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제 3세력(4)
"흐, 흐하핫! 진짜로군. 진짜였어!"
"..."
자유낙하하던 리하르트의 몸이 게이트를 통과한 직후 어느 순간 감속하더니, 누군가 그의 몸을 받아냈다.
반사적으로 그 딱딱한 갑각에 매달린 그는 자신을 내려다 보는 가면 속 안광을 보고 미친듯이 웃었다.
"자료로만 봤던 존재가 내 앞에 있다니! 검은 날개!"
날개를 펼치고 허공에서 그를 받은 강도연은 자기 품에 안겨 버둥거리는 이 사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상공 수천미터에서 놔버릴 수도 없었다.
"푸헼."
대신 땅에 내려앉자마자 그를 내던지듯 땅에 떨어트렸다. 리하르트는 허겁지겁 몸을 일으키더니, 마계의 달빛을 받고 있는 군단의 둥지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떴다.
'이곳이 네가 활동할 곳이다.'
"여기는 분명 마계...이럴수가. 마계에 당신들이 있다는 보고는 받지 못했는데?"
막연하게 반군연합과 싸우고 있는 곳으로 가게 될거라 생각했던 그는 전혀 다른 광경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대체 목적이 뭐지? 이곳은 현재 두개 세력이 얽혀있고, 앞으로 연맹을 비롯한 다른 세력들도 계속 찾아올텐데. 너희들에겐 입지가 그리 좋지 않은 곳이고."
'마계의 마물들을 몰아내는게 목적이라 할 수 있겠군. 물론 필요하다면. 지구인들도 이용할 수 있어.'
"그렇군, 뭔지 알겠다."
리하르트는 무언가 알아챘다는 듯 히죽 웃었다.
"외계의 괴물이 아닌거야. 너희의 기원은 어쩌면 이..."
'쓸데없는 추론은 할 필요 없을걸? 어차피 네가 아는 것보다 더 복잡하게 엮인게 이 세상 일이니까.'
하지만 신우가 그의 입을 강제로 막았다. 어차피 유닛과 플레이어에 대해 모른다면 의미 없는 추론일 뿐이었으니까.
*
"기계적인 명령어를 적용하는 것 뿐이다. 문제는 통신체계인데, 생물이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군. 지구에 몇 있던 텔레파시 능력자가 있다면 모를까."
'그건 문제 없어.'
나는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 리하르트에게 군체의식의 편린을 보여주었다. 그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며 몸은 덜덜 떨렸다.
어느새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은 그는 창백한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내 생각보다...더 대단하고 뛰어난 종족이었군. 우주의 일부를 먹어치울 자격이 충분해."
'네게 힘을 줄테니 어디 한번 만들어 봐. 새로운 시스템을.'
"군체의식 아래에 하위호환의 새로운 군체의식을 설계하는 일. 지금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살짝 흥분한 것 같아보이는 그는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 우선 미리 준비해둔 거대한 뇌에 촉수의 형태를 가진 신경다발로 스스로의 뇌를 연결했다.
내가 군단의 일원이 된 그에게 제공한건 저 거대한 보조 뇌가 전부다. 그는 그 거대한 뇌의 연산능력을 이용해 군체의식을 이용한 하나의 프로그램을 짜맞추기 시작했다.
"말했던 대로 일종의 명령어를 이용해 로봇을 움직이는 것과 같지. 하지만 비교할 수 없어. 이 군체의식은, 이 뇌는 한계를 넘을 수 있다."
"미친 놈."
눈은 풀려서 뒤집어진 주제에 입으로는 흥분해서 계속 떠드는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도연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효과는 있다. 우리의 새로운 서브마인드 리하르트가, 빈껍데기에 불과하던 양산형 군단병들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브가 움직이는 것 처럼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듯 자연스럽지는 않지만, 적어도 집단으로 움직이는 행동은 흠잡을 곳 없었다.
'최대 몇마리까지 운용 가능하지?'
"정해진 명령어를 입력하여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숫자의 제한 자체는 없다. 제약이라 한다면 그룹당 명령어를 입력하는 시간이겠지. 만약 조금의 딜레이도 없이 실시간으로 컨트롤 한다 치면 약 1만마리 정도."
'그 한계를 늘릴 방법은?'
1만? 적은건 아니지만 억 단위 병력에 익숙해진 내게는 너무 부족하게 느껴졌다. 조금은 더 늘리고 싶었다. 확실하게.
"간단하지. 내 뇌로는 그것이 한계이니, 나와 같은 지휘개체들을 늘리면 그만이다."
그리고 리하르트가 금방 해답을 내었다. 어렵지는 않지만 고민 좀 해야 하는 일이었다. 일단 리하르트처럼 자발적으로 괴물이 되겠다는 미친 인간을 찾는 것도 쉬운게 아니라서.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잖아. '딜레이 없이' 1만이라며. '딜레이 있는' 상태로는 몇마리까지 움직일 수 있는데?"
그때 강도연이 코웃음을 치며 중요한 지적을 한번 해주었다. 그 말대로 제약이 걸리는 부분은 명령을 바꾸는 딜레이. 만약 그 딜레이를 신경쓰지 않는다면.
"예를 들어 무차별적인 공격 명령을 내렸을 때, 그것을 번복하거나 수정하는데 10초의 딜레이가 필요하다면 운용 가능한 병력은 10만으로 늘어난다."
"...마물 놈들 찢어 죽이는 일이야. 섬세한 조작도, 자비도 필요 없어."
