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대혼돈과 대침공(8)
"처음은 어디 가볍게 시작해볼까? 마침 개척단계의 신생 행성들이 있던데."
이브가 함대를 움직였다. 동력만 보충되면 쉴 필요가 없다는것 역시 군단의 장점 중 하나였다.
목적지로 설정한 곳은 다름아닌 연맹의 땅이다. 리하르트를 통해 그곳의 정보와 좌표를 알아내었다. 리하르트 본인은 자신이 주르륵 훑어 봤을 뿐인 대용량의 자료가 이런 식으로 쓰일 줄은 몰랐겠지만.
"행성 시안. 개척 시작 5년이 채 되지 않은 신생행성. 소속된 세력권은 지구의 존재를 발견 및 은폐하고 있는 아레스. 척박해서 그들에겐 낮은 평가를 받았지만 저정도면 쓸만하지."
최소치를 채웠다지만 어디까지나 버티는걸 가정으로 한 최소치일 뿐 둥지는 다다익선이다.
침탈과 침식 및 둥지화를 목적으로 한 이브가 동원한 함선체들의 숫자는 고작 백여체. 어차피 추가로 파견하는게 어려운 일도 아니니 처음엔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숫자만 파견했다.
"자신감 충만하네. 정말 충분한것 맞지? 어쩌면 연맹과 연합 두 우주세력을 동시에 상대한다는것 말이야."
"스스로를 한계에 몰아넣어. 그리고 진화해. 그것이 나의 방식이야. 게다가...내가 위험해지면 도와주겠다며."
이브가 곁에 있던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물론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내가 균형을 맞추겠다고 선언한 이후 이브는 스스로가 위기에 빠지면 내가 구해준다는걸 철저히 이용할 생각 같았다.
"우리 모두 성장해서 더 이상 완전히 예전 관계로는 돌아갈 수 없으니, 이렇게라도 해야지."
이브는 이게 당연한 것이라고 뻔뻔하게 답했다. 틀린 말은 아니라 나도 딱히 반박하진 못했다. 해가 넘어가고 이제 이브와 처음 만난 날도 작년이 되어버렸다.
내가 넣어주던 식량과 표본으로 눈에 띄게 자라나던 작은 생물군체는, 이제 여러 행성을 파먹으며 불어나는 거대한 집단이 되어 있었다.
"두분도 들어오시죠.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 전장에서 복귀한 우리가 인간의 모습으로 이곳에 온 이유가 시작되었다.
"아마 다들 들으셨을거라 생각합니다만."
"그렇습니다."
이곳은 호텔에 은밀히 마련된 응접실. 우리를 호출하고, 기다리고 있던건 본인을 연맹의 로멜 중령이라고 소개한 연맹의 관계자였다.
이곳엔 나와 이브만 있는게 아니었다. 수호자 연합 소속의, 혹은 크리스처럼 에볼루션 소속의 몇 사람도 함께 있었다.
"저희 연맹은 지구의 수호자 연합과 정식으로 협정을 맺었고, 마계와의 전쟁에 병력을 투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대가로 수호자 연합의 소속인 여러분께 정식으로 제의를 드릴 수 있게 되었죠."
그는 손을 튕겨 부하들에게 지시해 우리에게 무언가를 나누어주게 만들었다. 나누어진 것은 영어로 적힌 일종의 계약서 비슷한 것이었다.
"장비, 주거지, 위험에 따른 후속대책 등 모든 것을 지원합니다. 마계의 마물들을 넘어서, 이 우주에서 저희 인류를 위협하는 모든 적과 맞서보실 생각 없으신지."
그들의 제안은 전부터 여기 있던 모두가 예상하던 것이었다. 단지 그동안은 물밑에서 접촉만 하던 일이 수호자 연합이 그들의 지원을 대가로 허락하며 정식으로 시작된 것이다.
'멍청이들.'
