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빙산의 일각(4)
"전 지역에 퍼져 있던 놈들의 함선이 움직이기 시작했어. 결단이 빠르네. 내가 지금까지 본 인간측 지휘관들 중에선 손에 꼽아."
황량한 둥지가 펼쳐진 레드리움, 그곳에 선 이브는 지금 다른 곳에 퍼져 있는 군단병들의 눈을 통해 전체적인 이동을 시도하는 인간들의 함대를 관측했다.
"우리의 역사적인 첫 함대함 전투에 걸맞는 상대라고 생각해. 비록 시간이 부족해서 급히 투입하는 바람에 숫자가 좀 부족하긴 하지만."
[...그냥 지금껏 만났던 놈들의 수준이 낮았던 것 같은데]
"일단은 그들에게 다급함과, 동시에 희망을 좀 줘볼까?"
머리에 울리는 목소리는 가뿐하게 무시한 이브는 그곳에 넘어가 있는 강도연에게 따로 지시를 내렸다.
사실, 지금 이번 전투에 동원할 군단의 '함선'들은 여기 없다.
새롭게 태어난 함선형 병종들은 만들어진 즉시 게이트를 넘어가 있는 상태였다.
그렇게 대기하고 있는 함선형 군단병들은 계획된 구도가 그려지는 순간 단숨에 일어날 것이다.
"자. 이제 우리도 가자."
히죽 웃은 이브가 곁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은건 이브와 마찬가지로 검은 갑각을 건틀릿처럼 두른 큼직한 괴물의 손.
강도연이나 이브, 레이나와는 조금 달랐다. 신우의 자아를 위해 고의로 인간과는 판이한 괴물의 모습으로 설계된 그 육신은 키만 3m에 달했다.
곧이어 게이트가 열렸다.
그 게이트를 통과한 둘이 도착한 곳은 차갑고 어두운 바닷속. 동시에, 그들이 디디고 있던 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땅이 아니었다. 붉은 빛이 사방에서 번득이기 시작했다.
[이것이 우리의 역사에 기록된다. 또 한번 도약하는 순간으로. 지하동굴의 웅덩이에서 시작한 작은 세포들이, 마침내 이 세상 밖을 넘보는 존재로 진화했다]
마치 엔진음 같이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빠르게 수면 위로 향하는 그것은, 전체적인 형태만 보면 연맹의 함선과 엇비슷했다.
하지만 분명 여기저기 꿈틀거리는 살아있는 생물이었고, 이브가 움직이는 군단병의 일부였다.
수백에 달하는 그 거대한 괴수들이 일제히 치솟으며 마침내 넓다란 대양을 뚫고,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
"사령관님. 모든 함대가 집결했습니다."
"소형기체들이 언제 나타나 함선에 파고들지 모른다. 전방위 포격이 가능하도록 바꾸고, 사방을 경계하며 놈들을 소멸시키도록."
세상 반대편의 대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지금 전력을 모은 그들은 모른다.
리암은 수십척의 함대를 이끌고 지상을 지옥도로 몰아가는 괴물 무리를 쫒았다.
지금 모인 함대의 화력이면 대륙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릴 수도 있으나, 그들이 한데 모인건 단순히 각개격파를 피하기 위함이니 함선들은 오히려 철저한 대비를 갖추고 대형을 유지한채 항해하며 지상의 적들을 쫓았다.
'잡는게 가능할까? 사실 놈들이 정말로 지능적이라면, 지금 그냥 도망가면 그만이다. 우린 이 땅을 가지려는 것이지 파괴하려 하는게 아니까.'
함대가 모두 모이는데 성공하자 안심하기 시작한 다른 이들과는 달리 리암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리고 그 원인 중 하나에는 아무리 경계하라는 보고를 날려도, 그저 알았다는 통상적인 메시지만 반복하는 본성의 반응도 있었다.
당장 자신이 이름도 없는 외계 벌레들에게 함선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옳다구나 하고 물어뜯을 그 총통이 가만히 있는 것도 말이 안 되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중간에 더 이상의 손실 없이 모든 함대가 모이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에이미."
슬며시 손을 잡는 보좌관의 말에 피식 웃은 그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보여주던 그 움직임들. 마치 우리 의도와 움직임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굴며 교활히 움직여왔지. 그런 놈들이 갑자기 대군세를 이끌고 움직였다는게 마음에 걸려."
리암은 분주히 움직이고 떠드는 수하들을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 두뇌가 팽팽하게 돌아갔다. 지금까지 쌓아 온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그는 이미 상상의 영역까지 들어가고 있었다.
'놈들, 아니 그들은 대체 누구인가.'
규정에 따라 우선은 외계의 괴수종 중 하나로 분류했다. 하지만 그는 동행한 학자들의 그 분류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들은 단순한 생물이, 짐승이 아니다. 함선을 떨구고 마법을 쓰며 사고하고 집단으로 움직일 줄 아는 이들이다. 그런 이들이 왜, 지금 움직였을까. 정말로 단순히 우릴 피해 도망친 것이라면 왜 몇놈은 여기 남아 계속 우리와 국지전을 벌였나. 그들의 목적은 무엇인가.'
"사, 사령관님?!"
점차 그 상상이 불길한 영역으로 치닫고 있을 때.
전방 지역에서 급박한 보고가 들어왔다. 순간 숨을 들이킨 리암은 곧바로 화면을 띄웠다.
"검은 날개."
리암이 입술을 깨물었다. 화면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한 검은 깃털날개.
그리고 그녀를 중심으로 곁에 주르륵 정렬한 총 스무 개체의 상위종들.
