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휴대폰에서 군단이 자란다-151화 (151/254)

151화-시스템 재정립(1)

"가장 큰 고비는 넘었고, 역시나 다른 선택지. 그렇다면 그 결과는!"

주먹을 움켜 쥔 손이 덜덜 떨렸다. 화면을 보고 있는 고정된 눈은 단 한번의 깜빡임도 없이 모든 장면을 담아내기 위해 애썼다.

그의 플레이어가 마침내 커다란 분기점에 들어섰다. 분명 아무것도, 자기 자신마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희미한 빛 한점 가지고 버텨낸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범인이라면 결코 견디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 녹아 없어지는 와중에 의식을 부여잡고 있는 것 역시 각종 도움을 받았다 하나 가능성 높은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힘겹고 괴로우며 고통스러운 그 어려운 과정은 안타깝게도 전체적인 이야기에서는 고작 시작일 뿐. 변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기본적인 조건이었다.

만약 플레이어가 견뎌내지 못했다면 게임은 여기서 끝났다. 더 볼 필요도 없다. 폭주하는 유닛을 그 누구도 막지 못할테니까.

다행히 플레이어는 이번에도 견뎌내는데 성공했다.

'대적자. 과연 될 수 있을까.'

그는 이번엔 처음 들어본 선택지에 대해서 곱씹었다. 완벽히 같은 미래는 없다. 이런 단어 하나 차이의 사소한 변화들은 꾸준히 있었지만 결국 그 결과는 한결 같았다.

이브마저 지배하는 오버로드가 되겠다느니, 폭주하는 이브와 전쟁을 벌여 승리하겠다느니, 아니면 내부에서 함께하며 계속해서 설득하겠다느니.

지금껏 시도된 그 많은 선택지 중 외부적, 내부적 방해로 성공한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번에 새롭게 나온 선택지. 그것이 성공할지 아닐지는 이제부터 그냥 지켜보는 것이 유일한 해답이었다.

이제 여기서부터는 그도 감히 알지도 예측하지도 못할 진정한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

"..."

척박한 행성 레드리움. 온 세상을 덮은 군단의 둥지가 가득한 곳. 이브는 잔뜩 굳은 얼굴로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아바타의 표정, 자세 등만 봐도 지금 뿔이 단단히 나서 심기가 좋지 않다는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군단의 군체의식은 이제 그녀의 감정에 곧이곧대로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제 그녀와 동급의 하이브마인드가 된 나의 감정은, 지금 매우 평온했으니까.

"이제 나와. 다 끝났잖아."

"물론이지."

나는 다시 생긴 손으로 질긴 점막을 찢고, 세상에 발을 디뎠다.

입술을 앙 다문 뚱한 표정의 이브를 무시하고, 나는 내 몸을 살폈다. 이질감은 분명 있으나 하이브마인드가 된 지금의 나는 무시할 수 있을 정도였다.

"괜찮네."

나는 몸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브의 아바타와 흡사하게 생긴 몸이었다. 아니, 남성체라는 것만 빼면 그 구성과 구조 역시 이브와 완전히 동일했다.

검은 갑각에 덮인 괴물의 몸. 이것이 이제 내 또다른 몸이었다.

"난 아직도 이해할 수 없어."

"무엇을?"

"넌...지금의 넌 인간이야. 인간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단 말이야. 그 상태로 군체의식과 동화해버렸지. 그게 대체 우리의 미래에 무슨 도움이 된다는거야!?"

이브는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이 꼭 방황하는 사춘기의 학생 같아 웃음이 나왔다.

"넌 너무 강해졌어 이브. 네 유일한 약점이던 타 종족에 대한 배척과 이해 역시 이제는 적극적으로 이용할 정도로 성장했지. 그대로 계속 간다면 적수가 없었을지도 몰라. 언젠가는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죽이거나 지배하여 진정한 강자가 될지도 모르지."

"그게 뭐가 나빠. 그것이 나, 아니 우리의 사명이야. 먹어치우고, 성장하는 것. 미궁 전체를 먹어치우고, 대륙 전체를 먹어치웠어. 우주라고 못할거 없어."

내 말에 이브가 히죽이며 눈을 번득였다.

"하지만 그래서야 영원할 수 없어. 그 끝에, 모든걸 집어삼킨 끝에 너는 혼자 남겠지."

"...!"

굳이 표정을 볼것도 없다. 이제 이브와 나는 모든 감정을 완벽히 공유한다. 지금 이브가 놀랐다는 것 역시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인간, 혹은 인간 출신들에게 그 감정을 배워 온 이브지만 고독이란 감정은 유독 논할 가치가 없는 감정이었다.

오직 투쟁과 사투만이 있는 존재에게 외로울 틈 같은건 없으니까.

다만 그 모든 싸움이 끝났을 때. 결국 군단으로서 혼자 남은 이브는 그 고독을 견딜 수 있을지.

"아, 아니야. 내가 그딴 감정에 휘둘릴리 없어."

"그럴수도 있지. 네겐 감정도 하나의 도구니까. 하지만 아직 어린 넌 지금의 자아가 생기기 전부터 감정에 휘둘리는 편이었어. 내가 다 지켜봐서 알아. 미궁에서 쥐들과 싸울 때도, 짐승들과 싸울때도 그랬지."

