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침략자들(4)
"왜 안전하지 않은 워프는 당사자에게도, 주변에게도 극독이라는지 잘 알겠습니다."
아무것도 없던 우주공간, 이곳에 터져나온 섬광과 함께 수많은 처참한 잔해들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요새의 신목에 기댄 레이나가 주변을 둘러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지상에 추돌하듯 감행한 워프의 목적은 완벽한 철군과 동시에 병력을 온존하기 위해서였으나, 절반의 성공만 거둔채 정작 예상치 못한 긴급 워프의 부작용으로 지상만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함께 워프해온 절반 이상의 병력이 죽었다. 워프 과정에서 신목의 베리어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부숴지고, 그 여파로 외곽에 있던 모든 것이 짓이겨지고 으깨졌다.
'함부로 시도할만한 짓은 아니네. 요새도 수리해야 하고.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야.'
이브는 당연히 손실을 계산했다. 다만 연연하지 않았다. 이건 사소한 희생이었을 뿐이니까. 그리고 적들은, 자신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으니까.
'우리는 찰나의 시간을 벌었지만 말 그대로 찰나일 뿐이야. 더 많은 시간. 그리고 힘이 필요해. 놈들이 정신차리기 전에.'
"충분히 가능할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 앞에 짓밟힐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공포의 화신이 되어, 진정한 우주의 포식자가 될 것입니다!"
벌떡 일어난 레이나가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하나, 둘, 셋. 그 뒤로도 계속.
차례차례 워프하며 나타나는 수많은 침략요새와 함선체들이 주변 우주공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행성의 수명을 강제로 깎아가며, 레드리움에서 계속해서 뿜어내는 병력들이 지금 계속해서 도착하는 것이었다.
군단의 둥지는 절대 쉬지 않는다. 그 거대한 덩치를 유지하기 위해 소모되는 에너지를 생각하면 아무것도 안하고 쉬는 순간부터가 비효율의 극치였다.
'지금 당장 마련한 요새만 32채, 전투용 함선체는 2600마리, 요새와 함선체에 탑승한 군단병은 총합 억 단위.'
"하지만 죽일 수 인간들은 그 두배, 세배를 넘을 것입니다."
'출격해 레이나. 전방위적으로 공격하다보면 그 사이에 외곽지역 행성 하나 정도는 절반 이상 먹어치울 수 있겠지.'
이미 적들에게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낸 이브는 교란하며 계속해서 시간을 벌고, 저 멀리 떨어진 주인 없는 행성에 새롭게 뿌리를 내리기 보다는 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고자 했다.
레이나를 포함, 새롭게 만들어진 요새와 병력들이 다시 한번 사방으로 워프하기 시작했다.
그중 대부분은 반군연합의 세력권에 있는 행성들로 향했고, 나머지는 지도상에 존재하는 주인 없는 행성으로 향했다.
이제 이브는 인간들과 전면적인 전쟁을 수행함과 동시에 전혀 모르는 곳들을 둥지로 만들어 세력을 키울 것이다.
'이제 슬슬 집정리도 완전히 해야하고.'
병력들을 보낸 이브의 시선이, 이제는 온전히 삼켜야 할 발 밑 행성으로 향했다. 자신이 태어난, 자신의 고향이라 부를 수 있는곳.
이브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이곳을 자신의 마음대로 '에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
"실제로 뵙는건 처음이군요."
"무슨 의도인지는 알겠소. 최후의 저항인거지."
"...본성에서 지원을 보내기는 힘들겁니다."
사령관 리암은 사령함에 초대한 오스틴을 보고 힘겹게 웃으며 말했다.
"놈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괴물들이었습니다."
"...진작에 알고 있었지."
괴로운 듯 중얼거리는 리암의 말에 오스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전에 본성에서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 미리 알렸듯 행성 레뮌이 전혀 예상치 못한 습격을 당했고, 그곳에 어떤 괴물들이 나타났고,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었는지 설명하는 영상이었다.
