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대혼돈과 대침공(2)
"하던 대로, 대열을 갖춰라!"
오크 무리중 하나가 소리쳤다. 마계에서도 엄선된 병력인 이놈들은 이미 군단의 상위종과 전투를 치뤄본 경험이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있었고 행동에 망설임이 없었다.
"어차피 놈들은 다 똑같다. 행동, 특성, 성향 전부 다!"
그리고 태생이 전투종족답게 놈들은 상위종과의 전투경험을 토대로 단숨에 그 맹점을 파악했다.
아직 그 종류가 많지는 않은데다 결국 모두 이브가 지휘하는 탓에 상위종들의 움직임은 어느정도 정형화 되어 있다는 것.
패턴화된 상대의 움직임을 분석할 수 있다면 힘이 밀리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숙련된 전사들이 못이길리 없다. 설령 그 숫자가 많다해도.
"착검!"
진형을 갖춘 오크들이 달려드는 상위종들을 향대로 자신들의 검을 들어올렸다.
그들의 예상대로라면 곧 충격이 터져나오며 양측이 충돌할 것이다.
"...무슨."
그러나 자신만만했던 현장 오크들의 우두머리는 하늘을 나는 자신의 몸뚱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꿈벅거렸다.
그건 옆에 있던 다른 오크 몇도 마찬가지였다. 놈의 눈에, 푸르게 타오르는 빛의 고리를 양 팔에 두르고 휘두르는 상위종의 모습이 보였다.
그 움직임에 맞춰 땅이 뒤틀렸다. 특유의 주술을 이용해 오크들이 디디고 있는 땅을 폭발시키듯 들어올린 것이다.
"이런거는 처음 보..."
놈이 말을 채 끝내기 전에, 방심의 대가로 날아든 창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는 몸을 그대로 관통했다.
"크아악! 싸워!"
"죽여라!"
치명타를 맞은 오크들은 이제 선택지가 없었다.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그들에게 이 신종 상위종들은 서로 소통하며, 동시에 각양각색의 방법으로 오크들을 공격했다.
예측 불가능하고 패턴화되지 않는다면 결국 남는건 누구의 힘이 더 큰지, 혹은 어느 쪽이 더 많은지 뿐이다.
이 신ㆍ상위종들의 주술에, 창술에, 검술에 이제는 숫자도 힘도 밀리던 오크들이 각개격파 당하며 하나 둘 쓰러졌다.
'장점은 극대화, 단점은 최소화.'
그들 중 하나가 피 묻은 괴물의 손인 자신의 손을 들어보이며 조용히 생각했다.
이 정도 힘이라면 나쁘지 않다고. 자신의 가족들을 무참히 찢어 죽인 상대 유닛에게 언젠가는 똑같이 되갚아줄 수 있을거라고.
"...이놈들!"
자기 부하들이 무참히 썰리는걸 알아차렸는지, 내 베리어에 총탄을 퍼붓다 은근슬쩍 멈춘 인간들 사이로 갑주로 무장한 오크가 튀어나왔다.
이쯤되니 문득 궁금해졌다. 저놈들의 플레이어는 누굴지.
지성을 갖게 되고, 강해진걸 보면 과거의 나 같은 무능하고 존재감 없는 쩌리는 아닐텐데.
"죽어라!"
고함친 놈이 발을 쿵 하고 땅에 딛자, 균열이 쩍 갈라진 땅이 뒤틀리며 그 파편을 나에게 날려보냈다.
나는 그 흙먼지를 뚫고 땅을 박차 하늘로 날아올랐다.
'확실히, 저희가 다루는 땅의 주술과 비슷합니다. 허나 분명 더 자유롭고, 강한 힘입니다.'
지금 내가 보는 광경을 본 청산족 중 한명은 저 오크놈의 주술을 높게 평가했다.
확실히 지금 보여준 위력은 과거 마계에서 싸울때 S급 헌터, 크리스가 즐겨 쓰던 이능과 그 위력이 비슷해 보였다.
물론 지금의 크리스는 더 성장했겠지만.
'내가 실수했어. 붙잡아 고문해서 정보를 빼냈어야 하는데.'