팩트를 맞은 이브가 이를 악물고 부들거렸다. 짜증나고 화나는게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이제는 무섭지 않았다.

"...그게 지금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널 외롭지 않게 하려는거지. 덤으로 우리가 더 안전한 길로 갈 수 있게 하고."

나는 대답을 하며 내 역할을 다시금 명심했다. 완전한 하나가 된 나보다 이브에게 근접할 수 있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강적을 만나면 우리는 함께 싸워. 지금까지 그랬던 것 처럼.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런 강적들이 언제나 나타나진 않아."

"그래서."

"그럴때를 대비해서 우리끼리 경쟁하는거지. 우리는 적이 강할수록 강해져. 그렇다면 우리끼리 싸운다면? 당연히 서로 더 강해지겠지."

나는 당당하게 내 계획을 발표했다. 그리고 이 뜻을 알게 된 이브가 보인 첫번째 반응은, 다름아닌 비웃음이었다.

"나와? 경쟁? 지금 너는 불완전해. 인간성 따위를 가지고 군단을 완전히 지배할 순 없어. 경쟁 자체가 성립하지 않아. 만약 우리 둘이 싸운다면...넌 내게 그대로 짓밟힐거야."

"난 그렇게 생각 안해. 나는 나만의 방법이 있다고 믿으니까."

물론 이미 예상한 바. 나는 그 땡깡을 여유롭게 받아주었다. 심술이 더더욱 치솟은 이브가 괜히 발로 바닥을 쿵 하고 내리찍었다.

"떼쓰지마 이브. 너도 알고 있잖아. 지금 우리는 진정한 하나, 서로가 강해지는게 우리 모두가 강해지는 일이야."

슬슬 이쯤에서 화해하고 싶었다. 애초에 경쟁상대가 된다고 해서 원수가 되자는게 아니니까. 잔소리야 좀 하겠지만 그정도는 충분히 받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자, 어서."

나는 팔을 벌리고 어린애 달래듯 팔을 까딱거렸다. 결국 이브는 못이기는 척 아바타를 움직여 내게 다가왔다.

부드럽지도 않고 따뜻하지도 않다. 턱, 하는 소리와 함께 딱딱하기 그지 없는 갑각들이 부딪혔다.

하지만 상관 없다. 나는 품에 안은 이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모든 것을 건 마지막 도박은 성공했다.

그 대가로 얻은 건 단 하나, 지금 품에 안은 이브다.

나는 이제서야 다시 한번 이브와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있었다. 이 기회를 반드시 살려야 했다.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마지막 기회라는건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알 수 있다.

"역시. 네가 나와 경쟁하는건 불가능해."

"아직도 그 소리야?"

군단의 몸을 한 앞에서도, 인간의 몸을 한 뒤에서도 들리는 이브의 목소리에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현재 나는 몸을 갈아타났다. 저 괴물의 몸으로 지구를 활보할 순 없으니까.

두 가지, 어쩌면 수억가지 아바타를 동시에 움직일 수 있는 이브와 달리 나는 한번에 한가지 몸만 움직일 수 있었다.

나는 기존과 거의 같은, 갈아탄 인간의 몸 여기저기를 까딱거린 뒤 열었던 게이트를 닫았다. 군단이 쌓은 지식, 이제는 나도 어느정도 이용할 수 있었다.

"오, 이거 진짜 옷 같긴 하네."

나는 이브처럼 피부세포를 변형시켜 기존에 입고 있던 것과 같은 옷을 만들어냈다.

이브는 그 모습을 묘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지만, 이제는 지금 녀석이 그리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다는걸 알 수 있다.

당장 우주 너머와 연결된 군체의식은 쉴줄 모르고 움직이는 중이었다. 저것이 바로 내가 절대 흉내내지 못할 강점이었다.

"생각한 계획이 있는거지?"

"당연히. 그치만 지금 당장은 조금 더 정보가 필요해. 우리 둘이 이렇게 같이 움직이는건 계속되겠지만, 아무래도 시스템을 재정비하는건 우리만 그런게 아닌 것 같아."

불완전한 하이브마인드가 된 지금의 내겐 나만의 병력을 운용할 명분과 방법이 필요했다.

심지어 그걸 지금 우주군을 상대하는 이브의 병력과 맞먹을 정도로 키워야했다. 당연히 규모로는 따라잡을 수 없다. 다른 강점이 있어야 한다.

"지금 네가 감행하고 있는 반군연합을 향한 전방위적인 타격 말이야...이게 스노우볼이 구르는것 같거든."

"그게 무슨 소리야?"

"이런. 내가 그 전화를 받았을 때 너랑 연결을 끊었었네. 쉽게 말하면 게임시스템을 이용해 반군연합의 함대에 지원 요청을 보낸 마법사들과 같아."

마법사들 중에 섞여있던 플레이어는 유닛간의 소통을 통해 다른 세상의 플레이어에게 구원을 요청했었다.

그정도로 위기였으니까 살기 위한 당연한 선택이다.

그러니까, 지금 이브가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있는 반군연합 행성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살기 위해서, 외세에 손을 빌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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