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휴대폰에서 군단이 자란다-166화 (166/254)

166화-제 3 세력(1)

본디 군단의 병사들에게, 감정이란 하이브마인드 이브의 감정이었다. 이브가 분노하면 그들도 분노하며, 이브가 기뻐하면 그들도 기뻐하고 슬퍼하면 그들도 슬퍼한다.

단지 이브가 자신의 군단병들에게 허락한 감정이 몇 없었을 뿐이다.

이브가 자신의 손톱과 이빨들에게 허락한 감정은 분노, 증오, 탐욕 같은 강렬하고 파괴적인 감정들.

그렇기에 군단병들은 그 감정을 도구로 이용해 일제히 발산하며 마찬가지로 감정을 가진 적들을 위축되게 만들고 얼어붙게 만들었다.

"...끄윽."

지금, 초록색 피부를 가진 산고블린 하나가 목이 베여 쓰러졌다.

검을 들어 놈의 검을 쳐내고 목을 베어버린건 비슷한 체구를 가진 검은 갑각의 고블린이었다.

개조되어 군단의 일부가 된, 한때는 쓰러진 산고블린과 같은 마계의 마물이었던 이 군단병은 검에서 떨어지는 붉은 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서북쪽 망루. 그곳을 무너뜨려라.'

'막사로 보이는 암벽에 놈들의 사수가 있다.'

'지하에서 놈들 다수 출현.'

군체의식이 연결된 머릿속엔 고지능을 가진 상위종들이 사방에서 공유하며 내리는 보고와 지시가 복잡하게 얽혀들었다.

당연히 유닛도 아닌 일개 고블린의 지능을 갖고 있는 녀석은 그 지시나 보고를 온전히 이해하는건 불가능했다.

그래도 확실하게 알 수 있는게 있었다. 녀석은 손에 쥔 검을 높이 들어올렸다.

발성기관이 없어 소리지르는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지금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이 폭발적인 감정.

직전까지 자신의 몸을 지배하던 '자신만의' 감정은 분노가 아니었다.

이것은 쾌감이다. 성장과 성취를 이룬 존재가 느낄 수 있는 짜릿한 쾌감. 녀석과 같은 군단병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돌진해라. 놈들이 온다.'

녀석은 명령에 맞춰 앞으로 달려나갔다. 더, 더 싸우고 싶었다. 더 죽이고 싶었다. 신우는 일개 군단병에 불과한 이들에게 이브 같이 감정컨트롤을 시도하지 않았다.

덕분에 지능이 낮아도 자아가 있는 고블린 베이스의 소형 군단병들은 군단 답지 않은 천차만별의 반응을 보였다.

걔중에는 두려움을 느끼거나 싸우길 싫어하는, 이브라면 경악하고 혐오할 감정도 섞여 있었다.

그런 녀석들은 강제로 돌격시켰을 때 어차피 얼마 못가 죽었다. 살아남는 자는, 살아남을 자격이 있는 자 뿐.

이것이 신우가 선택한, 진화시켜 줄 자격을 갖춘 이들을 양산하는 방법이었다.

"끼힉...이, 이럴 수가..."

녀석은 동료들의 시체를 밟고 전진해 마침내 마법사의 심장까지 뚫어버렸다.

그 과정에서 한쪽 팔을 포함한 상반신 절반이 날아갔지만, 녀석은 검을 더 깊숙히 박아넣으며 덜덜 떨리는 마법사의 눈에 안광이 번득이는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

"이겼다."

"아직 할 일 많아."

폭음, 굉음, 비명, 신음만 들리던 전장이 어느새 조용해졌다. 육성을 낼 수 있는건 가면을 벗을 수 있는 최고위 서브마인드 강도연과 오윤아뿐.

강도연은 무심한 눈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거점을 둘러보았다. 만단위 병력이 학살당하는데 걸린 시간 반의 반나절.

사실 승패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고블린들에게는 종족특성상 강도연을 대인마크할 수준의 강자도 없었고, 함선체급 화력을 가진 그녀에게서 버틸 방어물도 없었으니까.

바닥을 구르는 시체의 대부분은 녹색 피부였다. 그 다음이 붉은 피부였으며, 검은 갑각이 그 다음을 이었다.

"오빠분이 원한 상황이지? 일단 상위종 피해는 거의 없어. 자가재생 가능한 상처들 뿐이야."

스르륵 소리와 함께 가면을 벗은 오윤아가 희미하게 웃으며 주변을 가리켰다.

주변에는 이번 전투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군단병들과, 항복시킨 붉은 고블린들이 다수 있었다.

"맞아. 기존의 병사들은 자격을 갖춘 강한자만이 살아남았고, 새로운 병사들이 생겨났고."

그녀는 오윤아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이 반격해오지 않으면, 계획대로 우리는 계속해서 놈들을 공격한다."

게이트가 열렸다. 목적지는 둥지. 강도연은 이번에 사로잡아 감염시킨 포로들에게 바닥에 즐비한 시체까지 모두 둥지로 옮기게 만들었다.

그 사이 그녀를 비롯한 군단병들은 양분과 에너지를 보충했다. 자신들의 장점을 계속 활용해 앞으로도 쉬지 않을 작정이었다.

'주요 세력들이 눈이 다른 곳에 향하고 있을 때, 최대한 날뛰며 놈들의 반응을 이끌어낸다.'

