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빙산의 일각(6)
"끄하..."
'애써 강한척 하지마. 두렵잖아. 죽는것이, 아픈것이."
"너...는..."
'하찮아.'
죽을 사람은 다 죽고 극소수의 사람만 탈출에 성공한 가운데 이제 시체와 핏물만 남은 함선 사이세커는 조용해졌다.
그곳에서, 이브는 참격에 휩쓸려 한쪽 팔이 잘려나간 에이든의 몸을 짓밟고 내려다 보며 히죽이고 있었다. 복수에 성공한 것이다.
그래도 에이든은 아무것도 몰랐다. 이브가 쓴 가면은 표정 따윈 없으니까.
다만 이렇게 대놓고 기운을 뿌리는데 직감적으로 느낄 수는 있었다.
지금 피 흘리며 죽어가는 자신을 짓밟고 내려다 보는, 여체의 몸을 가진 이 괴물이 자신을 깔보고 있다는 것 쯤은.
"저리, 꺼져라...더러운, 벌레년아..."
핏발선 눈으로 이를 간 그는 피를 토하면서도 이브의 발목을 붙잡고 끙끙거렸다. 하지만 그 억센 괴물의 발을 떨쳐낼 수 있을리가 만무.
'감히.'
"흐아, 끄아아악!"
오히려 이브는 에이든의 머리를 손으로 움켜잡고 들어올렸다.
비명을 지르는 그의 두개골이 점차 으스러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이브는 멈추지 않았다.
이토록 끔찍하게, 철저하게 그를 죽여버릴 셈이었다.
'빨리 끝내자 이브. 다른 곳도 가봐야지. 지구쪽도 시간이 많진 않아.'
그런 이브를 신우가 어깨를 잡으며 말렸다.
이브는 잠시 멍하니 서 있더니 툭 하고 손을 놓았다. 에이든은 바닥에서 꿈틀거리며 끙끙거리다, 이내 숨이 끊어졌다.
'맞는 말이야. 일단 이 함선은 통째로 옮기고, 나머지는 마무리 지어야 하니까.'
이브는 금세 에이든에 대한 관심을 꺼버렸다.
그러고선 걸음을 옮겨 밖으로 향했다.
반군연합의 함대가 이미 우주권으로 도주한 이상, 이곳은 이미 처참한 잔해들만 남았다.
추락한 함선들의 잔해가 지상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허공에 떠 있는 함선들도 이미 내부는 군단병들이 장악한지 오래였다.
"별거 없잖아. 우주 함대도."
가면을 벗은 이브가 하늘을 보며 히죽였다. 지금 그곳에선 아직도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레이나, 강도연이 함께 이끄는 함선체들이 끈질기게 적들을 추격하는 중이다.
다만 아마 끝까지 쫓지는 못할 것이다.
생체함선이라는 특징상 에너지 효율이 기계보다 좋지는 못했다. 거기다 크기를 키우는데도 한계가 있었다.
인간들이 자랑하는 거함에 대적하려면 결국엔 다른 방향으로 진화해야했다.
애초에 장기적인 항해를 목적으로 만든 타입들도 아니었으니 꼬리잡기를 이어나갈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이제 제공권을 우리가 먹었잖아. 남은 놈들은 그저 천천히 상대하면 돼."
'그들이 지원을 부를게 뻔한데.'
"지원을 불러도, 오지 못하게 만들면 되지. 지금은 지켜보기만 해볼까? 놈들이 어떻게, 얼마나 추하게 도망치는지 말이야."
이브는 미리 생각해둔 것이 있다는 듯 여유롭게 웃었다.
이제 저 푸른 하늘에서, 이 땅 위에서 다시 돌아온 자신을 막을 수 있는 이는 없었으니까.
[...]
다만 그들을 지켜보는건 이브만 있는게 아니었다.
*
"..."
지상에서는 학살이, 우주에서는 추격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그때.
그는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점령한 사이세커 호의 외부 갑판에 올라와 있는 두 존재를.
둘 모두 그가 언제나 지켜봐야 하는 존재였다. 이 어둑한 방 안에는 오직 그와, 그들을 비추는 화면 뿐이었다.
"넌 참 편하겠군."
"그게 무슨 소리지?"
"유닛이 알아서 다 하잖아. 플레이어 케어부터 자기 성장까지."
"농담이 심하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하, 그건 그렇지."
그의 뒤에 다가온 또 다른 사내가, 차가운 그의 반응에 소파에 털썩 주저 앉으며 피식거렸다.
찾아 온 사내의 얼굴은 밋밋한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가면 속에서 빛나는 붉은 눈만이 자신이 한시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아야 할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양쪽 다 에고가 강해서 주도권 잡기 힘든 쪽 보다는 낫지 않나?"
눈치를 보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는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차라리 말이야..."
"너희가 나를, 그들을 얼마나 경계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사내가 계속 입을 열자, 결국 그도 한마디 하며 사내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아, 아니 다른 놈들은 몰라도 나는..."
"모든 것이 파멸뿐인 결과는 당연히 나도 바라지 않아. 당연히 이 이상 게임이 리셋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이제는 제발 끝을 봐야 한다."
그는 상대에게 반문의 기회도 주지 않고 단호하게 즉답했다.
어처구니 없다는 듯 그의 뒤통수를 보고 있던 사내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 순간 마저도 끝끝내 등을 돌리지 않았다.
