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대혼돈과 대침공(3)
"지금 공격중인 모든 행성을 먹어치울 생각은 없어. 딱 2개만 먹을거야. 놈들의 전력이 3갈래 이상으로 나뉜 이상 2개를 확보하는건 어렵지 않지."
기껏 힘들어지는 곳을 지원해서 기회를 만들어 줬더니 이브는 어차피 전부 먹을 생각은 없었다고 말했다.
"일단은 안정화를 시키는게 먼저니까."
"그러면 그 다음은 뭘 할건데?"
"분명 적들은, 자신들의 땅을 되찾으러 오겠지. 그럼 또 시작하는거야. 나는 빼앗고 그들은 그걸 막으려 싸우는 것."
이브는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별 말 안했다. 어차피 이브의 탐식과 성장에 끝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니까.
이건 처음부터 정해진 길이었다. 내가 어떤 선택을 했든 중간에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든.
"그래서...그동안 넌 뭘 할건데?"
"나도 너처럼 내 본분을 다해야지. 하지만 나도 이렇게 힘을 얻은 이상, 그걸 가만히 놀리고만 있기는 싫거든."
이브의 역질문에 나는 피식 웃었다. 생각해둔게 없는건 아니었다. 특히 직전에 마계 출신 오크들과 전투를 겪으며 생각을 굳혔다.
하이브마인드가 된 이후, 이브의 상대가 되어주기 위해서라도 이 힘을 온전한 나만의 방식으로 다루고 싶었다.
이브가 저 우주 너머에서 발전하는 것 만큼 나도 나만의 영토를 가지고 나만의 병력들로 새롭게 세력을 만드는 것.
"...좀 놀라워. 나는 네가 사사건건 잔소리만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군단의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다니."
"잔소리도 해. 그리고 군단의 사고방식도 아니야."
멍하니 대답한 나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지구와 마계의 본격적인 악연이 시작된 이래 세상의 문화와 트랜드는 많이 바뀌었다.
연맹이니 반군연합이니 하는 외계 세력의 개입까지 시작되는 가운데 마계와의 전쟁은 언제나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유명 연예인보다 이제는 영웅 대접 받는 헌터가 더 유명세를 얻는건, 분명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이 더 심했다.
"...일단 나는 지금 지구와 싸우고 있는 마계를 친다."
휴대폰을 집어넣은 나는 결단을 내렸다.
"확실해? 그거 맞는 판단이야?"
"이브 너는 그곳이 레드리움 이상으로 너무 척박하고 적들도 많아 굳이 먹을 가치 없는 땅이라고 판단했지. 하지만 잘만 하면 비효율을 최소화시키고 그 땅을 먹어치울 수 있을지도 몰라."
나는 진심이었다. 여러가지 생각해 보건데, 이유도 능력도 시간도 있는데 내게 굳이 계속해서 지구를 위협하는 마계를 내버려 둘 이유가 없다. 일단 마계의 마물들은 나의 원수이며 통제 불가능한 적들이었다.
차라리 내가 그곳을 먹어치우는게 낫다. 마족들이 하던 일? 그건 그냥 내가 대신하면 된다.
게다가 이렇게 반군연합과의 커넥션 가능성도 다 없애버리면 지구, 특히 수호자연합은 완벽히 연맹의 세력에 속한다. 분명 훗날 벌어질 사태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질질 끌리는 전쟁속에서 무의미하게 죽어가는 이들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내 세력을 늘리는건 덤이었다.
"...흥미로워. 제 3의 세력이 되어 덩치를 키운 뒤 그곳을 잡아먹겠다니."
"네가 목적으로 한 행성들의 안정화가 끝나면 지금 라티스에 있는 내 병력들을 마계로 옮길거야. 마계 전체에 적용되는 이상한 술수에 워프 좌표도 게이트 좌표도 막혀 있지만 지구는 마계와 연결되어 있지."
심지어 마계에 대한 정보는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신분도 가지고 있었다. 그곳에 드나드는 것도 자유로웠다.
어려울 것 없다. 상황은 좀 특수하지만 과거 이브가 미궁을 나와 처음 에덴을 점령하며 했던 일들을 재현하면 그만이었다.
"두 분! 혹시 지금 시간 되시나요?! 긴급 호출입니다!"
그때 누군가 우리가 있던 호텔방 문을 쾅쾅 두드렸다.
*
"...그래서, 오빠는 마계를 우리가 갖자고 했다고요? 마족놈들을 죽이면서."
[그렇다. 그는 지금 동시에 두가지 일을 하기엔 좀 바빠서. 내가 말을 대신 전한다]
"나는 너무 좋은데. 내 손톱이, 날개가, 검이 그 괴물들을 죽이는데 쓰인다면."
강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그녀가 있는 곳은 행성 라티스의 우주권역. 함대를 상대로 단신으로 미쳐 날뛰던 그녀는 그곳에 있는 침략요새에서 양분과 동력을 공급 받는 중이었다.
"이브는 그걸 허락한거죠?"
[딱히 자원이 쓰이지 않는다면, 거부할 이유도 없지]
"그럼 바로 가죠."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경로는 단순했다. 다시 에덴이나 레드리움으로 워프해서 그곳에서 지구로 향하는 게이트를 타고 넘어간다.
그리고 지구에서 한번 더 균열을 딛고 마계로 진입하면 은밀한 이주 계획은 끝난다.
