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대혼돈과 대침공(10)
"저게 자코프..."
"상관 없어. 움직임은 둔중하고 지상으로는 내려오지도 못할테니까."
"하지만 그 단점을 다 덮어버릴 힘을 가지고 있잖아."
나는 정말 게임이나 영화속에나 나올법한 거대한 우주전함의 모습에 놀랐으나 이브는 흔들림 없이 계획을 실행했다.
대기권 내로는 들어오지 못하는 적의 약점을 이용해, 군단병들을 계속해서 투입해서 그들을 몰아내려는 것이다.
"일개 개척지에 불과해. 인간들 역시 나만큼이나 효율을 생각하지. 소모전에서 자신들이 절대 이길 수 없다는걸 알면 분명 포기할거야."
"저 거대한 전함이 떠 있는 이상 제공권을 잡을 수 없어. 제공권을 잡지 못하는 이상 둥지를 만들어봤자 그대로 폭격 당할 텐데."
"둥지를 굳이 땅 위에 만들 필요는 없고...그리고 저 전함을 이곳에 묶어둘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이브는 이미 계산을 끝낸듯 내가 생각한 문제점들을 모두 반박했다.하긴 이브가 개척지 시안을 공격할때 사용한 전력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연맹도 당장 얼마 전까지 이론이나 상상도로만 존재했던 저 거대한 전함을 충분히 찍어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그걸 노리고 여러곳을 동시에 공격하면 분명 틈이 생길 것이다.
강력한 개인도 집단으로 움직일 수 있는 이브의 행동은 상대방의 입장에선 정말 너무 얄밉고 짜증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내가 던진 이 작은 파문이 어디까지 흐를까?"
이브가 거기서 갑자기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영향력이라, 반군연합 연맹 지구 마계 등등 잘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세력은 전부 연결이 되어 있다.
"그, 그게...여러분. 정말 죄송하지만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합류해 주셔야 겠습니다."
그때 책임자 로멜 중령이 무슨 이야기를 듣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우릴 향해 허겁지겁 달려왔다. 나도, 이브도 이제서야 그들의 영토에 가해진 습격이 보고되었음을 직감했다.
"이곳 마계에서도 무슨 일이 터질지도 모른다고?"
'물론 확실한건 아니야. 나는 단지 마족들이 반군연합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것 같아서 그러는거지.'
이브와 함께 이야기 나누던 나는 의식을 돌렸다. 척박한 황무지인 이곳은 마계, 그중에서도 우리의 둥지가 그 첫 뿌리를 내린 곳.
이제 둥지가 완전히 땅 속을 장악한 동굴의 입구에 앉아있던 강도연이 군체의식을 통한 내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지구연합군과 전쟁중이기 때문에, 크게 신경쓰지는 못할거라며?!"
'내가 보기엔 연맹도 도움을 받았어. 그리고 그들의 적은 아직 우리뿐만이 아니야.'
"설마. 양측 다 이브에게 공격당했는데 이 와중에 자기들끼리 싸울리가."
'싸우지 않더라도 경계할 수는 있지.'
우리도 신경써서 나쁠건 없었다. 어쨌든 저 먼 우주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마계를 점령하고자 하는 우리 목적과도 밀접하게 엮여 있었으니까.
"그건 걱정하지마. 고블린들을 군단병으로 개조한 것도 성공이고 남은건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것 뿐이야."
강도연이 슬쩍 발 밑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둥지의 촉수가 스멀스멀 눈에 보일 정도로 움직이며 점차 동굴 밖으로도 뻗치고 있었다.
이제 우리도 동굴 밖으로 나간다. 그 근거는, 직전의 전투에서 습득한 새로운 병력들이었다.
'놈들이 눈치를 챈건지, 벌써 며칠이나 잠잠하다.'
둥지의 크기가 작아 굴복시킨 고블린들을 고블린 베이스의 소형 군단병으로 개조하는 시간이 조금 오래걸렸다.
하지만 그 사이 적은 분명 자신의 부대가 전멸했음을 알텐데도 움직임이 없었다.
'고블린들은 그렇다 치고. 플레이어가 조용할리가 없는데.'
플레이어는 자신의 유닛들을 언제든 어디서든 살펴볼 수 있으며 역사 기능을 이용해 어느 순간 놓친 부분도 다시 볼 수 있었다. 심지어 관조자가 붙어서 알려주기까지. 즉, 모를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우리 정체를 알아채서, 늦어지는게 아닐까요?"
'그렇다기엔 다른 지방에서도 움직임이 없어.'
오윤아가 가설을 하나 냈지만 나는 그다지 가능성 있는 가설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다른 행성에서 직접 충돌까지 해본 마족들이 우리를 모를리는 없다.
'...만약 마족들이 자기들끼리 모든 정보를 공유하는게 아니라면?'
내가 생각한 가설은 마계연합의 주축이 결국 유닛들의 연합이라는 점이었다. 우리와 행성 라티스에서 충돌한 마족들은 오크 무리였다.
그 오크들과 마계연합의 상층부가 고블린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면 놈들이 우리에 대해 모르는게 이상한건 아니다.
"그럼 상관 없잖아. 어차피 우리는 정체가 들키는걸 가정하고 움직이던건데."
'네 말이 맞아. 놈들이 오지 않으니, 이번엔 우리가 공격한다.'
강도연이 날개를 펼쳤다. 나도 녀석의 뜻에 동의하고, 동생과 오윤아 등의 상위종을 포함 집결한 군단병 모두에게 새롭게 업데이트한 지도를 공유했다.