'좋아. 일단 10만을 기준으로 잡지.'
나도 지금 당장은 디테일보다 물량이 더 중요하다는 강도연의 말에 동의했다.
10만의 군단병을 양산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지금 둥지 규모로는 닷새 남짓. 시간이 빈다.
"오빠가 허락해준다면, 난 혼자서라도 놈들을 죽이러 가겠어."
'게릴라로 움직이는걸 허락할게.'
그 틈에, 강도연은 내게 따로 움직일 것을 요청했다. 녀석에게서 느껴지는 사무친 한을 알 수 있는 나는 그 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다.
우리 남매의, 가족의 원수인 마물들을 향한 깊은 원한. 동생은 힘을 얻은 이후로 계속 그 원한을 갚길 바랬으니까.
"척살권 맞고도 멀쩡히 살아돌아온걸 알면 어떤 반응일까?"
"...척살권을 극복할 줄 아는 이들은 많아."
오윤아의 말에 동생이 피식 웃었다.
"적어도 그 고블린들은 아닐걸?"
곧 강도연과 오윤아, 그리고 비행이 가능한 몇몇 상위종들이 둥지를 떠나 하늘로 날아올랐다.
걱정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아직 우주로 진출하지 못하고 있던 때. 현지인들과 함께 행성을 세력화 하려는 적들에 맞서 게릴라를 펼쳐온게 동생이었으니까.
나보다 잘할것이라는게 내 판단이었고 그래서 전적으로 맡겼다.
"맞아. 강도연은 뛰어난 군단장이지. 그러니 이제 우리 일에 집중하는게 어때?"
마계쪽을 살피느라 반쯤 나가있던 내 정신을 돌아오게 만든건 이브의 목소리였다. 다시 정신을 돌리고 기대듯 앉아있던 소파에서 눈을 뜬 내 곁에는 붉은 눈을 빛내고 있는 이브가 있었다.
"우리 일이라니...여기선 이제 딱히 할 일도 없잖아."
"일이 왜 없어. 지금 찾아오는 애는 네가 상대해."
이브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문 밖을 가리켰다. 나는 그제서야 이곳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꼈다.
곧이어 노크가 이어졌다. 나는 별 생각없이 나서서 문을 열었다.
"지부장님...?!"
"쉴시간에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찾아 온 사람은 한국에 있어야 할 지창현이었으니까.
"은밀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여기 아무것도 없으니까 안심하세요."
나는 감각을 세워 방을 둘러보는 그의 행동에 움찔했다. 그의 행동은 혹시라도 방에 도청장치 같은게 있나 찾아보는 것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연맹이 여러분을 괴물들이 아닌 다른 이들과 싸우게 만들 수도 있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쉽게 말해서 연맹과 적대하는 세력들도 동맹을 구했다는 뜻이죠. 마계의 마족들 같은."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꺼낸 이야기는 우리도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결국 이브의 공격에서 버티기 위해 플레이어, 유저들을 가교삼아 서로 손을 잡은 이들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듣자니 그들도 제코가 석자일 텐데요. 그 괴물...들과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확신할 순 없습니다. 인간이란 종이 가진 장점도, 그리고 어리석음도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께 이 말 드리려 왔습니다. 만약 연맹이 사람들을 지키는게 아닌 사람들을 해치라는 명령을 내린다면 굳이 따라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
지창현이 하는 말은 결국 그의 신념과 다를 바 없는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삐딱한 자세로 그를 보고 있던 이브의 머리를 잡고 끄덕이게 만들었다.
"그럼 어려운 결단을 내려주신 두 분에게 무운을 빌겠습니다."
"...당신은 기쁘지? 무차별적으로 주변을 공격하는 우주괴물들의 등장이."
그런데 지창현이 인사하고 다시 방을 나가려는 그 순간. 이브가 입을 열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어쩌면 이 우주적인 다툼마저도 그들의 등장을 이용해 봉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거야? 마치 마계의 등장으로 지구 각국이 서로 연합한 것처럼."
코웃음을 친 이브가 말을 이어갔다. 나는 이 녀석의 입을 막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찰나의 순간 엄청나게 고민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전 희박하다고 봅니다. 연맹도 반군도 결국은 자기들끼리 싸우겠죠."
"어째서?"
"그 괴물들이 약하니까."
지창현의 대답에, 자신감 넘치던 이브의 몸이 쩍 하고 굳어버렸다.
"적어도 지금 보여주는 모습으로는 부족합니다. 언젠가는 토벌되겠죠. 괜히 연맹이 개척지가 공격 받는 와중에도 다른 곳에 눈독들이는게 아닙니다. 그러면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는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나는 굳어버린 이브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 좁은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길을 잃었대. 우주로 진출한 이후 꾸준히 세력을 늘려가고 있는데도 여전히 부족하단거지. 분명 다른 놈들이 보기엔 내가 정체되어 있다 생각할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처음 미궁을 벗어난 그 순간부터 단 하나만을 바라보고 여기까지 왔어."
말릴 새도 없이 이를 간 이브가 분노를 억누르며 중얼거렸다.
"난 이 세상을 전부 가질거고, 먹어치울거야."
"그래. 잘 알지."
나는 쓰게 웃었다. 주춤할때도 분명 있지만 결과적으로 이브는 늘 승리해왔다.
"이게 다 그 거대전함 자코프 때문이야. 우선 그놈부터 떨궈야겠어."
전의를 불태운 이브가 씩씩거리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다른 곳에 조금 더 집중하겠다는 시그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