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휴대폰에서 군단이 자란다-150화 (150/254)

150화-침략자들(10)

"정신차려. 지금 엄청 중요한 순간이니까. 그런거 할 때가 아니야."

"하긴...지금의 네겐 그렇게 느껴질 수 있겠네. 이해해."

"이해한다라. 이런 날이 오다니."

지금 나는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들의 생명, 어쩌면 이 세상의 미래까지 걸고 승부를 띄운 상태다. 한눈 팔 여력이 있을리 없으니 어깨를 잡고 몸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그걸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브의 모습은 감개가 무량했지만 그것이 내게 호재는 아니었다.

"거창한 준비가 필요한게 아니야. 지금은 보호받고 있는 네 의식을 군단의 군체의식과 동화시키는거니까. 진화하여 다시 태어나는 것 뿐이야."

"내가 뭘 해야 하지?"

"아무것도 없는 방에서 하는건 좀 그렇지."

이브가 단숨에 레드리움으로 가는 게이트를 열었다. 호텔방 한복판에 보이는 척박한 군단의 둥지가 이질적이었다.

그곳에 또다른 이브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의 옷이 아닌 괴물의 갑각을 두른 이브가.

"이리로 와."

"저리로 가."

두 명의 이브가 동시에 입을 열어 말했다. 언듯 소름끼치는 광경이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앞으로 익숙해져야했다. 어쩌면 나도 저렇게 해야할지도 몰랐다.

나는 망설임 없이 게이트를 넘었다.

"한가지 확인하고 싶은데."

"물론이지. 뭐를?"

나는 활짝 웃는 이브에게 먼저 말을 꺼냈다.

이브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내가 버티는게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단걸 아니까. 그리고 지금 내 몸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하니까 나올 수 있는 태도였다.

"지금의 내 의식이 군체의식과 하나가 되면, 너도 곧 내가 되는거지?"

"당연하지. 우리는 둘이서 하나. 떼어놓을 수 없어. 하지만 지금 그때를 상상하는건 의미가 없을거야. 인간의 의식으로는 견딜 수 없을테니까."

이브는 내 물음에 긍정하면서도 깊게 생각하진 않았다.

이브가 나를 인도한 곳은 다름 아닌 군단의 둥지 한켠에 있는 점액 웅덩이. 나는 이것이 무엇인지 레이나의 일을 보고 알고 있었다.

"들어가서, 다시 태어나. 분명 기분도 좋을거야."

이브의 속삭임이 울렸다. 설득 당하던 리암이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슬쩍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이 선택은 내가 내린 선택. 그리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선택이었다.

잡념을 전부 지운 나는 다시 한번 몸을 움직였다.

[할 수 있다. 마음먹은대로 움직여라]

마치 이미 결과가 정해졌다는 듯 확신을 가진 저 글자들이 내 마음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

군체의식과 완전히 하나가 된다는 것. 솔직히 어떨지 짐작조차 힘들었다.

이브의 서브마인드들은 그 목적이 목적이니만큼 모두 자신의 자아를 유지하고 있다. 군체의식과 연결된건 사실이나 단순한 연결일 뿐, 그 지배권을 가지진 못했다.

즉 지금 나는 이브조차도 데이터가 없는 행위를 내 모든 것을 걸고 해야 한다는 것.

"역시 망설여져? 두려워?"

"그렇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웅덩이에 몸을 배까지 담근 나는 내려다 보는 이브의 말에 피식 웃었다. 결심했을때는 새로운 길을 찾았다는 흥분과 결연함으로 애써 묻어두고 있었지만 역시 두렵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나는 이제 완전히 인간에서 벗어나는 것이니까.

뭣도 모르고 자신감에 차서 이브와 처음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에 비하면 지금은 그 대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스스로 몸을 담그지 못하겠다면 도와줄 수 있는데."

"어떻게 할건...커흡."

이브의 말에 내가 채 대답하기 전에. 내 몸이 균형을 잃고 쓰러지더니 그대로 웅덩이에 쳐박혔다.

허우적거렸지만 다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알 수 있다. 지금 내 몸이 산채로 분해되고 있다는걸.

몸의 세포 하나부터, 영혼과 내 의식까지 분해되어 그 거대한 군단에 흡수되고 있었다.

자아를 유지해야 했다. 그렇지 못하면 기껏 이브와 같은 하이브마인드가 되는데 성공해도 내 뜻을 펼칠 수 없다.

'안 돼...'

하지만 내 몸이, 특히 내 뇌마저 천천히 녹아 사라지며 내 의식은 점차 흐려지고 굳게 먹었던 마음도 빠르게 허물어졌다.

'느껴져. 네 몸 하나하나가, 그리고 그 마음이 흘러드는게. 굳이 버티려고 하지마. 다시 태어나는데 인간시절의 기억은 불필요해.'

다시금 연결된 군체의식으로 이브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걱정할 필요도 없어. 난 누구보다 너를 잘 알아. 남들에겐 내가 잘 연기해볼게. 너는 내 안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어.'

내 자아보다는 그저 나 자신에게 더 많은 의지를 두고 있는 이브는 내가 이성의 끈을 놔버리기를 종용했다.