이브는 군체의식을 통해 그들을 비웃었다. 지금 자기네들이 포섭하려 하는 이들의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 알면 놀라 자빠지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텐데.
"동의하신다면 이쪽으로. 저흰 강요는 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함께 등을 맞대고 싸워야 하는 사인데 불신이 있으면 안되니까요."
자신들이 비웃음 당하는걸 모르는 로멜 중령은 최종적으로 이 계약에 동의하는 이들을 데리고 더 깊숙한 방으로 안내했다.
나와 이브는 그곳에 포함, 크리스를 포함한 에볼루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 전 지구에서 동일한 일이 벌어지고 있지. 내가 알기로 1차로 300명을 채운다고 했어."
"그 300명을 채워서 대체 뭘 한다는거죠?"
"글쎄. 싸움꾼을 모아서 단순히 집지키는 개로 쓰려는건 아니겠지."
잠깐의 틈에서, 나는 크리스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지금 지구 상황이 복잡해. 유닛들은 결국 세상의 유일한 생존자가 되어야 하거든? 대표유닛이 되어야 그 다음 스텝으로 넘어갈 수 있단 말이지. 하지만 그게 불가능해.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답답하단거야."
그는 사정을 알고 있는 내게 푸념하듯 자세한 내막을 알려주었다. 이건 지구는 물론 마계도 마찬가지로, 서로 너무 거대한 적을 둔 덕에 유닛들이 자기들끼리 싸우지 못하고 뭉치게 되면서 진도를 못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세상마다 조건이 다르고 그 보상이 다르지만 일단 대표유닛이 되었다는 것 만으로 앞서나가는건 사실이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게임의 양상은 결국 세상의 벽을 뛰어넘어 전쟁을 벌이는 상위권과 이도저도 못하는 하위권으로 갈릴 것이다]
이미 한 세상 전체를 정복한 우리는 이미 대표유닛이다. 즉 예선을 통과한 공인된 상위권이다. 이쯤되면 상점이나 골드 등의 게임시스템은 덩치가 커진 이들에겐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리고 관조자의 말대로, 우리는 이미 다른 세상의 유닛들과 싸우고 있었다.
"나름 욕심을 부리던 우리 플레이어도 노선을 바꿨지. 그냥 살아남는걸로. 어차피 그들만의 리그로 바뀔 확률이 높고 적당히 싸우다 살아남는건 충분히 가능하니까."
"지구에만 있어도 되지 않습니까?"
"분산투자를 하려나보지 뭐. 솔직히, 내가 늙어 죽을때까지 이 게임이 끝나기는 할까?"
크리스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보니 게임의 끝이 꼭 약자들의 죽음이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
가장 강한 하나의 집단을 만드는 것이 정말로 이 게임의 목적이라면 굳이 모두를 죽일 필요는 없으니까.
"어떻습니까? 아마 지금까지 제작된 모든 군용 나노슈트 중에선 최강의 스펙을 가진 것들입니다."
로멜 중령은 마지막 도장을 찍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다양한 설득을 시도했다.
지금 우리가 착용해본 슈트가 그 설득 중 하나였다. 강화 외골격보다 뛰어난, 반군연합에선 고급기술이라 쉽게 갖추지 못했던 나노슈트.
이 나노슈트에 안좋은 기억이 있는 나는 좀 탐탁치않았다.
'그리 쓸모 있지는 않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군단의 만능세포에게 몇가지 명령어만 고정적으로 입력해 놓은것과 똑같아.'
나는 물론 이브도 착 달라붙는 그 슈트를 입은 상태지만 이브 역시 그리 높은 평가를 주지는 않았다.
"이런 걸 준다는건 결국 싸우라는건데. 연맹에게도 적이 있습니까? 마물들 같은?"
함께 있던 사람들 중 하나가 질문했다. 날카로운 질문에 당황할 법 하건만, 중령은 질서를 위협하는 악은 어디에나 있다며 능구렁이마냥 말을 돌렸다.