요추에 촉수를 꽂은 그녀는 가만히 서서 어느새 해가 진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갈길이 멀고,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신우는 물론 그녀가 판단하기에도, 이브의 등장으로 어그러진 질서가 다시 한번 새롭게 잡힐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이번에 스스로 성취를 이룬 군단병들의 육체를 개조할 준비를 하자.'

강도연도 양분을 보충하며 잠시 가동을 멈춘 사이.

그 굵은 뿌리를 마계의 맨틀층까지 쑤셔 박아넣는 군단의 둥지는 그 순간에도 쉬지 않았다.

이번 전투로 수천에 달하는 새로운 병력을 얻었다. 이들을 고블린 베이스의 소형 군단병으로 개조하는 한편 신우는 생각하고 있던 미친 생각을 실제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전투와, 성찰을 통해 성장을 이룩한 소형 군단병들의 뇌를 중형 혹은 대형 군단병의 몸에 이식한다.'

"성공한다면, 군단의 병력을 이곳에서도 재현할 수 있으니까."

강도연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보면 잔혹한 일이지만, 지금은 그런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것은 그들 스스로가 원하는 일이었으니까. 이미 한번 생전 처음 느껴보는 성취를 얻게 된 그들은 새로운 몸으로 더 강해지겠냐는 신우의 제안에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

그들 중 하나에는 반파된 상반신에서 여전히 체액을 흘리고 있는 녀석도 있었다. 녀석은 가장 먼저, 비틀거리며 둥지로 향했다.

단순한 지능덕에 자아의 붕괴나 이탈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그저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몸을 싸울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 만으로 충분했다.

녀석에게 해당될 병종의 몸은 마계땅강아지를 베이스로 한 대형종 채굴형 군단병의 몸.

스스로 몸을 담근 점액 안에서 노골노골 녹아 없어진 신체에서 유일하게 남은 그 두뇌는, 곧 거대한 알에 배양된 커다란 덩치의 괴물에 이식되었다.

어차피 어린아이 수준의 자아, 녀석은 여전히 적들에 대한 분노와 힘에 대한 갈망을 품은 채 새로운 몸과 완전히 동화했다.

'성공이군.'

그리고 머지않아, 이 거대한 괴물은 강철도 두부처럼 자르는 손톱으로 알을 찢고 쿵 소리를 내며 땅에 내려앉았다.

이런 식으로 덩치와 힘을 키워 재생산 된 군단병들이 수백. 이제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추게 된 군단병들이 둥지 밖으로 뛰쳐나왔다.

"잠시 주춤하던 놈들이 움직임을 보였어. 근방의 거점에서 모든 고블린들이 모이는 중이야."

"모이면 이길 수 있대?"

"모이기라도 하지 않으면, 일개 고블린인 놈들은 아무것도 못하니까."

거점 습격 후 사흘째의 여명이 밝아오는 때. 강도연은 오윤아와 함께 군단병들을 이끌고 이제 동굴 주변 땅까지 먹어치워가는 둥지를 떠났다.

그 목적은 이곳을 향해 접근중인 적 부대를 요격하기 위해서.

'묘수를 생각해낸게 아닌 이상, 우리는 지지 않는다.'

이번에도 홀로 선두로 나선 그녀는 조금의 불신이나 흔들림 없이 전방을 노려보며 빠르게 하늘을 가로질렀다.

고블린과 그 플레이어가 지금 이 새로운 군단에게 전쟁을 거는건 아주 치명적인 악수가 될 수 있었다. 이브와는 달리, 자체 생산이 아닌 전투를 통한 흡수가 덩치를 불리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게다가 고블린들의 종족특성인 집단행동은 지금의 군단과도 완벽한 상극이었다.

이브가 괜히 군단장이나 상위종 전력을 발달시켜온게 아니다. 형상력이 있다는건 단 하나의 강자가 군대를 유린할 수 있는 세상이라는 뜻.

고블린들에게 압도적 강자인 그녀를 마크할 수단이 없는 이상 이미 반 이상은 결판이 난 것이나 다름 없다.

'보인다.'

'네가 너무 빨라서 우리 사이가 너무 벌어졌어. 조금 자제해.'

강도연의 눈에 모여있는 거대한 무리의 고블린들이 보였다. 슥 훑어봤지만 특이한점은 보이지 않았다.

'응?'

그러나 그 순간, 그곳에서 무언가 반짝하더니 소리보다 빠르게 날아와 그녀의 뺨을 스치고 가면을 조금 부쉈다.

"...창?"

방금 전 날아온 것은 푸른 전격을 머금은 창이었다. 시각을 극대화한 강도연이 자신에게 창을 던진 존재를 확인했다.

허공에 지팡이를 휘젓고 있는 고블린 마법사 여덟과 함께 또다시 창 한자루를 장전하고 있는건 근육질의 몸을 가진 푸른 털의 늑대.

순간 그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놈과 그녀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아무래도 지원을 부른 모양이야.'

그 직후 날아든 창이 군체의식을 통해 시야를 공유하는 그녀의 가슴을 향해 날아들었다.

단숨에 몸에 둘러처진 구체의 검붉은 베리어가 짙어지더니 마법의 힘을 잔뜩 머금은 그 창을 가뿐히 튕겨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