"놈들이 일방적으로 워프하고 다시 일방적으로 워프해서 도망갈 동안, 채 2시간도 안 되는 짧은 전투동안 수십척의 함선이 파괴되었고, 그 후폭풍까지 포함해 최소 억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할겁니다. 사회적 혼란과 그에 따른 경제적 피해는 덤이고요."
리암은 떨리는 목소리로 피해 목록들을 하나하나 읽어주었다.
이브는 기껏 회수한 병력 다수가 죽었다며 투덜거렸지만, 어쨌든 그 과정에서 인간측이 입은 피해는 워프 하느라 손상된 군단병들에 비교도 안 될 정도였다.
"우리는 이제 선택해야 합니다."
리암이 현지인들 대표인 오스틴은 물론, 자신의 휘하에 있는 수하들을 보며 말했다.
"이곳에서 끝까지 싸우든, 아니면 일부만이라도 도망치든. 이 사령함 제나스 호의 워프를 반복하면 여러 사람을 리만으로 피신시키는건 가능하나, 모든 이들을 피신시키는건 불가능합니다."
그의 말에 모두의 얼굴이 굳었다.
사령함이 아무리 커도, 결국 담을 수 있는 숫자에 한계가 있고 시간도 부족했다. 아무리 대피시켜봤자 그의 부하들을 포함 족히 수천만에 달하는 사람들은 현지에 남아 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 부탁 하나만 하지."
오스틴이 앞에 나섰다.
"이 땅의 미래만이라도 보존할 수 있게 해주게."
"...기꺼이."
그래서 리암은 오스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즉시, 최대한 공간을 마련한 함선에 현지인들이 올라타기 시작했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젊고, 어린 사람들을 위주로 해서.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한줄기 희망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함장님. 함장님도 여기 남으십시오."
"나는 이 함선과 함께 한다. 나란 인간은 어차피 배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 외계행성에 부하들을 버려두고 잠시나마 목숨 부지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지?"
리암은 구출한 현지인들을 내려주며, 리만에 남으라는 부하들의 의견도 거절했다. 지금 이 상황에 어차피 혼자 살아봤자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했다.
"총통을 경계하시느라 그런 것이라면 차라리..."
"절대 아니야 에이미. 총통이 아무리 예민해도 지금 상황에 권력다툼을 할리가 없어. 지금은 우리 모두, 아니 아예 연맹과도 손을 잡아야 할걸. 놈들은 전 인류의 적이야."
"그렇다면 저도,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네게도 미안하군."
결국 에이미를 남도록 설득하는데 실패한 리암은 그녀와 함께 아주 잠시만 밟았던 고향 땅을 다시 떠나야 했다.
그리고 그가 탑승한 사령함 제나스가 다시 한번 워프하여 복귀했을 때. 하필이면 그제서야 통신을 통해 다른 소식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세력의 수많은 행성들이 동일한 괴물들의 습격을 받고 아비규환이 되어 사방에 지원을 요청하는 탓이었다.
"그래. 어차피 어디로 도망치든 치뤄야 할 싸움이었다는 뜻이었군. 오히려 속이 좀 편해졌어."
사령관의 자리에 앉은 그는 그 소식들을 듣고 헛웃음을 흘렸다.
누가 본다면 희망도 꿈도 없는 소식에 멘탈을 놓은 것으로 보이겠지만 사실 그의 정신은 지금 그 어느때보다 또렷했다.
"시작하지. 우리의 마지막 저항. 부디 놈들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입힐 수 있길바라며."
그는 오히려 함선을 최대 출력으로 발진시켰다. 그동안 숨죽여 피해다니던 모든 함선들이 함께 움직였다.
지상도 마찬가지였다. 대놓고 산천초목을 집어삼켜가며 둥지를 늘려가는 군단병들에게, 그동안 두들겨 맞기만 하던 이들이 처음으로 방어태세를 풀고 공세를 펼쳤다.
당연히 이브도 궁지에 몰려 마지막 발악을 시도하는 인간들을 자신의 고향에서 완전히 치워버리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전 병력을 기동시켰다.
