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침략자들(3)
"어, 어떻게..."
아이의 손을 붙잡고 바닥에 넘어진 여인은, 자신에게 칼을 빼들고 덤벼들던 고블린형 군단병의 시체를 보고 덜덜 떨었다.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어서 일어나. 그리고 달려요!"
군단병의 머리를 터뜨린 이는, 떨리는 손을 뻗고 있는 한 평범한 사내였다.
총도 뭣도 없이 그의 손에서 뿜어진 푸른 불꽃이 괴물을 죽였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던 여인의 눈이 흔들렸으나 지금은 사소한 일에 따지고 들 틈이 없었다.
"가라고! 뛰어!"
[놈들이 더 온다]
그는 소리쳐서 굳어있던 그들을 대피시켰다. 동시에 그의 머리에 울리는 목소리가 그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적들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젠장..."
그는 참담한 눈으로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어버린 도시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생전 처음 보는 괴물들의 뜬금 없는 침공. 그리고 학살.
사출된 생체 포트에서, 그리고 지상에 추락하듯 박힌, 빌딩보다 거대한 함선체에서 쏟아져 내리는 끔찍한 짐승들은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살해하고 짓밟았다.
[플레이어는 늘 그렇듯 네 선택을 존중했다. 그러니 잘 생각해라]
"알고 있습니다. 다른 녀석들이나 잘 피하라고 하십쇼. 저는 싸울테니까."
그는 이를 악물었다. 싸우겠다는 이 선택은 자신이 내린 것이고, 언제나 자신들을 배려하던 플레이어는 정체를 감추고 숨어지낸다는 계획을 철회하고 그의 선택을 허락해 주었다.
후회되지는 않았다. 그동안 다른 유닛들과의 싸움을 회피하고 숨어다녔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고향땅의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이세계의 요정님. 내게 힘을.'
그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호랑이만한 크기를 가진 검은 갑각의 4발짐승에게 달려들었다. 전송한 단말기로 촬영해 딱 한번 본 그의 플레이어는 자신을 물과 얼음의 요정이라 소개한, 천상의 아름다움을 가졌던 여인.
그녀가 준 힘이 그의 몸을 두르고, 그 몸에 두른 푸른 불꽃이 반짝이는 얼음이 되어 전방으로 쏘아졌다.
번득이는 검치를 드러내며 달려들던 짐승이 입에 박힌 얼음송곳이 두개골을 부수며 튀어나갔다.
하지만 그는 쉴 틈 없이 힘을 뿜어내, 이제는 사방에서 몰려오는 괴물들을 상대해야했다.
"우리가 쉽게 당해줄거라 생각마라 이 미친 괴물들아!"
주위에 얼음장막을 뿌리며 발악하듯 저항하는 그는 중소형 군단병들 상대로는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얼음장벽을 머리로 부수고 기어 나온 거대한 지룡이 입을 쩍 벌렸을 때. 그는 다시 한번 혼신의 힘을 다해 그 앞을 막아섰다.
[아직까지 확인된 유닛은 1개체가 전부다. 아무래도 해당 개체를 제외한 이들은 몸을 숨기기로 작정했나보군]
'마법과 비슷하지만 마법은 아닌 것 같고. 오히려 마계의 오크들이 다루던 정령술과 비슷한 것 같기도.'
지상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는 이브는 방금 전, 지상 운용 포대로 만든 대형종인 지룡이 짓밟은 상대 유닛의 시체를 보고 가지고 있던 데이터를 이용해 분석했다.
'일단 회수해봐.'
거기서 끝내지 않고 보다 자세한 분석을 위해 소형 군단병들을 움직여 그 시체를 함선체로 회수했다. 조각조각 분해해서 혹시 모를 단서를 찾아 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부족한 점은 찾았나]
'잘 모르겠어. 하지만 아쉬운 점은 분명 있지.'
이브는 지금 자신의 아바타와 함께 곁에서 적들과 싸우고 있는 신우를 흘끔거렸다. 그는 지금 바빠서 이쪽 일엔 신경쓰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학살한다 해도 드넓은 세상의 일부일 뿐이야. 더 큰 타격을 주길 원해.'
[이곳을 점령하려 하면 가능할텐데]
'그러기엔 지금 놈들의 전체 전력에 비해 우리가 부족해.'
이브는 이번 전투를 통해 부족한 점등을 개선하려했다. 비록 상대의 안일한 대처로 전투라기 보다는 일방적인 학살이 이어지고 있지만 어쨌든 실제로 병력을 운용하고 작전을 실행하며 아쉬운 점들을 찾아내었다.
'하지만 지금 내 데이터에, 효율적으로 행성 자체에 타격을 줄 수 있는 강인한 종족은 없어.'
이브가 입맛을 다셨다. 지금 군단의 습격을 받은 현장은 지옥도 그 자체지만 그래봤자 이 드넓은 세상의 일부일 뿐이다.
상대를 흔들고 쓰러트리기 위해 더 큰 충격을 원하던 이브는 자신이 보고 컨닝할 답안지를 찾았지만 안타깝게도 답안지가 존재하지 않는 문제였다.
