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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휴대폰에서 군단이 자란다-149화 (149/254)

149화-침략자들(9)

"혹시 모르니까. 도움 될 수 있는건 전부 이용해야지."

종족 특성 명경지수, 정신방벽, 마력친화, 접몽 등등. 나는 상점에서 일회용으로 이용할 수 있는 수많은 종족특성 중 도움이 될만한 모든 것을 쓸어담았다.

그것들은 한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내 정신력을 강화하거나 보호해 줄 수 있는 특성들이라는 것.

게다가 상점에서 구매할 수 있는건 이런 일회용 종족특성만 있는게 아니었다. 레벨이 오르며 개방된 또 하나의 상점에는 각종 아이템들까지 있었다.

아이템들의 정체는 다름아닌 플레이어들이 실제로 사용했던 자신들만의 힘. 유닛의 힘인 종족특성은 물론 이렇게 다른 플레이어들의 힘도 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도통 뭔지 모를 것들 사이에서 익숙한 것들 몇가지가 눈에 띄었다. '천혼술의 영혼공진'. 그리고...'군단의 공명법'.

"공명법은 내게 아니잖아. 이브가 만들고, 이브가 가르쳐주고, 이브와 함께 써야만 하는건데."

[시스템은 너를 특별한 존재. 즉 유닛도 플레이어도 될 수 있는 존재로 규정했다. 규칙에 어긋나는건 아니다. 실제로 빙의나 강림등을 통해 일순간이나마 서로 합일하는 존재들이 많다]

"...아무튼 좋아."

나는 거기서 쇼핑을 마쳤다. 지금은 공명법의 저작권이 어디 있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돈지랄로 각종 아이템을 사서 무장한 나는 그길로 이자벨을 찾기 시작했다.

[네가 결심한게 무엇이냐]

"알고 있을거 같은데. 나는 다시 한번 이브와 대등한 위치에 선다. 그건 목적이 아니야. 필수적으로 필요한 조건에 불과해."

더 이상 이브에게 목줄을 채우는건 불가능하다. 아니 애초에 불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나, 같은 눈높이에 설 수 있는 기회는 한번 남았다. 분명 지금의 나는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이전이라면 이 기회를 살리는게 불가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브의 탐식과 본능이 너무 단순했으니까.

하지만 이브는 이제 너무 커버렸다. 너무 강해졌다. 굳이 여러 수를 써가며 리암을 포섭한 것이 그 증거였다.

넓은 세상을 경험하기 시작한 이브는 이제 단순한 성장과 진화가 아닌 정복과 지배라는 고차원적인 욕망이 생겼다.

그래서 그만큼 틈이 생겼다. 그 틈을, 내가 비집고 들어갈 것이다.

"나는, 군단의 군체의식과 하나가 되고, 그 지배권을 이브와 공유하는 또 하나의 하이브마인드가 된다. 지금이라면 가능해. 이브는 분명 내게 기회를 줄테니까."

[우주급 세력 전체를 다루는 초생물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초당 행성 하나급의 연산을 이어나가야 하는데 너 자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렇게 이브와 같은 괴물이 된다면, 넌 어느 쪽에 설 생각이냐. 이브와 한편이 되어 살육과 파괴에 앞장설 것이냐. 아니면 이브와 싸우고 이브를 군단 내에서 축출할 생각이냐]

마치 기다렸다는 듯 글자들이 주륵 떠올랐다.

우뚝 멈춘 내 눈이 격하게 흔들렸다. 두가지 선택지가 예시로 주어졌지만 내게는 둘다 선택할 수 없는 길이었다.

애초에 폭주하는 이브가 온 우주를 뒤덮는걸 막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한편이 되는건 아무 의미가 없다.

그치만...이브와 싸우고 이브를 축출하라? 가능할지 불가능할지도 모르고, 나는 절대 고를 수 없는 선택지였다.

"아직은 확답할 수 없어. 일단은, 눈앞의 일부터 끝내고. 지금 상태로는 아무것도 못해."

대답을 미룬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금방 다시 찾아오셨네요? 역시 위기라고 생각하신건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이자벨은 방 안에서 게임기를 붙잡고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찾아오니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나를 다른 방으로 인도했다.

"그리 거창한 신성기는 아닙니다. 우리 교단에서, 때로는 하사받은 신성력에 너무 취해 폭주하는 이들이 있죠. 신의 힘에 파묻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그런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만든 술식. 당신에게도 도움이 될거 같아서요."

그녀가 안내한 방 안에는 붉은 무언가로 그려진 복잡한 마법진 하나가 바닥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직도 옅게 남아있는 비릿한 피냄새. 내가 쳐다보자, 그녀가 히죽 웃었다.

"이 힘을 이용하면 나를 짓누르려는 거대한 신에게서 나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까?"

"그럼요 강신우씨. 라텔님의 신성한 빛이 당신의 마음을 지켜주실 겁니다. 그분의 은총, 이세계의 인간이라고 거르지 않을테니까."

이자벨의 눈엔 확신이 있었다. 결국 나는 결단을 내렸다. 설명대로라면, 이 힘은 결국 거대한 군체의식과 하나되려는 내 자아를 지켜 줄 또다른 수단이 될 수 있었다.

"제가 성녀님께 뭘 드릴 수 있죠? 공명법을 알려드릴까요."

"그걸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요. 언젠가 당신이 진정한 힘을 되찾게 되었을 때. 나를 도와줘요."

"...돕다니요? 제가요?"

"당신이 알지 모르겠지만, 이 세상은 지금 커다란 권능 안에 휘말린 상태죠."