'이걸 어쩌지. 그 악, 지금 자기네들 행성 코앞까지 온 것 같은데.'
이브는, 그리고 그걸 본 나도 그 발언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브가 선발대로 보내본 100여척의 함선체가 연맹의 신생 개척지에 거의 접근했다.
*
"으...으아.."
"비상! 비사아앙!!"
조용하던 기지가 한순간에 뒤집어졌다. 워프 포인트에 감지된 갑작스러운 대규모 워프. 그 규모가 어지간한 대함대와 비슷했다.
그리고 워프해온 정체불명의 세력을 확인하자, 우주기지에 주둔하며 개척지의 방위를 맡고 있던 연맹의 사령관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괴물들이다!"
기상천외한 괴생물체 군단에게 연맹과 오랜시간 적대해온 반군연합이 호되게 당했다는 정보는 이미 연맹 전부에 퍼진 상태였다.
"홀, 홀을 지켜라!"
세력의 외곽인 이곳 개척지도 마찬가지다. 식은땀을 흘리던 사령관은 발작하듯 소리쳤다.
연맹은 워프엔진의 수명을 아끼고 대규모 이동을 지원하기 위해 상시 워프가 가능한 일종의 홀을 우주공간에 만들어 세워두었다.
일종의 게이트와 흡사한, 군대까지 주둔하고 있는 거대 시설물로 지금 이 시안 개척지는 그 홀이 부숴지거나 파손되면 본성에서 일말의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놈들의 전력은!"
"그, 그게...일단은 호위함급 80체 이상, 그리고 기함급 3체 입니다."
"장난해!? 지금 여긴 기함 한척에 호위함 20척이 전부인데!"
사령관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전력은 압도적 열세다. 하지만 싸워야했다.
우주에서 항쟁을 포기하면 지상은 그대로 끝장이다. 심지어 지금 지상은 제대로 전력도 갖추지 못한 개척지에 불과했다.
"싸운다. 그리고 버틴다. 정보에 따르면 그냥 덩치만 크지 내구도, 화력, 지구력등 놈들의 자세한 스펙은 전함보단 약하다. 홀을 타고 지원이 올때까지 버틴다."
사령관은 함장들에게 명령해 돌격해오는 함선체들에 대항할 수 있게 뭉쳐서 방어선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서서히 다가오는 괴물들의 대병력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재수가 없어도 더럽게 없다. 왜 하필 여기지.'
안그래도 한직으로 발령이나 승진과는 많이 멀어져 있던 그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속으로 오만 욕을 퍼부었다.
'...하지만 워프를 했다는건 이곳의 좌표를 알았다는 뜻인데.'
그러나 점차 적들이 다가올수록 그의 뇌리엔 의심스런 생각이 조금씩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설마, 놈들은 고의로 이곳에 온건가? 이, 이곳이 방어가 약한 개척지임을 알고?'
마침내 서로 포격이 가능한 거리까지 접근하게 되었을 때. 그의 눈의 휘둥그레졌다.
'아니 그러면, 이곳의 좌표와 이 좌표에 대한 정보는 어떻게 알아낸거지? 반군놈들도 모를 철저한 기밀자료인 것을!?'
위기의 순간 뇌를 팽팽 돌리던 그가 소름돋는 사실을 깨닫고 패닉에 빠진 사이 군단의 함선체들은 전술대로 포격에 맞대응하며 계속해서 접근했다.
"걱정 마십시오 사령관님! 홀은 놈들의 공격권 밖에 있습니다. 놈들이 그 시설의 위치나 존재를 알리가 없으니 저희는 이대로 버텨서..."
"놈들이...갈라진다."
상관인 그가 절망했다고 판단했는지 의욕적으로 떠들던 부관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는 일부의 함선체들이 추돌 직전 방향을 급선회해, 다른 곳으로 향하는걸 보고 허탈히 중얼거렸다. 그곳은 유일한 희망인 홀이 있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