'일단 지금은 이대로 가는 수밖에.'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이브의 생각일 뿐, 지금 생전 처음 보는 군단병들과 맞아 싸우는 이들은 그 어느때보다 심각한 생명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현장을 도울 공중 지원이 우주권에서는 요새에, 대기권에서는 레이나에 의해 모조리 차단된 상황에서 기껏 끌고 온 전차들도 대형, 초대형종 군단병들이 들이박고 뒤집으면 별 힘을 못쓰고 있었다.
여기 저기 이어지는 폭발, 끊이지 않는 비명, 그리고 군단병들이 이빨과 발톱으로 느낄 수 있는 살육의 감각.
이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는 이브는 지금 군단병들을 움직이는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다. 왜냐하면, 지금 이건 철저한 필요에 의한 전쟁이니까.
반군연합의 중심행성인 이곳 레뮌에 큰 타격을 줘서, 자신의 세력을 안정화시킬 시간을 버는게 목적이니까.
철저한 계산, 그리고 효율. 이브에겐 오직 그것 뿐이었으며 스러져가는 수많은 인간들의 목숨 또한 그 계산의 일부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눈치를 본 것은 무엇이지?]
'시끄러워.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고 명분은 내게 있어. 그동안 지구에서 습득한 역사와 지식들로 알 수 있지, 난 떳떳해. 인간들도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하면 똑같은 짓을 벌일거야.'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순간 말이 많아진 이브에게 관조자는 굳이 말을 더 시키지 않았다.
비록 음흉한 속내가 있다지만 어쨌든 지구에서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영웅이 되어가고 있으며, 전혀 다른 행성에는 수많은 이들을 학살하는 괴물군단의 하이브마인드.
그 이중생활은 아직 한창 성장중인 이브의 자아에 분명 미세한 틈을 만들고 있었다.
"놈들의 전력이 점차 많아지고 있습니다. 쏟아지는 미사일이 분당 약 340발. 무인기 약 200대...이 이상은 제 연산력과 화력이 받쳐주지 못합니다. 지상군이 피해를 받습니다."
오직 혼돈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학살만 계속되고 있을때.
하늘에서 함선체들의 동력을 끌어쓰며 군체의식을 빌린 연산력으로 동시에 수십번의 마법을 시전하던 레이나 덕분에 하늘은 군단의 손아귀에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점점 격해지는 적들의 집중포화로 레이나가 제공권을 둔 주도권 싸움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애초에 이브는 이번 기습에서 비행종들을 거의 데려오지 않았으니까.
거기다 우주권에서도 계속해서 도착하는 지원군에 이브가 밀리고 요새가 피격받기 시작했다.
'슬슬 철군해야지. 아쉬워. 시간만 더 있었다면, 이 행성에 침투해서 주요 시설들의 좌표를 다 따는건데.'
대놓고 혀를 찬 이브가 슬슬 병력들을 철수시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더 완벽한 작전을 짤 수도 있었다.
습격으로 혼란이 벌어진 사이 침투시킨 병력들로 주요 시설들의 좌표를 기억한 뒤, 그곳들에 게이트를 열어 전부 쓸어버린다면 이 행성 전체를 잠시간 다운 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단지 그러지 못한건 시간 부족 탓이었으니 다음에도 전투가 벌어진다면, 이브는 절대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철수해'
이브는 병력들을 철수시켰다. 철수하는 과정에서, 아군의 시체까지 최대한 회수했다. 적들에게 정보를 최대한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럴수가! 지금 적들의 이동 요새가 고도를 낮추고 있습니다!"
"무, 뭐라고? 이런 미친! 당장 막아라! 설마 저걸 지상에 꼬라박는다면...!"
그리고 그 철수 수단은, 요새를 떨구기 위해 싸우던 이들이 감히 예상하지 못하고 눈을 휘둥그레 만들기 충분한 짓이었다.
함대들에 둘러싸여 포격당하던 침략요새가 다른 병사들과 함께 빠른 속도로 대기권을 향해 하강하기 시작했다.
"저 거대한 것이 땅에 떨어지면 대륙 하나, 아니 어쩌면 지상 전체가..."
"지상에 알려. 피해 감수하고서라도 지진파 상쇄 장치 가동시키라고!"
함대의 함장들이 긴급히 뒤를 쫓았지만 늦었다.
이미 대기권에 진입한 요새는 중력과 자체 추진력의 힘을 받아 마찰열을 베리어로 막으며 행성의 안으로 진입하는 중이었다.
'곧바로 워프한다.'
다만 이브의 목적은 귀한 침략요새로 소행성 충돌을 유도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기권에 돌입한 요새가 가까워지자, 지상에 퍼졌던 군단병들이 모두 그곳으로 몰려갔다.
요새는 추락하는 그 순간, 내장된 워프 장치를 가동했다. 그 범위는 요새의 방어막이 닿는 부분까지.
동시에 요새의 베리어가 옅어지며 그 크기를 증폭시켜, 모든 군단병들을 감쌀 정도로 커졌다.
'워프 인.'
그리고 그대로 워프.
지도를 보면 마치 누군가 고의로 구멍을 뚫어 둔 것 처럼, 번성하던 도시가 있던 땅이 구체 모양으로 훤히 파여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미친 새끼들이 땅 위에서 워프를..."
그 뒤를 쫓던 함장 중 하나가 대규모 워프로 발생한 충격파로 산산히 부숴지는 주변 도시를 보며 허망히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