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빙산의 일각(8)
"소장님?"
"잠시 볼일이 있어서. 중대...사항이네."
"아, 예! 알겠습니다."
경비를 서던 군인은 그의 말에 일단 경례를 하고 몸을 비켜주었다.
살짝 어색한 웃음을 지은 리하르트는 몸을 한차례 떨더니 자신의 권한을 이용, 굳게 잠겨 있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에 서 있던 피레스의 심정은 복잡 미묘했다.
끝내 리하르트를 감염시켜 자신과 똑같은 신세로 만들어 버렸지만 어째 리하르트는 자신과는 달리 상황 납득이 빨랐다.
'이건 굴복했다기 보다는 마치...'
그 거침 없는 모습은 자신처럼 어쩔 수 없이 조종당하는게 아니라 어째 적극적으로 적에게 협력하는 것 같기도 했다.
다만 그 진위를 묻기는 힘들었다. 애초에 이브는 첩자인 리하르트와 피레스가 서로 대화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으니까.
"이것이, 이 레티크 호의 워프 엔진. 동시에 연맹에서도 최신식에 해당하는 9세대 워프 엔진이다."
'가까이 붙어봐.'
"가능하다고? 그저 보는 것 만으로 꿈의 기술인 이 워프 엔진을 이해하는게 가능하단 말이냐?!"
리하르트는 이브에 의해 조종당하는 주제에 오히려 흥분해서는 떠들기 시작했다.
"대체 정체가 뭐지? 분명 본체는 따로 있을 것이다. 군사용 나노머신을 만드는 제니스 사의 나노 머신을 개체단위로 사멸시킨 것도 그렇고 이건...우읍."
오죽하면 이브가 그 입을 막아버릴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눈은 계속해서 번득였다. 그걸 지켜보던 피레스는 물론, 이브마저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쓸만하겠어.'
어쨌든 이브는 현재 이 함선 내 서열 5위 안에 드는 리하르트의 권한을 이용해 워프 엔진에 대한 모든 기록을 찾아보고 실물을 보기까지 했다.
이브는 이걸 더 발달시키는건 불가능해도 이걸 똑같이 만들거나, 조금 변형시키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판단했다.
"제안을, 내가 정체 모를 외계 생물인 당신에게 제안을 하나 하지. 지성이 있고 합리적인 사고가 가능하다면 충분히 그 가치를 알아보겠지?"
'오만하게 굴지마. 넌 도구에 불과해. 그래도 쓸모는 있다고 쳐주지. 당분간은 얌전히 있는게 좋을거야.'
안그래도 신경써야 할 중요한 일이 바쁜 이브는 흥분한 리하르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리하르트는 이브가 자신의 제안을 듣지도 않고 거절했음에도 여전히 눈을 빛내고 있었다.
*
"얻을건 전부 얻었으니 전천후로 활약할 우리의 요새를 만들거야."
실질적인 본거지 레드리움.
이곳에서 이브는 원하던 정보를 얻자마자 다시 한번 대공사에 들어갔다. 이미 설계는 다 끝난 상태였다.
물론 이것은 처음 시도해보는 시도이며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브의 자체적인 능력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었다.
이건 군단의 일부를 만들어내는 생산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건설에 가까웠으니까.
이브는 우선 미리 준비해둔 거대한 신목의 뿌리를 움직였다.
둥지가 깔린 주변과 비교해도 유독 거대한 이 신목은 두께만 수백미터. 그 높이도 km에 근접했다.
달빛 요정들이 지상에서 번성할때나 도달할 수 있는 크기에 도달한 신목은 그 거대한 몸보다도 더 거대하고 많은 뿌리를 이용해 일대의 땅 전체를 깊은 지반까지 자신의 손아귀에 쥐고 있었다.
"들어올려."
이브는 땅을 파는 능력을 가진 군단병들을 동원해 그 신목 주위 땅을 파고들어가 그 내부를 개조하기 시작했다.
함선체 수십체를 만들 에너지가 오직 이 거대하고 무거운 땅을 들어올리기 위해 쓰여졌다. 그리고 어차피 우주권까지 올라가면 추진력은 상관 없으니까.
곧 신목 앞에 선 이브가 딛고 있는 드넓은 땅이 통째로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지진이 발생하며 땅이 쩍쩍 갈라지며 서서히 위로 들어올려지고 있었다.
이브가 장담했던 대륙 크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 어지간한 소도시 하나 크기는 되었다.
"지금은 비록 한개로 만족하지만, 나중엔 아니야."
멍하니 중얼거린 이브는 딛고 있는 땅이 서서히 하늘로 올라가고 있는걸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신목의 뿌리로 감싸인 땅 내부에선 계속해서 개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연맹에서 알아낸 워프엔진의 원리와 구조, 조건 등등.
이브는 그것들을 모두 군단식으로 개조하여 이 침략요새에 적용시켰다.
겉모습은 하늘을 나는 섬이고 오히려 철저히 보호받고 있는 그 최심부는 전함과 비슷한 기형적인 이 시설물이 더 높이 오르며 어느새 구름을 접했다.
대기권에서 워프하면 지상에도 피해가 가니까 우주권까지 올라가야 했다.
어느새 주위로 함께 워프할 수십의 함선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브는 고개를 젖혀 위를 보았다. 푸른 하늘은 이미 넘어섰다.
이제 주위가 어두워지며, 반짝이는 무수한 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서운 속도로 치솟던 추진력도 중력을 벗어나자 잦아들었다.
