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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휴대폰에서 군단이 자란다-153화 (153/254)

153화-시스템 재정립(3)

'니림의 말이 진실이었어. 하지만 지금 중요한건 그게 아니다.'

정말로 실존하는 또 다른 세상 그리고 또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인간.

자신의 친동생이자 일족의 일원이 플레이어니 유닛이니 떠들며 그렇게 설득했음에도 믿지 못하고 지금까지도 반신반의했지만, 어쨌든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절대 거짓이 아니었다.

당황한 인간들의 모습, 불타고 부숴지고 있는 신기하게 생긴 구조물들. 그리고 붉은 안광을 번득이는 괴물들.

그녀는 상위종이 자신이 불러 일으킨 힘을 뿌리치고 창을 회수, 다시 한번 찌르기를 시전하자 땅에서 뒤로 도약해 덤블링을 하며 창을 피했다.

"신기한 괴물이구나...! 그것도 상당히 강한!"

상대는 생전 처음 보는 괴물이지만 창을 쓴다면 익숙하게 상대할 수 있다. 마력을 잔뜩 머금은 나무뿌리가 포장된 도로를 부수고 튀어나오며 적을 향해 쇄도했다.

뿌리들은 괴물의 검붉은 베리어를 뚫지 못하고 부딪혀 튕겨나갔다.

'마력 방어막?'

하지만 그마저도 그녀에겐 파훼법이 있었다. 그 어떤 형태의 형상력이든 중화시키는 특성을 띄고 있는 그녀의 힘이 움직이며, 검붉은 베리어를 무시하듯 통과해 괴물의 몸을 휘감아 으스러뜨렸다.

"말도 안 돼..."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사람들은 지켜보았다. 구출된 분대장은 물론 차량에 피난해 있던 군인들.

"봤습니까? 어쨌든, 저희도 죽을길만 있던건 아니었습니다. 이거 큽니다. 이름도 모르는 저 우주괴물들에게 드디어 저희가 한방 먹일 타이밍 아닙니까."

무엇보다 아무것도 모르고 급한대로 그녀를 이곳까지 수송해온 수송 헬기의 승무원들도 자연스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

"반군연합에서 제공하는 물자가 갑자기 늘어난 모양입니다. 연합군이 단순 화력에서도 밀리고 있어요."

"그런가요?"

"지금 모든 작전이 취소되었어요. 그러니 좀 더 쉬세요. 변동사항 있으면 말씀드리죠."

원래는 우리와 함께 다시 게이트를 넘어야 하는 수호자 연합의 간부, 메이 윌슨은 간단한 공지만 알린채 다시 가버렸다.

나는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역시 내 예상대로 일이 돌아가는 것 같았다.

'감히...'

'너무 열 받진 마. 알고 있잖아? 그들을 그렇게까지 발버둥치게 몰아세운건 너야.'

나는 다시 방으로 돌아가며 군체의식을 통해 씩씩거리는 이브를 달랬다.

그럼에도 이브의 기분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순탄하게 흘러가던 자신의 계획에, 아주 큰 방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으니까.

심지어 그 여파는 방금 전 메이가 말했듯 여기까지 미치고 있었다.

"네가 압도적이고 공포스러운 모습으로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탓에, 평소라면 뭉치기 힘들었을 다른 세상의 존재들이 힘을 합쳤어. 마치 연합군을 상대하기 위해 결성된 마계연합처럼."

"센젤, 라티스, 발렌...현재 침공중인 놈들의 행성 모두에 방해가 들어왔어. 정체도 모를 이상한 놈들이."

"유닛이든 플레이어든 명분과 실리가 있다면 자신이 속한 세력을 움직이는건 쉬워."

나는 투덜거리는 이브의 말에 쓰게 웃었다. 당장 마계에도 반군연합이 지원하는 장비와 무기가 늘어난걸 보면 답이 나왔다.

조만간 이브가 공격하는 곳에서 마계의 마족들도 등장할게 뻔했다.

"동시에 여러곳을 침략하고 침식하려한게 실수였어. 그들이 우리에 맞춰서 대응 시스템을 재정립하면 쉽게는 못이길지도 몰라. 새로 둥지를 피려는 행성들은 어때."

"...효율의 문제는 무시할 수 없지. 내가 왜 다른 행성보다도 인간들이 사는 행성을 탐내겠어. 가장 효율적으로 행성의 힘을 파먹을 수 있으니까."

이브는 어딘가 시무룩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 둥지의 확장은 엄연히 환경을 탄다. 너무 뜨겁거나 차가우면 에너지를 수급하는 과정에서 비효율이 발생한다.

군단이 번성하기 가장 좋은 환경은 다름아닌 인류가 살 수 있는 땅에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잠깐 지연되는 것 뿐. 나는 지지 않아."

갑작스런 방해에 침울해진 것도 잠시, 이브는 다시금 분노를 태웠다.

나도 이브가 질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당장 보고 있는 광경만 보더라도 상대는 이제 겨우 군단에 맞설 방법 하나를 찾은 것 뿐이다.

상대방의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하면 이브는 다시 거세게 몰아붙일 것이다.

"새롭게 구성한 함대를 출격시켜. 우선은 이곳, 발렌부터 완전히 함락시킨다."

이브는 우리의 본성 레드리움과 에덴에서 준비가 끝난 또 한부대의 대병력을 움직였다.

인간들의 함선을 모방해 만든, 소형 워프가 가능한 km급 함선체들을 기준으로 마련한 수백척의 대함대.

"...명령대로 하지."