지상에는 그동안 몰려다니며 대륙을 쑥대밭으로 만든 군단병들이 집결해 있었다. 마치 이곳에서 전면전을 벌이겠다는 듯이,
"대체 왜? 대체 왜 이 대함대와 정면으로 맞서는거냐?!"
차마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리암이 화면에 보이는 가면 속 안광을 보며 모자를 벗고 머리를 거칠게 긁적였다.
방심하지 않기에, 상대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했기에 더더욱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령관님! 어서 포격 명령을!"
물론 전방에 있던 함장들은 눈이 돌아간지 오래였다.
그들에게 저 검은벌레들은 우주함대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낸 원흉들이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리암처럼 깊게 생각하진 않았다. 애초에 객관적으로 봐도 화력의 차이는 압도적이다.
"포격 명령을 내려."
"포격!"
결국 리암은 일단 먼저 움직여 보기로 결정했다.
'온다.'
함포의 포신이 밝게 빛나더니, 펑 하고 터지는 섬광과 함께 강력한 광선이 뿜어졌다.
강도연과 상위종들은 그 즉시 베리어의 출력을 끌어올리며 산개했다.
굳이 도움도 안 될 지상군을 포함한 전 병력이 이곳에 대놓고 집결한 이유는 오직 단 하나.
바로 적들의 함대를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비록 자만하지 않고 수비적인 대형을 유지하는 상대의 신중한 움직임은 예상 밖이었지만, 어쨌든 이곳으로 유인하는데는 성공했다.
'이제 난전.'
아슬히 광선을 스친 강도연이 속으로 되뇌이며 하늘을 지그재그로 어지러이 기동해, 빠르게 함대를 향해 접근했다.
애초에 이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이브가 계획한 '군단식' 함대전의 일부였다.
'역시 함재기들을 발진시키는군. 계속 움직여. 우리는 우리만의 강점을 여러가지나 가지고 있는데, 굳이 그들에게 익숙한 정석적인 함대전을 해줄 이유가 없지.'
상황을 보고 있던 이브가 피식거렸다.
이미 그들이 취하는 기본적인 전략 전술은 완벽히 습득했다.
하지만 함선형 군단병을 생산할 때처럼, 이브는 반드시 그 기술에 군단만의 강점을 조화롭게 섞어넣었다.
날개를 펼친 강도연이 자신에게 달려들어 기관포와 소형의 고화력 미사일을 퍼붓는 무인 함재기들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잡았다. 쏴!"
그러나 그것은 미끼. 그녀가 조금이라도 회피기동을 멈추는 순간 쏘지 않고 계속 조준만 하고 있던 함선의 광선포 일부가 그녀를 향해 쏟아졌다.
'좀 하는데?'
이브가 놀랄 정도로 기민한 대응. 강도연은 지직거리는 베리어를 보강하고 다시 한번 몸을 움직여 함선을 공략하기 위해 움직였다.
다른 상위종들도 마찬가지였다. 무인 함재기들을 알차게 써먹는 리암의 전술에 강도연은 물론 상위종들의 베리어가 점차 깎여나가기 시작했다.
이러면 소모전이다. 막아내는데 에너지를 전부 써버린다면, 포격을 견딜 수 없다.
'전략을 바꿔. 우선 하나부터 떨군다.'
그때를 기점으로 강도연과 상위종들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회피기동 속에서 서로에게 가까워진 그들이 뭉쳐 찰나의 틈을 번 순간. 강도연이 호위함 한척의 베리어를 부수고 외벽을 짓이겨 내부에 침투하는데 성공했다.
"사, 사령관님...!"
"발사. 어쩔 수 없다. 이 기회에 저 검은 날개를 떨군다!"
눈을 질끈 감은 리암이 과감히 결단을 내렸다. 호위함 하나를 희생시켜서, 뭉쳐버린 적들을 일소하자고.
곧 기함에서 뿜어진 포격이 호위함을 통째로 덮어버렸다.
어마어마한 대폭발이 일어났고 그 충격은 근처 함선들의 베리어에도 금이 갈 정도였다.
'목숨값은, 목숨값으로 받아낸다.'
"절대 살려보내지 마라. 더 강해져서 돌아오기 전에 여기서 끝내!"
산산히 부쉬진 함선의 잔해와 상위종들의 짓이겨진 시체가 추락하는 가운데.
허공에 남은건 쩍쩍 금이 간 베리어를 두르고 있는 강도연 뿐.
리암의 명령에 다시 한번 포격이 시작되었다.
확실한건 이 일격을 받으면 베리어는 깨지고, 강도연은 죽는다.
"...저건 뭐지?"
그러나 이어진 포격으로 검은 날개가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눈을 휘둥그레 뜬 리암은, 하늘에 흩날리는 금발을 보고 순간 말을 잃었다.
"어리석게도, 저들은 당신이 우리의 전부인줄 아는것 같습니다. 당신이나 나나, 군단의 극히 일부일 뿐인데도."
피식 웃은 레이나가 강도연의 앞을 가로막은 채 손에 든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사령관님! 대함 레이더가 작동합니다!"
"대함 레이더가 왜..."
현지인들의 증언 기록에서나 등장한 레이나를 멍하니 보고 있던 리암은 보좌관 에이미의 비명에 고개를 돌렸다.
대함레이더는 말그대로 상대 함대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한 광범위 레이더. 상식적으로 지금 울리는게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레이나가 모습을 가리는 위장 마법을 해제하는 그 순간, 레이더에 감지되는 적 '함선'들이 찰나의 순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충돌, 충돌에 대비해라!"
그리고 사령함으로 직행하는 거대한 그것을 육안으로 본 순간 리암은 육성으로 소리치며 곁에 있던 에이미를 껴안고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