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제 3세력(5)
반군연합이 미처 대비하기 전에, 3개 행성을 동시에 공격한 이브는 그중 두개의 행성을 완전히 손에 넣고 전면둥지화에 성공했다.
한때 지상을 덮었던 인류의 문명은 전부 파괴되었고, 살아있는 생명은 모조리 군단의 먹이가 되었다.
이렇게 안정화에 성공할 때까지 이브는 연맹의 개척지를 찔러보는 것 외에는 잠시 숨을 고르며 본대의 전력을 온존했다.
"자코프? 어쨌든 그 요새급 함선에 대항할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 단순 체급으로는 절대 맞설 수 없으니까."
함대의 주력을 이끌고 우주에 있던 리암은 이브가 준 정보를 받고 단숨에 판단을 내렸다.
함대전 전문가로서, 동시에 지금은 군단의 서브마인드로서 두가지 지식을 모두 갖고 있기에 내릴 수 있는 판단이었다.
'체급 말고 다른 방법은?'
"너희가 가장 잘 하는 방법으로 가야겠지. 하지만 보아하니 그것도 쉽지 않겠군."
살아있는 생물인 함선체의 크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 이상으로 키우는게 불가능하진 않지만 거기 투자되는 자원 대비 효율이 너무 좋지 않아 이브는 곧바로 폐기한 계획이었다.
리암은 군단의 장점은 언급했으나 그 역시 완벽한건 아니었다.
"내부로 침투하기에도 놈들의 화력이 너무 강하다. 솔직히 말하면 저정도의 화력이 가능할거라 상상도 못했다. 아무리 상위종이라 한들 그 출력이 함선보다 강하진 않은 이상 광선포가 근처에만 스쳐도 베리어가 부숴지고 몸이 타버릴 것이다."
'거슬리게 구는군.'
지금 당장 떠오르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수많은 물량으로 사방에서 덮쳐 틈을 노린다거나, 생물체가 아닌 침략요새를 이용해 대항한다는 등 임기응변책이 있긴 하지만 이브가 원하는건 그런게 아니었다.
"근데 저런 상상 속의 결전병기가 등장한다면 급해지는건 우리만이 아닐텐데."
'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나와 싸우고 있는 주제에, 다른 곳으로 눈돌릴 여유가 있다는거니까.'
"그걸 잘 이용하는 것도 전략이다. 적과 적이 싸운다는데 대체 뭐가 문제인지."
리암은 이브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브는 연맹도 연합도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자신을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경계하는 꼴은 죽어도 보기 싫었다.
이브는 진정한 악역은, 재앙은 자신이 되어야 하며 희생자들이 두려워하고 분노하는 대상도 자신이 되길 원했다.
'일단 함대 움직일 준비해. 반군 놈들이 연맹의 소식을 들은건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슬슬 움직이려는 것 같으니까.'
그때 이브는 리암에게 병력을 움직일 준비를 시켰다.
현재 절반 이상의 땅을 점령하고 인간들을 밀어붙이고 있는 공략지 라티스. 그곳을 향해 새롭게 체제를 정비한 반군연합이 새로운 군대를 파견했다.
*
"솔직히 난 좀 별로다. 결국 자랑스러운 땅의 전사인 우리가 일개 용병짓 하는거 아닌...으악!"
"시끄럽다 율루."
천천히 항해하는 함선 안. 우주공간을 보며 툴툴거리던 덩치 큰 전사의 등짝을 눈치를 보던 동료가 철썩 후려쳤다.
왜 때리냐며 눈을 부라리는 동료에게 그는 뒷쪽을 흘끔거렸다. 율루라는 이름의 전사는 그제서야 아, 하는 표정으로 흠칫거렸다.
"물론 우리 부족이 이들과 함께 싸우고 그 대가로 여러가질 얻게 된 것도 맞다. 하지만 적어도 전사장 앞에서 그 이야긴 하지 마라. 전사장은 이제 동생의 원수를 갚기 위해 싸운다."
"크흠. 알, 알겠다."
율루는 혼자 의자에 앉아 멍하니 밖을 보고 있는 전사장의 뒤통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사장 가르는 지난번 방어를 위해 추진한 괴물들의 본거지를 향했던 공격에 참가했었고, 그곳에서 자신의 친동생을 잃었다.
방심. 분명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참전했을때만 해도 우주의 모습이 신기했을 뿐이고, 상대해야 한다는 괴물들은 그저 짐승으로만 여겼을 뿐이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반드시!'
창 밖을 노려보는 전사장 가르의 눈이 번득였다.
이미 한번 잃었기에 이번에는 절대 방심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개인적인 원수 뿐만이 아닌 부족의 명운까지 걸고 참전한 전쟁이기에 더더욱.
"곧! 목적지인 라티스 권역에 도착합니다. 모두 모여주시길!"
결연한 각오를 다지는건 가르 뿐만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지금 편제 된 반군연합의 군대 역시 일개 잡부 부터 고위 지휘관까지 고향과 가족을 습격으로 빼앗긴 생존자들이 주축이 되었다.
완전히 점령당한 행성 발렌 출신의 함장이 휘하의 모든 전력을 소집했다.
"목적은 간단합니다. 더 이상 놈들이 우리의 땅에 알을 까는걸 두고 볼 수 없습니다. 놈들을 몰아내고, 그 둥지를 청소하는게 가장 큰 목적입니다."
