대는 언제나 그에 맞춰 진화한 우리보다 밀려 있게 되었다.

[모방이 가능한가?]

하지만 지금 근본적인 문제는 이것이었다. 상대의 강점이라는게 이브가 배울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

"벌써 12개째...!"

"효과가 있어. 나무를 베니까 놈들의 둥지가 빠르게 사멸한다!"

하늘에서도 우주에서도 이곳 땅에서도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중대형의 덩치 큰 군단병들에 맞설 화력을 갖추기 위해 대다수가 특별히 편제된 기갑 부대로 이루어진 지상군은 형상력으로 이루어진 방어막을 부수고 신목을 베어낼 수 있는 가이샨족의 전사들을 지키며 몰려드는 군단병들을 향해 화력을 퍼부었다.

"효과는 있지만, 아무래도 곧 퇴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놈들이 너무 많아요. 지금 몰려오는 놈들만 수천만 마리입니다."

"...끝내 나타나지 않는군."

가르는 부서진 신목의 앞에서 한숨을 쉬며 타오르는 도끼를 내렸다.

그가 베어낸 상위종만 십여 개체, 부순 신목이 여섯 그루가 넘어갔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물러나야 했다. 이브가 예상한대로 소모전으로 흐르면 연합군이 절대적으로 불리했으니까.

탄약도, 가르가 가진 투지도 무한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입힌 타격이 효과가 있길 바래야죠. 아니, 분명 효과 있을 겁니다. 지금껏 오직 전쟁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압도적인 괴물인 줄 알았던 이놈들도, 결국 완벽할 수 없는 놈들이란걸 모두가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곁에서 싸운 중사가 지쳐서 창백해진 얼굴로 애써 웃어보였다.

"자네 말이 맞아 동지. 싸움은 이번이 전부가 아니지."

훌륭한 전공을 올렸음에도 마음이 편치 않던 가르는 그 말을 듣고 약간이나마 웃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단계에 맞춰 천천히 안전지대로 철수하려는 순간.

"이건!"

"어..."

무언가를 감지한 가르가 단숨에 몸을 틀었지만 이미 늦었다.

쏘아진 한자루의 창이, 소리를 찢으며 날아들어 그의 곁에있던 중사의 몸을 탑승물 째로 관통하여 땅에 폭발하듯 박혔다.

창을 날린 존재의 모습을 확인한 가르의 눈이 커졌다.

초대형종의 위에 서서 주위에 마법진을 두른채 이곳을 손가락질 하고 있는 존재는, 지금 가면 안에서 붉은 안광을 번득이며 늘어뜨린 짙은 흑발을 흩날리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증명한다. 나의 힘이, 본능이, 감정이! 저딴 놈들의 가당찮은 마음가짐 따위에 밀리지 않는다는걸.'

마법으로 한껏 강화한 창을 던진 이브는 이번엔 검붉은 빛이 번득이는 검을 들었다.

이브는 이번엔 노선을 바꾸었다.

자신은 저들이 가진 힘을 지금 당장은 가질 수 없다는 걸 인정했다. 애초에 가지기도 싫었다.

그래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증명할 생각이었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남들에게서 배우고 가져온게 아신 오직 자신이 만들어 온 자신의 길이 더 강하다는 사실을.

"이 노오옴!!"

내면에 가득한 복수심을 끌어올린 가르가 그 도전을 받아주지 않을리 없다.

저 멀리서는 수시로 번쩍이는 핵폭탄이 터지고 심심하면 반파된 함선이나 함선체가 지상으로 추락하는, 연합군과 군단병들이 어지러이 싸우는 전장 한복판에서.

거구의 야만전사와 검은 갑각을 두른 괴물이 서로를 향해 각자의 분노를 담아 도끼와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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