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대혼돈과 대침공(7)
"이제 다들 처음의 혼란은 가라앉혔으니 이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게 되었겠지. 다시 소개하자면 내가 사악하고 독재적인 연맹에 맞서 자유를 추구하는 연합을 이끌고 있는 총통 미하일 벤더라고 하오."
그는 여유롭게 회의를 주도했다. 대숙청 이후 권력을 잡았으면서도 뻔뻔하게 자신을 소개하는게 자기네 세력 행성 3개가 털리고 그중 2개가 완전히 적의 손에 넘어간 사람치고는 너무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이미 말했지만! 우리는 저 귀쟁이들과 같이 싸울 수 없다!"
"무, 뭐라?! 귀쟁이?!"
하지만 회의는 그런 그의 노력에도 순탄치 않았다. 탁자를 내리친 거구의 전사가 손가락질하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뾰족귀의 여인이 기가 차다는 얼굴로 으르렁거렸다.
사실 그들 뿐만이 아니었다. 서로 서로 너무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분명 자기네 세상을 벗어날 방법도 모르던 이들이 처음 보는 이들을 원수라고 부르는 등.
"가, 각하. 역시 저런 이들을 한곳에 묶는 건 불가능해 보입니다. 도저히 원활히 진행하기 힘들것 같습니다."
"과연 그럴까? 빅터 자네는 그 웃기는 게임에 대해 듣고도 뭔가 떠오르는게 없나?"
당장 여기 대표로 모인 초인들이 어느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던 보좌관은 식은땀을 흘리며 그에게 속삭였지만, 정작 그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보기엔 그 '게임'의 진정한 의미는 저들끼리의 투닥거림이 아니야. 속하지 않은 우리 역시 그 게임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러니 그걸 무시할 수 없어."
왁왁거리며 서로를 물어뜯는 참석자들을 보며 계속 웃고있던 그는 피식 웃으며 미리 손에 들고 있던 권총을 들어, 하늘을 향해 쏘았다.
지금 저 초인들에겐 씨알도 안먹힐 총성은 적어도 이목을 끄는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내가 보기에, 우리는 싸울 이유가 전혀 없소. 여러분이 각 세력의 진정한 대표로 왔다면 말이지. 게임이니 플레이어니 다 때려치우는게 좋을걸? 대체 왜 다수의 우리가 그들에게 끌려다녀야 한단 말인가."
그가 분위기를 잡았다. 그리고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물론, 아닌 이들도 많이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여기 모일 정도로 수준 있는 종족들은 유닛이라 한들 그 그룹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지정된 유닛의 수준이 높을수록 배정된 숫자가 적은 시스템 설계 때문이었다.
"하고싶은 말이 뭐요?"
"나도 사정을 알고, 우리 모두가 알지. 결국 어떤 이들은 서로 원수가 되어야 한다는걸. 그쪽에게 묻겠는데, 모든 가이샨족의 전사들이 엘덴의 요정들을 죽여야만 하나?"
툴툴거리는 거구의 전사를 향해 희미하게 웃은 미하일이 되물었다. 그리고 그 전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애초에 그 자신부터 플레이어도 유닛도 아니었으니까.
부족의 전사장인 그가 전사들을 이끌고 반군연합을 찾은 것은 유닛이었던 자신의 동생이 동족들을 이끌고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이었고, 다른 세상의 요정들을 적대하는건 단순히 자신의 부하 중 한명이 요정들과 경쟁하는 유닛들의 플레이어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나는..."
그렇기에 부족의 전사들을 이끄는, 부족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대답이 궁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플레이어도, 유닛도 전체로 보면 한줌에 불과했다.
"대체 그 게임이 뭔지 모르겠지만, 지도자의 입장으로 매우 불쾌하지. 고작 그런것에 수많은 이들의 생명을 태울 순 없소."
"하지만, 게임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이들도 있다."
"그건 그들이 알아서 하길 바래야지. 나는 당연히,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야 하니까."
슬며시 반박해본 요정은 그의 반박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또한 그의 사상과 처한 상황이 마계 연합의 지도자 칼타스와 상당히 비슷했기 때문에 참석한 고위마족 출신 오크는 흥미롭게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여기서는 유닛과 플레이어는 배제하고, 각 세력의 대표들이 나눌 이야기들을 하기로 하지. 분명 서로에게 원하는게 있을 테니까."
미하일은 이 문제를 더 키워서 아예 플레이어와 유닛의 손을 벗어난 세력 단위의 스케일로 키워버렸다.
그의 논리는 빈틈이 없었으니, 결국 현지인들을 버릴 수 없는 유닛이나 플레이어들은 현지인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했다.
"우리 연합은 이 기회를 발판삼아 그동안 알지 못했던 수많은 세상이 서로 통하는 허브가 되고 싶고 그 교류의 중심이 될 수 있소. 그 목적은, 여러분도 알겠지만 최근 우리를 습격한 끔찍한 괴물들 때문이지."
"조금만 더 시간과 병력이 있었다면 이길 수 있었다."
"그렇겠지. 그러니 그 시간과 병력을 늘리겠단 소리오."
괜히 한마디 얹었다가 가볍게 반격당한 전사가 끙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그 신묘한 치료키트를 원하오."
"우, 우리는 지금 식량이 필요하다. 집도...아, 혹시 저 밖에 떠 다니는 금속 마차라던지,"
한번 입이 터지니 협상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어차피 서로 원하는게 있는 이상 지체될 이유는 없다.