마계에서야 눈치보여서 못하지만 여기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한놈 붙잡아서 정보를 캐냈어야 했는데 다 죽여버리라고 명령한게 살짝 후회되었다.
"크아악!"
그 사이 괴성을 터트린 오크가 손에 쥔 거대한 크기의 도끼를 휘둘렀다. 포장된 지면을 부수고 그 속의 암석을 뽑아 만든 돌로 된 도끼. 날크기가 전차만했다.
나는 허공에 떠있는 내게 횡으로 날아드는 그것을 검으로 힘껏 내리쳤다.
지금 내 수준에, 인간의 몸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위력.
그 거대한 도끼는 산산히 부숴지고 허공에서 순간적으로 가속한 나는 당황한 오크의 흉부를 가속도까지 붙여 발로 걷어찼다.
오크놈은 입으로 피를 뿜으며 우당탕 소리와 함께 바닥을 굴렀다.
이중적인 모습을 유지해야 하는 내게, 이 힘에 취하는건 극독이나 마찬가지나 일단 지금은 마음껏 뿜어낸다.
"쏴! 엄호해라!"
넋을 잃고 있던 주변 인간들이 그제서야 화들짝 놀라며 다시 화력을 퍼부었다.
내게는 이 그림 자체가 우스웠다.
오크를 지키기 위해 인간들이 나선다니. 문득 지창현의 말이 뇌리에 스쳤다.
절대 불가능할 것 같던 화합과 단결이 전대미문의 적이라는 요소 하나로 너무나 쉽게 이루어졌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게 좋다고. 따지고보면 이것도 똑같다. 군단은 그들에게 적이고, 그덕에 그들은 식인도 마다않는 괴물들과 절대 불가능했을 동맹을 맺었다.
"이런...연대장님! 놈들이..."
내가 가만히 지켜보는 사이 어느새 곁으로 다가 온 내 직속의 상위종들이 베리어를 중첩해 공명시켜 강화했다.
쏟아지는 미사일과 총탄의 빗속에서 나는 오크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보여요. 저 오크, 자신의 힘만으로 땅의 힘을 다루는게 아니에요.'
'그럼 뭐지?'
'저는 저걸 정령이라고 부를래요.'
그때 유독 작은 체구를 가진 오윤아가 허공에 둥둥 떠 내 위에 다가왔다.
양 팔에서 마치 옷자락 같은 검은 촉수를 꿈틀거리는 그녀의 외형은 갑주를 입은 나보다는 마법사인 레이나와 비슷했다.
'정령. 분명 마계에 그런 힘이 나돌았었지. 갑자기 요상한 이능을 쓰던 오크들의 플레이어는 정령술과 관련이 있나?'
'옵니다.'
분노한 오크놈이 피를 뱉어내고 다시 한번 지진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번엔 이쪽도 땅을 움직일 수 있었다.
지팡이를 든 오윤아와 손으로 허공에 문양을 그리는 청산족의 주술사가 동시에 주술을 움직여 그 지진파를 상쇄시켰다.
나는 그 사이 몸을 총알같이 쏘아보냈다.
사로잡는건 힘들어 보이니 아쉽지만, 이놈은 여기서 죽어야 했다.
"흐이익!"
기겁한 오크가 진심을 담은 살의를 느꼈는지 처음으로 표정에 두려움을 띄웠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단숨에 인간들의 방어선을 몸으로 부수고 검으로 베어 돌파한 내 검이 놈의 심장을 꿰뚫을 것이다.
'이건.'
그러나 그 순간. 내 몸이 내 의지와는 반대로 툭 하고 끊기는 느낌과 함께 그대로 땅바닥을 굴렀다.
'척살권.'
'척살권이에요. 몸 회수할게요.'
나도, 오윤아도 이것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오크의 플레이어가 결국 비장의 한발을 사용한 것이다.
물론 애초 본체가 군단의 하이브마인드와 동화한 내게는 그저 아바타와의 연결이 끊어졌을 뿐이다.
"이런 멍청한! 왜 막는 것이냐! 이제 남은 놈들을 일망타진하면 되는 것을!"
"좀 진정 하시오! 당신 혼자 남았는데, 저 수많은 놈들을 다 처리할 수 있단 말이오?!"