"다들 회의감을 느끼고 있어. 변한게 없으니까. 아무 능력도 없는, 그저 발버둥치는게 전부인 쓰잘데기 없는 플레이어. 그에 반해 미친듯이 잠재력을 폭발시키는 유닛. 결국 유닛이 주도권을 잡았지. 그나마 어설픈 설계로 마련한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기회는 단 한번. 그리고 그 브레이크를 소모한 유닛은 결국 멈출 수 없는 폭주기관차가 되어 또다시 이 게임을 뒤집어 엎어버리는 변수가 될거야."
"미래는 아직 모른다."
"...이대로 가면 알거 같은데."
"나는 그를 믿는다."
"그래. '너'는 '그'를 믿겠지. 네가 아니면 누가 믿어."
사내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버렸다. 그럼에도 그는 조금의 미동도 없이 화면만 보고 있었다.
방금 나간 사내의 말이 사실 틀린건 아니었다.
유닛이 각성한 이후, 그의 영향력은 대폭 줄어들었다.
오직 관조자만이 가능한 모든 역할을 그 유닛은 사실상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었다.
거기다 플레이어와 유닛이 하나된다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지며 더더욱.
갈수록 양측에 말을 건네는 빈도도 줄어들고, 나서는 일도 줄어들며 말 그대로 관조자의 역할에 충실해지고 있었다.
편법을 써서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 다른 이들과는 처한 상황부터가 달랐다.
'무능력하고. 무력하다. 아무 것도 아니다.'
그는 자신이 지켜봐야 할 플레이어를 바라봤다.
한때는 지하 미궁 최하층에 있던 세포덩어리에 불과했을 때의 유닛처럼, 지금의 플레이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널리고 널린 흔한 인간들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하필이면 엮이게 된 유닛이 잠재력하나만큼은 손에 꼽는 종족이란 것도 문제였다.
그 커다란 불균형이 결국 파죽지세의 성장 이후 몰락을 초래할 가능성이 컸다.
'무너진 균형, 비틀린 개입, 시작부터 꼬인 잘못된 만남. 그럼에도 결론은 하나뿐.'
그러나 그는 플레이어를 버릴 수 없었다. 결국 모두의 우려와 걱정을 뿌리치고 이번에도 애쓰며 발버둥치는 플레이어에게 걸어 볼 수밖에 없었다.
유닛에게 걸어봤을 때는 언제나 똑같은 파멸 뿐이었다. 유닛은 모든 것을 먹어치우고 마침내 이 게임까지 먹어치웠다.
하지만 플레이어에게 걸어봤을 때는 그래도 매번 조금씩 다른 결과를 보여주었다. 그 끝이 모두의 파멸인건 똑같지만, 그 희미한 변수가 유일한 희망이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믿었다. 애초에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고. 그래서 이번에도 이제는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플레이어가, 유닛에 대한 영향력을 더 늘리는 쪽으로 유도했다.
[도망치는 놈들의 함대가 멀어진다]
"나도 알아. 그러면...일단은 복귀하는게 좋겠네."
지켜보던 그가 자신의 목소리를 전하자 유닛이 투덜거렸다.
이제 잠시 지정된 세상에서 쫒겨났던 유닛은 다시 돌아와 세상의 승자가 되고, 대표 유닛이 되어 새로운 권한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체할 이유가 없지. 지금 즉시 이 땅을 다시 먹어치울거거든."
마침내 거슬리는 적들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브는, 자신의 발로 다시 이 땅에 돌아오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한때 목적 자체였던 이 세상은 지금 단순한 중간 기지일 뿐.
이곳을 두번째 거점으로 삼아서 더욱 뻗어나갈 계획이었다.
'놈들이 지원을 보내지 못하게 막는다며. 어쩔 셈인데?'
"연기를 그만두고 본성을 드러내었으니 이미 우리 소식은 알려졌을거야. 공격은 곧 최선의 방어이니, 우리는 먼저 놈들의 행성을 공격할거고."
'...그 방법은?'
"워프 기술이 탐이 나."
이브는 입맛을 다셨다.
현재 습득한 게이트 관련 기술은 한계가 명확했다. 도착지점의 좌표를 알아야 하고, 그 크기와 숫자를 유지하는데도 힘이 막대하게 들어갔다.
워프 기술 역시 완전무결한건 아니지만 게이트와 조화롭게 섞어 쓸 경우 그 위력을 극대화 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그 워프 기술은 어떻게 얻지?'
"물론 노획한 함선을 뜯어보면 놈들의 좌표를 알 수는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워프할때 쓰이는 좌표고...다행히 우리에겐 뛰어난 정보원이 있으니까."
신우의 물음에 빠르게 계산을 끝낸 이브는 금세 답을 내놓았다.
워프 관련 기술은 연맹에서도 극비에 속하는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기술이다.
반군연합의 일개 외곽사령부에 그것에 대해 잘 아는 이들이 있을리가 없다. 그들은 그냥 만들어진걸 쓰는 것 뿐.
그러니 이브가 함선을 뜯어서 본다고 해도 그걸 재현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실 군단에는 연맹에 깊게 관여할 수 있는 정보원이 하나 있었다.
'피레스를 너무 과하게 움직이면 의심 받을 확률이 커.'
"상관 없어. 더 권한이 높은 녀석들로 갈아타면 그만이니까."
이브는 다시 한번 연구원 피레스에게 명령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