"그냥 다 때려부수면 되는건가?"
"그, 그건 아닙니다."
함선의 함장은 가이샨족의 전사들을 이끄는 가르에게 보다 자세히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곧 지휘실 한쪽에 커다란 홀로그램 스크린이 떠올랐다. 스크린에는 다양한 자료들이 보여지고 있었다. 그것들 모두 군단에 대해 나름 조사하고 분석한 자료들이었다.
"놈들의 둥지 핵심은 바로 이 나무 같이 생긴 기관입니다. 지옥의 나무, 지옥수...그 역할은 둥지에 양분을 공급하고, 둥지에 방어막을 치는 등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함장이 화면에 가득한 군단의 신목들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심지어 그들의 분석은 나름 정확했다. 실제로 이브가 둥지를 만들때 가장 먼저 심고 키워내는게 신목이며, 신목이 없으면 일대의 둥지 운영이 정지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들이 이렇게 정확히 판단한 이유는 다름아닌 지금 다른 함대에 속해 있는 요정들이 세계수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함대도, 군대도 가장 우선적으로 이 나무들을 제거하는게 목적입니다."
"그럼! 저 나무들을 베면 되는건가!?"
"지상군의 화력으로 처리하지 못하는, 혹은 상대할 수 없는 적들을 전담해서 처리해 주십시오."
함장은 새로운 자료들을 띄워냈다. 여러장의 사진들은 모두 다양한 병종과 타입을 가진 군단병들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체내에 광선전차나 함재기 이상의 동력장치를 십수개 달고 있는 상위종. 타입 워리어, 스피어, 위저드."
그는 일정한 모습을 보이는 상위종들의 형태와 무장 상태에 따라 구분지어 설명했다. 군단과의 싸움이 보다 격렬해지고 길어짐에 따라 그동안 차근차근 진행되던 분석이 빠르게 진행된 탓이었다.
"그리고 초대형종으로 분류하는 타입 바이슨과 데스웜 등."
"그놈들은 우리가 맡겠다."
함장은 역할과 임무를 철저하게 나누었다. 가르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들은 같은 적을 두고 진심으로 함께 싸워야 하는 사이였으니까.
"마지막으로, 주의해야 할 특수종."
그때 마지막으로 떠오른 화면들이 있었다. 그것들을 본 모두의 얼굴이 굳었다. 가르도 마찬가지였다.
"이놈들은 단신으로 함선을 상대하고, 상위종 이상의 출력으로 지금껏 엄청난 피해를 입혀 온 최악의 적들입니다. 최고 지휘개체로 판단되니 만약 출몰이 확인되면...꼭 연락해 주십시오."
여러 이야기가 있었지만 결국 특수종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구분된 그들은 하나같이 인간을 닮은 체형에 가면을 쓰고 있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가르의 눈이 그 중 하나에 고정되어 번득였다. 마찬가지로 가면을 쓴. 굴곡진 여체에 짙은 흑발을 허리까지 기른 존재. 자신의 동생을 무참히 토막낸 원수였다.
'반드시 나타나라.'
다른 이들은 특수종들이 자신들의 앞에는 나타나지 않길 빌었지만 가르는 달랐다.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원수를 갚을 생각이었다.
"지금! 놈들의 사정권으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회의는 끝입니다! 다들 제자리로!"
때맞춰 함대가 목적지에 도달했다. 가르는 자신이 이끄는 전사들을 이끌고 함선 내의 자리로 가서 대기했다.
우주에서 펼쳐지는 대규모 함대전은 그들의 무대는 아니었다.
"이렇게 정면으로 온다는건, 분명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
'상관 없어.'
신중한 리암의 말에 이브는 코웃음을 쳤다.
조용한 우주공간, 미리 워프해서 대기하고 있던 함선체들이 일제히 움직이며 리암의 명령에 따라 서서히 다가오는 적 함대를 향해 진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둥지를 지키기 위해 파견된 그 규모는 연맹의 개척지에 파견한 백여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5만. 이마저도 절반만 가져 온 것이다.
인간측 함대의 인원들은 그 규모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떴다. 그들 입장에서는 역사상 그 어떤 규범에도 나오지 않는, 상대한다고는 상상도 못해본 엄청난 규모의 함대였으니까. 심지어 근처에는 화력을 지원 받고 에너지를 보급받을 침략요새도 있었다.
"하긴. 정상적으로 생각한다면, 화력으로도 커버하지 못할 너무나 큰 숫자의 차이다."
이건 신중한 리암도 쉽게 인정할 정도로 엄청난 숫자였다.
"그걸 그들도 모르지 않는다. 무슨 방법이 있으니까 이렇게 당당히 온 것이지."
물론 그들을 상대해야 하는 그는 방심하지 않았다. 규모는 1/100도 안되는 인간측이 기습적인 워프도 아닌 이렇게 대놓고 천천히 접근해온다는건 분명 수작이 있다고 확신했다.
"준비하자."
그리고 그의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함대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늘어선 기함급 함선들의 함수 부분에, 두 다리를 단단히 바닥에 붙이고 선 요정들이 뾰족한 귀를 움찔거리며 자신들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이런 미친."
'...'
리암은 그 광경을 보고 어처구니 없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브조차 말을 잃었다. 이곳을 향해 돌진해오는 적 함대 주변에 거대한 마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