"베리어 작동."
신목이 형상력을 움직여 요새 전체를 감싸는 검붉은 방어막을 둘러쳤다. 적들의 공격은 물론 우주의 환경에서 위에 펼쳐진 둥지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제 워프 준비."
군단 역사상 처음으로 시도되는 워프.
게이트로는 절대 옮기지 못할 이 거대한 요새가 워프 준비를 시작했다.
목적지는 군단장인 강도연, 레이나가 있는 이브의 고향이자 최근에 되찾은 바로 그 땅. 워프에 쓰일 좌표는 이미 적들이 관측해놓은 자료가 있었다.
그곳에서 둘 중 하나를 픽업하여 적진 한복판에 다시 워프할 생각이었다.
"워프, 시작."
머지않아 군단의 첫 워프가 시도되었다.
멍하니 중얼거린 이브의 말에 따라 형상력이 폭발하듯 내부에서부터 터져나왔다.
그 구조는 참고한 연맹의 워프엔진과 똑같지만 최대한 키운 그 크기는 수십배 이상. 거기 쓰이는 에너지도 그만큼 차이가 나지만, 투자의 가치는 충분했다.
"...성공."
터져나오는 빛이 요새를 휘감기를 잠시, 곧 빛이 걷힌 자리에 요새는 우주공간 특유의 적막과 함께 주변에 뜬 함선체들과 함께 그대로 떠 있었다.
그러나 아래에 두고 있는 행성은 겉모습부터 바뀌었다.
군단의 둥지로 뒤덮인 척박한 적갈색 땅이 아닌, 아직까지는 푸른 녹색을 가지고 있는 땅.
자신이 먹어치울 두번째 행성이었다.
'성공하셨군요.'
위프해서 나타난 요새를 향해 저 멀리서 한무리의 함대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도주했던 리암의 함대를 쫒다가 포기한 레이나가 함선체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오는 중이었다.
"이미 우리 정보가 들어갔을테니 지금 즉시 놈들의 거점을 칠거야."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직 이 행성 주위에 놈들의 잔당들이 남아있습니다."
"그건 강도연, 네가 맡아. 어차피 그런 패잔병들은 오래 못버틸 테니까."
이브는 전력을 나누었다. 강도연은 자신을 가리킨 이브의 손가락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레이나. 네가 가. 네가 가서, 놈들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입혀."
그리고 레이나에겐 이 침략요새와 함선체들을 주었다.
인간들을 최대한 많이 죽여라, 레이나에게는 정말 바라지 마지않던 임무였다.
"혹시 직접 나서시진 않으실 건지."
"...아직 지구에서의 일이 끝나지 않았어. 그러니 나는 다소 중요도가 떨어지는 지상에 집중할거야."
이브가 땅을 내려다 보았다.
우주를 점령했다. 적들은 게이트를 열 힘도 없다. 말 그대로 독안에 든 쥐. 방해 받을 가능성은 극히 적었다.
지금의 이브에겐 저 잔챙이들을 처리하는 것 보다도 지구에서 전공을 세워 진급하는게 더 중요했다.
"이제 움직여."
이브는 강도연과 함께 몸을 띄워 요새에서 벗어났다.
충분히 멀어진 순간, 요새는 주변의 함선체들과 함께 워프를 시도했다.
순간 태양빛을 누를 정도의 밝은 섬광. 그 이후 그 공간에 남은건 아무것도 없었다.
'남은 함선들, 공략할 수 있지?'
'...잘 몰라. 해봐야지.'
'연맹의 정보를 전부 열람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판단한 바, 놈들의 능력이 꽤 상당해.'
함께 우주공간에 둥둥 뜬 이브는 다른 임무를 맡은 강도연에게는 리암의 함대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려주었다.
애초에 리암은 그 이름이 연맹에도 위험하다 알려질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럼 그 사람을 끌어들일 생각이야?'
'글쎄, 잘 모르겠어. 그는 과연 더 완벽해지는 것을 거부할까? 동의할까. 단순히 쓸모있다고 내 일부가 될 수 있는건 아니야. 진심을 다해 내게 충성하고 우릴 위해 움직일 수 있어야지 그게 아니라면 오히려 비효율적이거든.'
앞으로 그 규모가 커지고 잦아질 함대전에 대응할 전력이 필요하다는게 이브의 판단이었다.
다만 과거였다면 차라리 자기가 배워서 스스로 모든 것을 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브마인드들을 효율적으로 굴리는 것이 말도 안되게 효과적임을 지속적으로 체감하고 있던 이브는 이제 조금 더 편한 방법을 찾고 있었다.
'너는...우리를 믿어?'
'이상한 소리를 하네. 너흰 내 일부기도 해.'
이브는 강도연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그녀는 이브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분명 이브의 스탠스는 바뀌었다.
'하지만 스스로 거부하고 도움도 안되는 놈들을 쓸 생각은 없어. 일단 한번 알아봐.'
'...알겠어. 일단 그 사람이랑 한번 만나볼게.'
강도연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실 별 기대는 안하고 있었다.
이미 자신이 승자임을 알고 여유를 부리는 이브와는 달리 리암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자신은 그저 괴물일 뿐이었다. 부하들을 죽이고, 세상을 위협으로 몰아넣는 괴물.
신우의 친동생인 자신과 인간에 대한 증오로 다시 태어난 레이나와는 전혀 다른 경우였다.
만약 그와 얼굴을 대면하게 된다면 정상적인 소통이나 설득이 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