"근데 지구에서 마계로 넘어가는 게이트를 여는게 가능해요?"
[이브는 가능하다 판단했다. 이미 두 세상은 연결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분명, 누군가 눈치챌 것이다]
문제는 없었으나 걸리는건 있었다. 강도연 역시, 현재 지구에서 게이트를 다룰 수 있는 유닛은 하나뿐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연합군에게 처음 문을 열어준것도 에볼루션...그 사람들, 역시 우리를 적대하겠지.'
그 정체는 이미 널리 밝혀진지 오랬다. 물론 지구를 경유할 뿐이니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은 적었지만, 만약 만나게 된다면 충돌은 확정이었다. 인연이 없는건 아니었기에 거북함이 느껴졌다.
"신호하면 그때 튀어나와서 최대한 빨리 도망가는걸 추천하지."
계획은 빠르고 부드럽게 진행되었다. 이브는 강도연을 포함 빠르게 집결한 신우의 병력들 앞에서 게이트 너머를 가리켰다.
"그의 부탁대로 위험을 최소화 하려는 거니까."
"알고 있어."
"그래? 그럼 바로 달려."
피식거린 이브는 동시에 건너편에 또 하나의 균열을 내었다. 동시에 오윤아를 선두로 한 군단병들이 빠르게 움직여 거실을 가로지르며 게이트를 통과하기 시작했다.
레드리움에서 지구로, 지구에서 마계로.
직전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던 마룻바닥이 발자국을 더러워졌지만 전혀 신경쓰지 않은 그들은 신속하게 이동했다.
"고마워 이브."
마지막은 인간 형태로 몸을 바꾼 강도연이었다. 그 인사에고개를 끄덕인 이브는 그대로 레드리움과 지구의 연결을 끊었다. 이제 거실에 남은 게이트는 하나.
온갖 발자국들로 더러워진 집안에 혼자 선 강도연은 재빨리 방바닥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지금 혼자 살고 있는 어머니가놀랄 일 없기를 바랬으니까.
그렇게 흔적을 지우며 정리를 마치고서야 그녀가 다시 문을 넘었고, 문이 닫힌 거실은 다시 조용한 적막만 남게 되었다.
"우선 둥지부터."
마계에 도착한 강도연은 다시 갑주로 몸을 덮으며 도착해 있던 다른 이들을 자연스럽게 지휘했다.
신우는 멀티태스킹이 불가능한 자신이 세력을 신경쓰지 못할 때는 자동으로 다음 서열인 그녀에게 지휘권이 넘어가게 만들었다.
"안전한 곳을 찾아야 해. 우선 은밀하고, 조용한 곳으로."
가장 중요한건 침식을 시작하기 위한 점을 하나 찍는 것. 미리 입수한 이 근방의 지도를 머릿속에 펼친 강도연은 미리 합의한대로 동굴 비슷한 곳을 은신처로 정했다.
그곳에 둥지를 핀다. 그들도 양분과 동력을 보충하지 않는한 무한정 움직일 순 없었다.
이곳의 위치를 굳이 따지자면 이 근방은 고블린들의 주 서식지이자, 오세아니아 쪽 연합군이 싸우고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에너지가 넘친다 한들 물량을 무한정 찍어낼 순 없는데."
"대신 그들은 서로 싸우고 있잖아. 그리고 숫자를 늘리는게 꼭 생산만 있는 건 아니니까."
오윤아의 말에 경험자인 강도연이 고개를 저었다. 기존의 지배종인 마법사들과 싸우며 점령전을 벌였을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이 땅의 지배종인 마족들은 지금 지구연합군과의 전쟁으로 분명 흔들리고 있다.
순수한 정면 힘싸움이었던 전과는 달리 지금은 보다 은밀하게 이득을 취하며 움직일 수 있다는 소리였다.
'땅 속에서 기척 감지. 저희 정체를 알았는지 거대한 생물체 몇이 빠르게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잘 된거네요. 마침 둥지의 성장을 촉진할 먹이가 필요했는데."
주술로 땅의 기운을 읽어 진동이 느껴지기도 전에 그 움직임을 감지한 상위종의 보고에 강도연이 가면을 쓰며 눈을 번득였다.
상대를 잘못고른 마계땅강아지들은 그렇게 땅에서 채 튀어나오기도 전에, 주술과 땅을 뒤흔드는 강도연의 주먹질 등으로 타격을 입고 손쉽게 제압당했다.
'하지만 북서쪽에서 또 다른 움직임이 감지되었습니다.'
그러나 마계의 짐승들만 이 땅에 사는건 아니었다. 보고를 받고 극대화한 시각으로 저 먼 곳을 살핀 강도연이 그들을 보았다.
"고블린. 마법을 배운 고블린들이야. 이 땅의 주인이지."
"...괜히 학교 일 생각나네."
오윤아도 고블린들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놈들은 그 플레이어가 어딘가의 마법사로 추정되는 유닛들로, 두 사람과는 또 다른 악연이 있는 놈들이었다.
"가자. 가서 죽이자."
"하지만 오빠분은 둥지가 안정될때 까지 정체를 숨기라했는데."
"그렇다면 '인간'으로 싸워주면 그만이지."
강도연이 단숨에 몸을 바꾸며 피식거렸다. 만능세포로 피부를 변형시키는 것, 사실 상당히 꺼려지고 아프고 비효율적인 행동이다.
오윤아는 그런 행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그녀를 보며 말 없이 혀를 내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