미하일은 웃으며 그들의 제안을 모두 받았다. 어차피 지금 반군연합에 필요한건 고화력 고기동인 적들의 소형 기체들을 저격할 초인들이었으니까.
'연맹을 상대로도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그놈들도 가만있지 않을텐데, 이건 좀 이상하군.'
물론 그의 진정한 목표는 갑자기 나타난 우주괴물 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오래된 원수이자 가장 강력한 경쟁세력 연맹. 하지만 한가지 의문인 점은, 연맹에 심어둔 정보원들이 너무나 조용하다는 것.
설마하니 연맹이 아직까지도 게임에 대해 모르고 있으며, 그나마 진실에 가깝게 도달해 있는 한 세력이 그 사실을 철두철미하게 숨기고 독점하고 있다는 예상은 그도 미처 하지 못했다.
"그러니 보안을 더 강화하도록. 놈들이 정보를 숨기고 있는 것 같으니, 이쪽도 가능한 더 오래 자세한 사실들을 지켜야 한다."
"알겠습니다 각하."
그렇기에 미하일은 이후에 마련한 만찬 자리에어 직속의 정보부 부하들에게 은밀히 보안을 강화할 것을 주문했다.
"그대는 몸 안에 너무 많은 기생충들이 있군."
"...예?!"
"너무 많아서 세지 못할 정도야. 따라그리면 혈관을 그릴 수 있겠는걸."
그렇기에, 만찬에 참여한 요정족의 대표가 은은히 빛나는 푸른 눈으로 한 정보부 직원을 위아래로 스캔하고 툭 내뱉은 말을 캐치할 수 있었다.
"잠, 잠깐! 이게 무슨..!"
"검문에도 걸리지 않는 최첨단 생체 나노머신은 연맹만의 기술이지."
"정말 이자의 혈관에 작은 생물들이 가득합니까?"
정보부 요원들은 단숨에 그 직원을 체포했다. 그녀는 정작 뭐가 문제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물인지 뭔지 모를 자그마한것들이다. 매우 작으나 역시 기생충은 아닌 것 같다."
"감사합니다.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부탁 하나 드려도 되는지."
그들은 그 즉시 잠입해 있던 연맹의 정보원을 체포하고 그 이후 협력을 얻어낸 요정의 눈을 이용해 들키지 않았던 다른 이들까지 조금의 손실 없이 단번에 잡아내었다.
이것이 이곳 반군연합 본성에서 연맹의 눈이 완전히 지워지는 순간이었다.
"이 힘을, 우리가 대체 왜 그 무식한 괴물놈들 따위한테 써야 한단 말이냐?"
"하지만 각하. 그 괴물들은..."
"나도 안다. 하지만 조금 기다려봐라. 과연 그 괴물들이 이 다음에는 어떻게 행동할지."
총통을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한숨을 쉬더니, 이내 괴물들의 다음 타깃을 예상하며 히죽거렸다.
대다수는 번식과 확장을 우선하고 있다는 괴물들이 곧바로 근처 행성들로 쳐들어 올 것이라 예상했지만 미하일, 그는 아니었다.
'평범한 짐승들이 아니다. 다른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
이건 순전히 본인의 직감이었지만 그는 의외로 이게 잘 맞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
"이대로 반군연합을 친다? 하지만 그래선 놈들이 결집시키는 힘이 좀 강해."
또다른 행성에서 그들이 자기들끼리 회의를 열고 머리를 맞대고 있을 때. 이브는 늘 그렇듯 혼자서 계획을 검토했다.
'하지만 자칫하면 양쪽에서 공격당할수도 있습니다.'
'그 말이 맞다. 연맹과 연합이 원수지간이라지만 괴물 상대하는데 과거 감정 들먹일 것 같지 않은데.'
완전히 혼자는 아니었다. 군체의식을 통해 받아들인 레이나와 리암의 의견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하지만 연맹도 지금 준비를 서두르고 있고, 무엇보다 아레스가 아닌 연맹의 다른 세력들은 지구의 존재조차 몰라."
이브는 지금이 적기라고 판단했다. 반군연합에 비해 아직 방어력이 떨어지는 연맹을 공격해 행성 하나 이상을 더 얻자고.
'...가능한가?'
뼛속까지 지휘관인 리암이 긴가민가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브는 코웃음치며 지금 디디고 있는 둥지를 가리켰다.
"완전둥지 4개, 불완전둥지 1개. 여기서 뿜어지는 병력은 기존과는 비교 불가. 놈들이 방심하고 있다면 충분히 가능해. 더 강한 놈들이어도 상관 없어. 배우면 되니까. 오히려 그러길 바라고 있지."
이브의 웃음에 서브마인드들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 말은 사실이었으니까. 당장 리암 본인도 휘하 함대의 함선만 십만 단위를 넘어가는건 처음이었다. 심지어 이게 전력도 아니었다.
'평균 한개 행성을 지키는 함대는 30척 미만. 아무리 화력과 질적으로 차이가 난다지만 이건.'
군단의 함선체들은 인간들의 함선보다 부족한 내구도와 크기, 출력과 화력을 오직 숫자만으로 해결하겠다는 듯 각 둥지에서 끊임 없이 생산되었다.
아무리 스펙차이가 난다 한들. 빼곡히 달라붙어 내부에 병력을 침투시키면 질 수가 없다는게 리암의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