다름아닌 이번에 전향시킨 고블린들에게서 뽑아낸 정보를 반영한 지도였다.
'가장 가까운 놈들의 거점을 함락시킨다. 추정되는 규모는 적어도 1만 이상. 기본적인 전술은 전과 같아. 유닛인 산고블린들만 죽이고 나머지 고블린들은 포섭한다.'
지금 당장 이곳에 집중할 수 없는 나는 강도연과 오윤아등에게 지휘권을 맡겼다. 솔직히 나도 부대를 지휘하는 능력은 형편없다. 군인도 아니고, 군대에서도 늘 명령을 듣는 입장이었으니까.
하물며 저 애들은 어떨까. 평범하게 지냈다면 이제 2학년으로 진급했을 여자애들에게 일을 맞긴다는게, 물가에 애 내놓은 부모 심정이었다.
차라리 청산족 중 한명에게 맡기는게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비행이 가능한 이들은 윤아 네가 데리고 하늘로 올라간 뒤 도주하는 놈들이 없게 길목을 막아. 나머지는 정면에서 돌진해. 길은 내가 뚫어."
그러나 내 걱정은 기우였다. 동생인 강도연은 그동안 이브의 밑에서 가장 강한 개체로 전략전술의 중심에서 병력을 이끌고 활동했다.
그런식으로 강제로 몸에 새긴 그 지식들이, 강도연을 단순한 돌격대장이 아닌 어엿한 지휘개체로 만들었다.
'...'
그 애들을 믿을 수 있다는걸 깨달은 나는 말 없이 지켜보았다. '내' 군단은 앞으로 이런게 필요했으니까.
우리의 또다른 일부인 이브의 군단과는 달리, 우리는 필요에 의해 스스로 진화하고 성장한다.
그건 지금 땅을 달려나가는 고블린 베이스의 자그마한 소형 군단병들도 마찬가지였다.
*
"역시 본부에 보고 하는 것이..."
[시끄럽다. 지금 마계연합 내에서 주도권과 지분 싸움이 얼마나 치열한지 몰라서 그러는 것이냐]
고블린들의 본진. 늘 수십만의 고블린들이 주둔하는 이곳에 살고 있는 고블린 왕은, 머리에 울리는 차가운 목소리에 움찔했다.
[도움을 구걸하는 순간 다른 놈들에게 손해를 보고 시작하는 것이다]
"..."
솔직히 고블린 왕은 플레이어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공통된 적에 맞서 싸우기 위해 기껏 연합을 결성하고도 그 도움을 받지 못하다니?
[차라리 인간놈들의 특무대라면 모를까...이것들은 대체 뭐야?]
플레이어가 일단 정보를 숨기는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1천이 넘어가는 후속부대를 찰나의 순간 격살한 정체불명의 괴물들.
여기저기 가시가 박힌 번득이는 검은 갑각과 붉은 안광등 한 끔찍 하는 마계의 마물들과 비교해도 어딘가 기묘하고 괴이하게 생긴 그 괴물들은, 고블린들은 커녕 최근 나름 많은 정보를 수집하던 플레이어도 전혀 모르는 처음 보는 놈들이었다.
[새로운 유닛? 그럴리가 없고. 마계 토착종도 아니고. 그럼 남은건 지구뿐인데]
"그, 그럼 이제 어떡합니까. 추가로 병력을 보냅니까?"
[아니. 일단 약탈을 떠난 부대가 돌아올 때까지는 기다린다. 지구놈들과도 대치하고 있는데 여기서 더...응?]
눈치를 보며 끽끽거리던 고블린 왕에게 차후의 행동을 지시하던 플레이어는, 심지어 말을 그대로 전해주던 관조자도 놀라 말을 잃었다.
고블린 왕은 그들의 갑작스런 그런 반응에 움찔했다.
[지, 지금 거점 하나가 공격 받고 있다...!]
놈은 볼 수 없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는 플레이어가 각혈하듯 내뱉었다.
"캬악! 전부 죽여라!"
"배신자! 배신자!"
한차례 터져 나왔던 폭발이 가시고, 그 기습에서 살아남은 고블린들이 분노에 찬 고함을 터트리며 번득이는 무기를 든채 앞으로 돌격했다.
놈들의 자신감은 근거 없지 않았다. 공중에 떠 날개를 펼치고 관절부에 박힌 동력기관에서 에너지 폭풍을 폭사한 저 괴물은 차치하고, 지금 땅에서 담벼락을 넘고 덤벼드는 적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크기와 체형을 가진 이들이었으니까.
유닛이 되어 전과 비교할 수 없는 지성과 힘을 손에 넣은 산고블린들은 적들이 여러군데 다르긴 해도 자신들과 동류라고 짐작했다.
그렇다면 지지 않는다. 자신들은 은총을 받은 가장 강한 고블린. 고블린들의 정점이었으니까.
'너희의 원수겠지? 복수는 스스로의 손으로 해. 실패하면 죽고, 성공하면 성장한다.'
반면 검은 갑각으로 된 검을 빗겨들고 돌진하는 이 검은 갑각의 고블린들은 투구와 같은 갑각 사이로 붉은 안광을 빛낼 뿐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내달렸다.
애초에 그들에겐 입도 없었다. 입뿐만 아니라 전투에 불필요한 모든 기관은 제거되고 오직 전투를 위한 몸으로 개조되었다.
이브는 비효율을 이유로 이제는 생산 중단한 고블린 베이스의 군단병. 그들이 점차 격한 분노를 터트리며 한때 자신들을 습격하고 노예로 부리던 산고블린들을 덮쳐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