그리고 나는 그 말에 순간 혹했다. 이대로 이 끈을 놓아버린다면 너무나 편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와 하나되어서, 뻗어나가는 군단의 일부가 되어서.

'...이게 뭐지?'

그러나 여유롭게 지켜보던 이브가 갑작스레 경계심을 끌어올린 그 순간. 나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던 그 무의 공간에서 무언가 변수를 감지할 수 있었다.

'뭐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보이지도 않는 어둠 속에서, 나는 일단 내가 나, 강신우 그 자신임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게다가 이 공간엔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건 아니었다.

저 멀리 희미하게 빛나는 한 점. 마치 아무것도 없는 우주공간 속에 유일하게 빛나는 샛별 같은 저 빛은 외로이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순간 이자벨의 말을 기억했다. 그녀가 내게 준 힘은, 그저 작은 이정표 하나를 설치해 준거라고.

저렇게 뭐라도 기준점이 되어준다면 상황은 급변한다. 나는 이 보인다는 감각을 이용해 다른 감각들을 안정시키고, 무턱대고 앞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가까워지기는 하는지, 도착할 수는 있는지 그딴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걷고 걷고 또 걷는 것 뿐이다.

하지만 나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방치되면 그 어떤 사람이라도 미쳐버릴, 그 어떤 자극도 없고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공간에서 이렇게 걷기라도 할 수 있다는 건 내 의식이 미쳐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그덕에 나는 온갖 생각들을 떠올리며 버틸 수 있었다.

"저는 오히려. 지금 이 세상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시죠?"

지금은 만나기도 힘든, 너무나 큰 거물이 되어버린 수호자 연합의 지창현은 함께 마계에서 돌아왔을 때 이렇게 말했다.

분명 해골새대가리의 고위 마족에게 당해 한쪽 팔을 절단할 만큼 큰 부상을 입은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생각해 보세요 신우씨. 사람들 모두가 하나가 되어 싸웁니다.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던 그 개같은 이념이니 사상이니 종교니 하는 쓰잘데기 없는 것들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덧없는 것이었는지. 진정한 위기를 맞이하고서야, 우리는 진정한 단합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어, 너무 과하게 생각한건 아니신지."

"물론 저도 제가 반드시 맞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단지 여러가지 생각해본 것 뿐."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사람도 정상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어쨌든 그가 내게 했던 말은 의미가 있다고 여겼다.

지금은 모든걸 내려놓고 싸워야 할 때다라는 것. 오직 그것만 생각했다.

그러자 빛이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시간개념조차 잊은 내가 그렇게 계속 계속 걸어서 마침내 그 한점의 빛에 도달했을 때.

"옆에서 말이나 걸어주지. 심심해서 힘들었는데."

[일개 인간에 비하면 초월적인 힘. 이것을 이용해 무엇을 할지는 정했나]

이제는 어둠대신 순백의 빛으로 가득차게 된 이 세상에서 나만 볼 수 있는 글자 몇개가 둥둥 떠올라 있었다.

"이브에게 가장 필요한게 뭔지 생각했지. 대체 뭐가 있어야. 그 진화의 끝이 모두의 파멸이 아닐지에 대해서."

[그럼 그것이 무엇이지? 부디, 잘, 신중히, 천천히 대답해라. 아주 중요한 순간이니까]

"대적자. 이브에겐 대적자가 필요해. 자신과 영원히 싸울 수 있는, 한계를 느끼게 만들 수 있는 대적자가."

[...정녕그것이 네 답인가? 가능하리라 보는가? 결국 이브와 싸우겠다는 것 아닌가?]

"싸우다니. 자체 피드백이라고 불러. 이브와 싸울 생각은 전혀 없어. 싸울 생각은."

웃음이 나왔다. 미친 짓이지만 지금 내 상태도 미친 상태니 상관 없을 것이다.

[일단은...축하한다 말하지. 너는 넓은 대양과도 같은 군체의식의 파도 속에서 스스로를 잃지 않고 버티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결국 버티는 것 뿐, 군체의식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건 실패했다. 애초에 근본이 인간인 의식과 군단의 군체의식 두 가지를 동시에 지배하는건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너는 군단의 불완전한 하이브마인드가 되었다]

"그정도는 각오했지."

[이브의 분노가 상상 이상이다. 느낄 수 있나? 이브는 지금 네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받아들이고 있다]

"달랠 자신은 있어. 그리고 화내면 어쩔거야. 결국 우리는 운명을 함께하는 같은 존재인걸."

쓰게 웃은 나는 철저하게 둘러친 내 주위의 방벽을 해제했다.

동시에 거대한 압력이 내 의식을 짓눌렀다. 분노보다도 당황스러움이 더 큰것 같았다.

'왜, 왜 그랬어! 대체 어떻게...군체의식에 불순물이 끼어들었잖아!!'

"불순물이 아니라 나야 이브. 그리고 너지. 이건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니 들어보는게 좋을걸. 널 부정하려는게 아니야. 너랑 싸우자는 것도 아니고.."

압력이 사라졌다. 불완전하다지만 이젠 나도 군체의식을 극히 일부분이나마 다룰 수 있으니까. 그리고 같은 군체의식으로 묶여있는 이상 이브는 절대 나를 해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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