그 함대를 움직이는건 과거 인간측의 함대 사령관이었고 지금은 군단의 서브마인드가 된 리암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인 에이미를 호위 겸 보좌로 곁에 둔 그의 모습은 인간의 모습을 벗어나 순수하게 함대를 조종하는데 맞춰져 있었다.

군단의 기함 깊숙한 곳에 자리한 그는 마치 거미줄에 걸린 것 처럼 머리만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상태로, 펼쳐진 수많은 촉수와 신경 다발로 보조하는 거대한 뇌를 조종하며 인간과는 전혀 다른 함대를 지휘했다.

저 대부대가 워프하는데 성공하면, 지금도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발렌의 군대는 그대로 쓸려나갈 것이다.

"안 막아? 이제 너도 알겠지만, 충직한 서브마인드가 지휘하는 저 대함대가 워프하면 행성 발렌의 인간들은 그대로 끝. 멸망하게 될거라고."

이브가 나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마치 이 상황에서 네가 뭘 어쩔 수 있냐는 듯한, 귀여운 우월감이다.

"무슨 소릴. 우리가 큰 승리를 거둔다면 좋은거지."

나는 뭐가 문제냐는 듯 웃으며 받아쳤다. 내 반응이 자기가 원하던 것과는 좀 달랐는지 이브는 입을 앙 다물고 볼을 부풀렸지만,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이브가 말한대로 행성 발렌의 인류는 그대로 멸망하는 편이 나았다.

우리 군단이 그들에게 진정한 의미의 공포가 될 수 있도록, 그리고 그들을...더 단단히 결집하게 만들 수 있도록.

"그리고 사실 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서."

"그래? 물론 나는 네가 처음 자신만만하게 말한대로 아무것도 안 줄거야."

"아니, 약속한 몇가지는 줘야지."

피식 거린 이브를 향해 우리의 약속을 상기시켜 주었다. 이브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찼지만 어쨌든 약속은 약속.

나는 그렇게 이브에게서 최소한의 자원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서로 얼굴 보는건 오랜만이...커흑."

"야이! 미친 자식아!"

반갑게 아는 척을 했지만 돌아온건 충격파가 터질 정도의 주먹질. 덕분에 내 몸은 허공을 날아 땅에 쳐박혔다.

"미쳤어? 왜? 왜 그랬어. 왜 오빠까지 괴물이 된거냐고!"

"괴물이 아니라, 군단이야. 나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던. 이제는 완전히 하나가 된. 그러니 나 자신이기도 한 이브를 욕하지는 마."

몸을 일으킨 나는 웃음기를 지우고 다시 녀석에게 다가갔다.

끝내 눈물을 참지 못한 강도연이 다시 주먹을 들었지만, 검은 갑각에 덮인 그 괴물의 손은 같은 괴물의 가슴에 턱 하니 닿아 덜덜 떨릴 뿐이었다.

"선택지가 없었어. 이게 아니면 이브와 대등해지지 못하니까. 대등해지지 못했다면 이제 그 자아마저 우리를 능가할 이브에게 그대로 짓눌렸을거야."

"...오빠는 몰라. 투쟁과 살육, 그리고 핏물. 나는 원하던 대로 강해졌는데, 기껏 힘을 손에 넣었는데 정작 아무것도 가질 수 없었고 지킬 수도 없어. 내가 바보였어. 그냥 강해지기만 하는건 중요한게 아니었는데."

흐느끼는 동생은 손으로 눈물을 마구 닦았다. 당연히 내 마음은 편치 않을 수밖에 없다.

애초에 이 녀석이 이 일에 휘말린 것도, 이렇게 괴물이 된 것도 다 내탓이다. 자신의 선택이라는 말에 흔들리지 말고 차라리 이브에게 아무것도 시키지 말라고 처음부터 말했다면.

"...이브는 예정한대로 확장을 계속하고, 나는 지금부터 나만의 계획을 실행할꺼야. 이제 네 소속은 내 밑이야. 넌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

"미쳤어?"

기껏 생각해서 말해줬더니 눈물을 그친 녀석이 이를 갈며 나를 노려보았다.

"방, 방금 운건 신경 꺼. 나도 군단의 일부고, 가장 강한 군단장이라고 자부해. 이제 오빠가 내 하이브마인드가 되었다면 내가 여기서 도망갈 이유가 없어. 내가 지켜."

강도연의 붉은 눈이 번득였다. 사실 내가 완전한 상위 개체가 된 지금은 이 황소고집, 말 한마디로 꺾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차마 그러지 못했다.

결국 자신도 군단의 일부라는 동생의 말이 유독 귀에 크게 박혔다.

"...좋아. 그럼 넌 지금부터 내 명령대로 행동해."

어쨌든 하이브마인드가 된 이상 나도 사적인 감정에 휘둘려 효율을 등한시 할 수는 없었다.

강도연 스스로 말한대로 녀석은 단일개체로는 가장 강한 출력을 뿜어낼 수 있는 존재. 이용할 수 있다면 당연히 이용해야 한다.

"그런데 대체 뭘 하려고? 하이브마인드라 하지만 군단병 몇 부리는 것도 못하면서."

"군단의 또다른 하이브마인드, 이브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화하고 성장하는게 내 목표야. 그리고 그 목표엔 다른 종족들도 들어가 있어. 초생물 이브는 고려하지 않을 전략이고 전술이지. 일단은 나도 병력이 필요하니 네가 그걸 위해 해줄 일이 있어."

나는 게이트를 열었다. 하지만 내 인간 몸이 누워 있는 호텔방은 아니었다. 우리 남매에겐 너무나 익숙한 그곳을 본 강도연의 눈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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