내 몸을 회수하기 위해 움직인 오윤아에게 달려들려던 그 오크놈을, 인간측 지휘관이 막았다.
"일단 후퇴합시다. 우리도, 우리도 도망치고 싶지 않소. 이곳은 우리 고향이고, 우리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
"하지만 그걸 알기에 더더욱, 우리는 지금 여기서 후퇴해야 하오."
그는 오크놈을 설득했다. 흥미가 돋았다. 지성을 얻기 전에도 인간을 깔보던 짐승들이다. 저 오크놈은 그의 진심을 알아줄 수 있는가.
"...좋다."
그리고 얼굴의 잔뜩 굳은 오크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오크놈은 우리에게 덤벼들지 않고, 인간들의 군대와 함께 후방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정말 괜찮으세요?"
'척살권의 영향으로 연결이 끊겨서 지금 당장 몸으로 내 의식을 집어넣을 수 없어. 시간이 필요해.'
나는 오윤아의 눈으로 후퇴하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기분이 묘했다. 성장이란 누구나, 어디서든 이루어진다는 생각에.
'그래도 1차적인 목적은 이루었다. 이제 이곳 라티스도 인간측이 수복하기는 쉽지 않을테니.'
우리 곁으로 진동하는 땅과 함께 수많은 군단병들이 적들을 쫓았다.
수축했던 군단의 둥지는 다시 넓어지고, 수세에 몰렸던 공격지를 지켜내는데 성공했다.
*
"다시 봤어. 나한텐 대적자가 어쩌구 떠들더니 결국 그런 결단을 내리다니. 역시 내가 좋은거지?"
"넌 뭘 하고 있는건데?"
현장은 맡겨두고 우선 의식을 잠들어있던 인간의 몸으로 옮겼다.
의식을 옮기자마자 느껴지는 묵직한 느낌.
눈을 뜨니, 이브가 내 배위에 올라타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척살권 맞아본 기분은 어때. 죽음의 정의가 단순히 육신과 혼의 이탈이라면 우리에겐 통하지 않지."
"기분이 더럽긴 하지만 맞는 말이야. 별타격 없더군."
나는 이브의 허리를 잡고 그대로 들어 옆으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계산한 현황은 어때."
"개인적으로 아주 만족스러워."
지금 이순간에도 전투를 치루고 있는 이브는 싱긋 웃었다.
"함선체와 침략요새를 제작한 이후 살짝 매너리즘에 빠진 병종 개발도 해야 하고. 무엇보다 덕분에 우주세력으로서의 길을 확실히 잡았거든."
"그게 뭐지?"
"당연히 포식이지. 적들이 강해졌어. 그러니 나도 강해져야 해. 이미 이번 전투로 깨달은게 많아."
이브는 자신의 장점을 살려 즉각적인 피드백에 들어갔다.
가령 자신의 지휘로 전체가 동일한 패턴을 보이는 상위종들의 움직임이라던가, 초인들을 영입한 새로운 함대와의 전쟁이라던가.
"우선은 지금 먹어치우고 있는 곳들부터 다 먹고 나서."
이브의 눈을 따라 나도 그곳들을 보았다. 전쟁은 한창이다. 하지만 지속력에서 이브가 질 것 같지 않았다.
군단의 최강점인 압도적인 물량과 빠른 생산속도는 적들이 뾰족한 묘수를 찾지 않는 이상 힘들 것이다.
"이제는 즐겁지? 성장한 그들과 벌이는 전쟁이, 발전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병력들을 움직이는 것이. 마치 우리가 좁은 미궁을 한층한층 올라갈 때처럼."
"..."
나는 서서히 변하고 있는 이브의 감정을 눈치채고 피식 웃었다.
미궁을 나온 이후, 우주에 진출한 이후 이브의 덩치는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그 마음 한켠에 남아있던 공허함은 나도 알고 있었다. 재미가 떨어졌겠지. 지루했겠지.
"이제 너를 그 누구보다 잘 아는 하이브마인드가 하나 더 있으니 앞으로 더 재밌게 해주지."
"...여차하면 배신하겠다는 소리를 이렇게 당당하게 해?"
내 말의 뜻을 알아들은 이브가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으나, 이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