내가 플레이어란 것을 모르는 그녀는 두루뭉술하게 게임 시스템에 대해 설명했다. 물론 알아듣는데 문제는 없었다.

"그 권능에 취한 이들은 감히 여신의 뜻을 곡해하고 왜곡하여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강제로 집행하고 있죠. 전쟁, 학살, 고문...그들은 이미 배교자들이에요."

"저보고 그들과 싸워달란 말입니까?"

"당연히 언젠가 그들을 끝장내는건 내 임무에요. 단지 그때, 한손 빌려달라는 것 뿐."

그녀가 웃음기를 지운 진지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좋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제안을 승낙했다. 결국 그녀가 요청한 사항은 지금 전체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경쟁에 있어 동맹을 맺자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것이라면 어려울 것도 없었다.

*

"진법 안에 가서 앉아요. 이제부터, 당신에게 일시적으로 라텔님의 신성력을 불어넣겠어요."

"알겠습니다."

나는 그녀가 시킨대로 방 한가운데 얌전히 앉았다.

내 앞에 선 이자벨이 어느새 전신에 밝은 황금색 빛을 불태우고 있었다.

바닥에 그려진 그녀의 피를 따라, 황금색 선이 내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내 몸에 강력한 압박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네 몸에 쌓아 온 형상력이, 지금 외부에서 침투하려는 힘에 저항하고 있다. 너도 알겠지만 괜히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 수작을 부리는건 불가능할 단순한 에너지 덩어리일 뿐이다 ]

이 압박이 저항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라면 내가 힘을 풀면 된다. 그렇게 저항이 끊기자 주변을 감싸고 있던 찬란한 황금빛이 내 몸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언젠가, 길을 잃었을 때. 눈앞에 보이는 빛을 따라가세요. 그 빛에 의지하며 자신을 잃지 마세요."

의식은 그걸로 끝났다. 공명법은 지금 흡수한 신성력마저 내 힘으로 바꿔버렸다. 그덕인지 딱히 변한게 없는것 같았지만, 이자벨은 의식은 성공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창한게 아닌 한점의 이정표를 세워둔 것 뿐이니까요. 이제 남은건 당신 손에 달렸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마지막 도움까지 다 받았으니, 남은건 하나뿐. 그대로 그녀의 방을 나와 내 방으로 돌아갔다.

방으로 들어가기 직전 나는 플레이어 상점에서 구매했던 모든 것을 사용했다. 정신력이 단단해진다던가 굳건해진다던가 그런건 사실 쉽게 체감되진 않았다.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그곳엔 이브가 방을 나올때와 마찬가지로 얌전히 앉아있었다.

"혹시 봤어?"

이브가 나를 보곤 웃으며 입을 열었다.

"리암이 우리의 서브마인드가 되었어. 함대를 이끌 사령관이야."

내가 어디서 뭘 하고 왔는지 모르는 이브는 자신이 이룩한 성과를 자랑하며 의기양양해 했다. 그 모습에는 나에 대한 일말의 의심도 궁금증도 없었다.

지금의 이브가 어디까지 성장했는지 보여주는 지표였다.

"나 결심했어 이브."

"응?"

복용한 여러가지 힘을 억지로 억누르고 있는 나는 이브에게 계획한대로 말을 꺼냈다.

"너와 완전한 하나가 되겠어. 군체의식과 말이야."

그래도 이 말은 좀 충격이었는지, 이브의 눈이 살짝 커졌다.

"갑자기? 어째서?"

이브는 이유를 먼저 물었다. 거절이 아니라 다행이다.

"그동안 너무 무력한 것 같아서. 서브마인드 수준도 못되는 힘으로는 부족해."

"인간의 모습으로도 지금까지 나랑 같이 잘 싸웠잖아."

"더 강해져야지."

대충 얼버무렸다. 그래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이브는 내 어중간한 상태에 대해서는 만족스럽지 않아했으니까.

"예전에는 이해하지 못하고 무턱대고 미개하다 생각했지. 하지만 이제는 알아.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이야. 드디어 너도 이제 알아줬구나. 역시 모든 걸 얻을 순 없지. 버릴건 버려야 해. 인간성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힘인데, 버리지 못할 이유가 없잖아? 더 우월하게 진화하는거야."

씩 웃은 이브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예상대로 이브는 내가 군체의식에 이겨내지 못하고 동화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과거의 이브였다면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좋다고 승낙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이브는 내가 인간의 자아를 버리겠다고 선언한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그 가치를 알고 있는게 분명하다.

잘 알고 있는데도, 허락한 것이다.

"그래. 진화하는건 맞지."

"지금도 그렇지만, 우린 영원히 함께야. 이 우주가 소멸하는 그날까지."

분위기가 묘했다. 천천히 다가 온 이브의 몸에서 전까지는 느껴보지 못했던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실은 나 레이나한테 배운게 있는데. 이런 상황에 대비해서."

"...이상한거지?"

"인간으로서의 마지막이잖아. 선물이 있어야지. 내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강렬한 쾌락을 줄게."

어느새 내 몸에 찰싹 달라붙은 이브가 자기 옷 앞섬에 손을 가져갔다. 그제서야 이 오묘한 기운이 뭔지 알아차린 나는 이것이 색기임을 알아차렸다.

"아야!"

"넌 서류상 미성년자야. 큰일날 소리하지 말고 시작하자."

"나, 날 때렸..."

나는 객기를 부리는 이브의 이마에 알밤을 먹였다.반사적으로 눈물을 찔끔거린 큰 눈이 휘둥그레 커졌지만, 마음을 정리해서 그런가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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