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시스템 재정립(4)
나는 이브처럼 혼자서 수많은 병력을 직접 통솔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내가 내 뜻대로 병력을 움직이려면 대상자의 자의가 필요했다. 일종의 서브마인드와 같다.
문제는 지금 내게 생판 모르는 사람을 포섭할 여유는 없다는 것. 한정된 자원을, 최대한 이용해야 했다.
그래서 강도연을 그곳으로 보냈다. 우선은 우리와 인연이 있으면서도 일찍 리타이어해 현재 각축전을 벌이는 세력들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그리고 서로 만족할만한 거래를 통해 내게 충성할 부하가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너...너 도연이니?! 강도연?"
손에 든 물수건을 철퍽 떨어트린 그의 모습이, 강도연의 눈을 통해 내게도 보였다.
모습을 보이지 않는게 좋았겠지만 그 대상이 그 혼자라면 딱히 상관은 없었다.
"안녕하세요."
현재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동생은 피골이 상접하고 수척해진 그에게 인사했다.
아내를, 그리고 딸을 잃은 한명의 아버지는 지난 몇 달간 혼수상태인 딸을 돌보며 기약 없는 나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눈에 이내 눈물이 차올랐다.
"어, 어떻게 된거냐. 분명 너는..."
"죽었고, 다시 살아났다고 하죠. 그리고 굳이 숨지 않고 아저씨를 기다린건 그래도 알고는 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지금 애써 감정을 조절하고 있는 강도연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윤아는 제가 데려갈게요."
"그, 그러면 깨어날 수 있는거냐..?"
이미 그는 한계인 것 처럼 보였다.
이미 사망처리된 사람이 살아돌아와 누가 봐도 수상하게 굴고 있는데도, 그것이 마지막 희망이라 생각하며 어쩔 줄 모르고 있다.
"아마도요. 하지만 전으로 돌아갈 순 없을걸요. 그래도 걱정마세요. 윤아는 앞으로 저희랑 쭉 함께하게 될테니까."
동생은 그런 그에게 현실을 말해주었다. 그러나 이미 한계에 몰린 사람에게 그런게 의미가 있을까. 하물며 부모다. 자기 자식이 혼수상태로 가망 없는 식물인간으로 지내고 있는데, 가만히 지켜 보기만 할리가 없다.
그는 말 없이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떨구는 것으로 강도연이 자기 딸을 데려가는걸 허락했다.
"우선 복귀해."
나는 오윤아를 회수한 강도연에게 복귀명령을 내렸다. 복귀할 곳은 당연히 군단의 둥지가 있는 행성 레드리움. 나는 그곳의 둥지 일부를 움직여 미리 준비를 끝내놓았다.
"비록 식물인간 상태라지만, 플레이어인 오윤아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는건 유닛들이 아직까지 버티고 있다는 거겠지."
"윤아를 군단의 일부로 만들면, 그 유닛들도 오빠 뜻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겠네?"
"그들이 멀쩡하게 세력을 온존하고 있다면."
나는 강도연에게서 오윤아를 인계 받았다. 동생과 동갑인 소녀를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한다는게 양심에 걸렸지만 무시했다.
당장 오윤아 이 애도 내 동생을 게임에 휘말리게 만들었으니까. 또한 이 애도 결국은 플레이어다. 결과적으로는 서로에게 이득이니, 나는 절단되고 상한 몸을 치유하고 혼수상태에서 깨워주는 것으로 대가를 치뤘다 생각하기로 결정했다.
오윤아는 그 대신 앞으로 내 말에 복종하는 군단병이 되어 줄 것이다.
"...앞으로 이런 식으로 갈거야? 사람들을 군단에 편입시키면서."
"아마 그렇게 되겠지. 하지만 이브의 방식과는 조금 다를꺼야. 우리는 군단이며 동시에 사회의 일부. 이브는 이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정복하고 짓밟으려 한다면 우리는 이해하고 협력하며 이용해. 꼭 군단의 일부가 되어야만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힘인가? 그건 아니잖아,"
강도연이 점액에 잠겨가는 자기 친구를 내려다 보며 중얼거렸다. 나도 그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력을 키워 침공을 시작한 군단의 등장과 그로인해 급변하는 시스템 속에서 나는 내 이상을 위한 대강의 계획을 세워두었다.
우선 그것을 위해 최소한의 무력이 필요했다. 현재 나의 서브마인드로 재탄생하는 오윤아 역시 그 계획의 일부였다.
"너는 내가 붙여주는 병력들과 함께 움직여. 지금 연맹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그들은 지금 이브와 반군연합의 전쟁이 오히려 기회라고 여기는 것 같아."
"...역겨워. 이 순간까지 세력전쟁이야?"
"그들은 잘 모르니까 그렇겠지."
연맹에 심어둔 첩자 리하르트와 피레스, 특히 리하르트는 함장을 제외하면 그곳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사람으로, 실시간으로 자신들이 보고 듣는 모든 것을 정보로 제공한다.
그 정보엔 현재 군대를 움직이려 하는 연맹의 움직임도 포함되었다.
반군연합보다 훨씬 거대한 덩치를 가지고 있는 연맹이 각 세력의 이해관계가 들어맞아 함께 움직이기로 결정했다면 확실히 기껏해야 행성 3개를 두고 투닥거리고 있는 이쪽을 만만하게 보는게 불가능한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브와의 싸움으로 반군연합도 새로운 힘을 손에 넣었으니 전쟁이 언제 어떻게 될지는 몰라. 그러니까 우린 기회를 보다 빈쪽으로 가면 돼."