두 세력의 충돌은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기다리고 있었다.
"큭..."
그 순간, 리암도 그 곁에 있던 다른 모두도 침음했다.
함대와 정면에서 추돌한 군단의 함선체들이 호위함들과 전투를 벌이는 그때. 누군가 혼란스런 전장을 뚫고 함수에 쾅 하고 내려앉았다.
가면속에서 빛나는 붉은 눈과, 그 뒤로 펼쳐진 깃털 날개가 펄력였다. 현지인이든 반군연합의 사람이든 한번이라도 그녀의 모습을 본 이들은 그 압도적인 모습에 절대 잊을 수 없는 검은 날개가.
'그래. 어차피 넘어야 할 산이었다. 뭐가 그리 억울한가. 결국 죽고 죽여야만 하는 싸움인데.'
"전투기 발진!"
함교의 지휘실에서 내려다 보면 정면에 보이는 그녀를 노려보며, 이를 악문 리암이 명령을 내렸다.
대기하던 함재기들이 발진해 함선의 장갑에 피해가 가는걸 감수하고 날개를 향해 폭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당연하다는 듯 모든 공격을 막아낸 강도연은 휘두른 날개에서 뿜어낸 참격으로 함재기들을 터트려 버렸다.
"우리가 나서겠소. 모든걸 걸고, 저 날개를 반드시 떨궈야 하니까."
"최대한 돕겠습니다."
예상대로 반군연합의 장비들이 영 힘을 못쓰자 오스틴을 비롯한 현지인들이 나섰다.
현지의 마법사들과 기사들로 이루어진 가장 정예한 조합이 강도연을 전담하기 위해 함수로 달려나갔다.
수염을 휘날리며 달려가는 오스틴의 눈에 언듯 지상의 모습이 보였다.
다시금 군단의 둥지로 덮여가는 아름다운 땅의 모습이.
'끈질기게 살아남는구나. 결국 처음부터 짓밟지 못한 우리의 잘못이겠지.'
지팡이를 휘둘러 강도연을 향해 마법을 시전하는 그의 뇌리에 후회가 한줄기 스쳤다. 하지만 후회보다 분노가 더 컸다.
외골격 슈트를 입은 기사들이 그녀의 날개에, 손에 반으로 갈라지고 터져나가며 시간을 벌었다.
"묶여라!"
그사이 마법사들이 시전한 마력의 사슬이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몸을 한번 비트는 것으로 사슬을 끊어버리고, 펼친 날개로 뿜어낸 형상력이 광선의 형태로 마법사들의 몸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렇게 드러나게된 그녀의 가슴팍에, 오스틴은 주문영창을 끝내고 이중으로 시전한 증폭마법진을 조준했다.
이 마법진으로 강화할 탄환은 본인이 즐겨쓰던 암석 탄환이 아니었다.
이 사령함에 포의 형태로 달린 대구경 레일건.
그 끝에서 발사된 탄환이 마법진을 통과해 마력을 흡수하고 밝게 빛났다.그리고 그들이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적중시킨 이 공격은 그에 맞는 성과를 내었다.
"방심했구나 괴물아."
오스틴은 베리어가 부숴지고, 교차해 막은 날개가 부러지고 찢어지며 끝내 복부를 훤히 관통당한 그녀가 비틀거리다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었네. 가서 회복해. 머리나 가슴의 동력기관에 맞았다면 영락없이 재구성을 해야겠지만 내장조차 없는 복부에 맞았으니 운이 좋았네.'
그리고 이브는 강도연의 눈을 통해 그 웃음을 보고, 그들에게 자신감을 충전해준 것 같아 심기가 아주 약간 불편해졌다.
마법과 함포의 결합이라는 생각치 못한 일격에 당해버린 강도연은 회수되어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다. 어차피 중요기관만 아니면 만능세포의 초고속 분열로 초재생이 가능하니까. 하지만 적들에게 회심의 일격이 존재 한다는건 분명 부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