나는 계속해서 병력을 늘려가며 모습을 바꿀 수 있다는 장점을 이용해, 어느 쪽에 붙든 균형을 잘 맞추는게 우리의 진정한 임무라고 생각했다.
어느 한쪽이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영원한 전쟁, 영원한 싸움. 이 싸움이 끝나지 않는 이상, 진정한 멸망도 절망도 없을 테니까.
*
"이, 이럴 수가...다수 워프 반응!"
"이미 늦었어. 어서 발렌의 주민들을 대피시켜라!"
행성 발렌,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던 큰 행성. 직전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현장은 절망과 공포로 물들었다.
침략 요새를 떨구기 위해 공격을 퍼붓던 함대는 갑작스런 워프와 함께 나타난 수백척의 함선체들에 기겁했다.
단숨에 숫적으로 불리해진 함대가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리암이 지휘하는 함선체들이 훤히 보이는 인간 함대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들이 받으며 진형을 깨고 화력을 분산시켰다.
그리고 함대가 밀려나는 사이 나머지 함선체들은 대기권에 진입해 행성의 제공권을 장악했다.
군단의 둥지가, 폐허가 된 도시의 잔해를 부수고 먹어치우며 빠르게 넓어지기 시작했다.
'역시. 그래봤자야.'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이브는 나름 만족스러웠다.
인간측이 상위종들과도 맞설 수 있는 도움을 얻은 건 사실이나, 이미 압도적인 병력으로 우주와 땅까지 얻어낸 군단을 밀어내는건 불가능했다.
이대로 이 땅을 먹어치운다면 다시 한번 폭발시키는 물량으로 다른 곳까지 집어삼킬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알고는 있겠지? 이곳 에덴의 좌표, 인간들도 이미 알고 있다. 네 고향이 이곳이란 것도]
'...뭐야.'
그러나 이브는 발렌에서의 전투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자신이 함대를 워프시킨 것 처럼 지금 에덴의 상공에도 한무리의 함대가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일전에 이브가 목적을 가지고 행성 레뮌을 무차별 기습타격하던 것과 일맥상통했다.
최선의 방어는 곧 공격, 총통이 직접 지시해 파견한 반군연합의 제 2함대가 빠른 속도로 에덴을 향해 접근했다.
"저곳이오. 저곳이, 그 괴물들의 발원지로 추측되는 행성이지."
"킁, 신기하긴 하군. 우리가 살던 모든 세상들이 실은 전부 다 저렇게 둥글게 생겼다니."
콧수염을 움찔거린 함대의 사령관은 긴장한 얼굴로 전방에 보이는 행성을 손으로 가리키며 저곳에 적들이 있다고 말했다.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적들이 얼마나 끔찍하고 바글거리는지 자세한 보고를 받았었으니까.
그러나 정작 그의 설명을 들은 상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코를 킁킁거렸다.
"이미 한번 싸워 봤소. 까다롭긴 하지만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녀석들이었지. 방해하지 말고 끝도 없이 몰려드는 그 잡것들이나 잘 처리하쇼. 그러면 우리가 그 상위종인지 뭔지 하는 놈들의 목을 따줄테니까."
상대는 번역기를 거친 투박한 말투로 떠들며 겉에 걸친 털가죽 옷을 만지작거렸다.
'정말 이런 멍청하고 미개한 야만인이 그 괴물들을?'
함장은 눈앞에서 숨만 쉬어도 울끈불끈 꿈틀거리는 근육을 보곤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를 가이샨족이라 소개한 평균 신장 2m크기의 이 야만인들 역시 반군연합 출신 플레이어의 유닛들을 통해 그들과 손을 잡게 되었다.
그 대가는 함대사령관인 그는 모른다. 대체 총통이 무엇을 구실로 이 이세계인들을 구워 삶아 용병으로 부리게 되었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사령관님. 놈들의 함선체들이 저희를 경계하면서도 달려들지는 않고 있습니다."
"차라리 잘 되었지. 놈들은 발렌을 완파시킬 목적으로 그곳에 대병력을 투하했다. 분명 병력이 없는거야. 우리도 지상, 놈들의 둥지에 그만큼의 피해를 입혀야 한다!"
되도록 우주전은 피하고 싶었던 사령관은 함대를 이끌고 그대로 에덴의 대기권으로 직행했다. 눈치를 보던 함선체들이 그 의도를 파악하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어서 내려주쇼! 몸이 근질거리는군!"
"지, 지금 뚫으려 애쓰고 있잖소!"
함대를 지휘하랴 거친 용병들을 직접 통제하랴 몸이 두개여도 바쁜 사령관은 마침내 강습이 가능한 고도까지 함대를 내리는데 성공했다.
'...'
그리고 그 모습을, 이브는 지상에 서 있던 자신의 아바타를 통해 관측할 수 있었다.
당연히 크게 분노했다. 애초에 이브는 맞는건 지독히 싫어했다. 자신은 언제나 공격, 포식자의 위치에 있어야 했다.
[막을 수 있겠나?]
"지금 나랑 농담해? 하지만...시간이 끌리는건 피할 수 없겠어. 게임 시스템을 배제한 내 실수야. 그들의 시너지가 상상 이상이란 것도 예상 못했지."
의식에 울리는 관조자의 목소리에 이브는 코웃음을 쳤지만 표정은 이내 다시 딱딱히 굳었다.
비행종과, 초대형종부터 소형종에 이르는 수많은 지상군이 둥지를 폭격하고 강습을 시도하는 적들을 향해 내달렸다.
이브의 아바타도 그 중 하나였다. 한 손에 긴 장검 하나를 빗겨든 채, 어느새 가면을 쓴 붉은 눈의 여성체가 땅을 박차고 하늘을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