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빙산의 일각(2)
"견습은 필수로 들어야 하는 수업? 그딴걸 내가 왜 들어야 하지?"
"...그야 네가 견습이니까?"
이브가 처음으로 위장신분을 얻고 인간 사회에 녹아들던 때. 나는 이브를 끌고 강제로 수업을 듣게 만들었다.
수업 내용은 벌거 없었다. 수련을 거쳐 전장에 나가게 되는 신입들이 기본적인 움직임이나 전략, 전술 등 현장에서 지시를 들어가며 싸우기 위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것들이었다.
어쨌든 이브는 그 수업을 모두 들었다. 그당시만 해도 별거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브가 그렇게 습득한 지식을 그대로 역산하여 재구축해 군단에 적용시켰을 때.
그것은 반대로 우리가 공격측이 되어 수비측, 즉 인간측의 약점을 정확히 후벼파는 비수가 되었다.
'판세를 보고 지휘하는 지휘관을 저격해. 지시하지 못하면 서로 분리된 수밖에 없으니, 나머지를 따로 처리하면 그만이지.'
이브는 달려들던 기사들의 공격을 무력화시킨 강도연에게 지시하여, 도시 중앙의 지휘부를 궤멸시킬 것을 지시했다.
하이브마인드의 역할을 하는 지휘자의 존재가 인간들의 군대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덕이었다.
물론 상대도 그걸 아는 만큼, 지휘부는 그 무엇보다 철저한 보호를 받거나 숨겨져 있는게 보통이다.
문제는 지금 적들에겐 강도연의 화력과 기동력을 따라 올 소형개체가 없다는 점.
나는 화면을 통해 그 전장을 모두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검은 날개! 사악한...괴물!"
외벽을 부수고 난입한 강도연의 모습에 지휘관으로 보이는 중년 사내가 이를 갈며 지팡이를 겨누었다.
그러나 쏘아진 마법은 베리어를 반파시키는게 전부였다. 기동력에서 밀린 적들은 아직 동생을 채 쫒아오지도 못한 상태.
강도연이 날개를 휘둘러 발악하듯 달려들던 기사 둘의 목을 베었다.
권총을 빼들고 마구 사격하던 반군연합의 지휘관은 베리어에 총탄이 모두 막히자 망연자실한 얼굴로 비틀거렸다.
"그래, 죽여라. 하지만 네년은 실패할 것이다. 폭격에 궤멸당한 주제에 발악해 봤자 그렇게 몇 마리만 살아남은 상태로는! 아무리 강해봤자 우리를 이길 수 없을거다. 살아남는건 우리다!"
마법사는 큰 충격을 받았는지 창백해진 얼굴로 강도연을 손가락질 하며 마구 소리쳤다.
'멍청이.'
그리고 이브는 그런 그를 비웃었다.
그들은 지금 우리의 둥지가 지난번의 폭격으로 완전히 소멸했으며 극히 일부만 살아남았다고 굳건히 믿고 있었다.
그동안 이브가 꾸준히 국지전을 벌이며 자연스럽게 녹여낸 거짓된 정보가 어느새 완벽히 자리 잡은 것이었다.
"아..."
그런 상태니, 그들은 새까맣게 몰려오는 군단병들이 무력화된 성벽을 타넘고 부수며 마구잡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모습을 도저히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주력이 된 중형 군단병들이 이미 강도연의 난동으로 반쯤 붕괴한 도시 내부를 유린했다.
소리 없는 짐승들의 이빨에, 발톱에 독침에 사람들의 비명만 울려퍼졌다.
'이제 시작일 뿐이야. 움직여. 바람과 같이 움직여서 최대한 큰 피해를 이끌어내. 그래야 놈들이 방심할 테니까.'
이브가 지시를 내려 비행종들에게 공격당해 추락하는 헬기를 멍하니 보고 있던 그들의 목을 베게 만들었다.
도시 하나를 떨구는데 걸린 시간은 채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완전히 절멸시키는데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놈들은 함대를 동원할 수밖에 없겠지?"
한창 화면을 보고 있던 와중. 이번에는 군체의식이 아닌 옆자리에서 이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웃고 있는 그 얼굴은 마침내 기지개를 피고 움직여서 그런지 기분이 굉장히 좋아 보였다.
"그럴 수밖에. 지금 그들이 가진 전력으로 우릴 막을 순 없으니까."
"이곳 일만 아니라면, 같이 저곳에서 날뛸 수 있을텐데."
이브가 아쉽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나는 굳이 대답하진 않았다. 지금 우리는 차량에 타고 전선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아마 긴장한 채 옆자리에 앉아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기도하거나 자기 최면을 걸고 있는 다른 헌터들은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도 모를 것이다.
"하긴 기회는 금방 오겠지. 너무 걱정하진 마. 이젠 인간을 상대로 절대 방심하지 않아. '희생' 따위에도 당하지 않아."
이브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날 이후, 이브는 움직임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나도 그냥 말리지 않았다.
이미 주도권을 넘긴 지금은 일단 지켜보는 것 뿐이다. 이브가 최후의 선만 넘지 않길 바라면서.
"오셨군요!"
"지금 놈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차량에서 내린 곳은 하늘에선 비행기와 헬기가, 땅에선 자주포와 전차가 불을 뿜는 전선 한가운데였다.
사람들은 도착한 우리를 보고 환호했다. 단지 지금은 그런 환호에 답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대신 함께 날뛰는건 이곳에서 해. 저 쓰레기 같은 마물들에게 내가 질 수는 없지. 자, 가서 함께 춤추자."
모든 행동에 적극적이게 변한 이브가 먼저 검을 들고 앞장섰다. 반대쪽에서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사실 이쪽에서는 뭘 해도 상관 없다.
그러나 위장 신분을 이용해 손쉽게 하늘돛새치의 표본을 얻은 이브는, 이미 이 세상에서도 본인이 최강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이 원하는 모든걸 보다 쉽게 가질 수 있으니까.
*
"온다...놈들이 몰려온다!"
"최대한 줄여!"
여명이 밝아오는 때, 떠오르는 빛을 등진 전투기가 낮게 남과 동시에 기관포를 뿜으며 하늘을 갈랐다.
기관포는 도시를 향해 땅에서 새까맣게 몰려드는 괴물들을 주르륵 훑으며 죽여나갔다. 하지만 그렇게 처치한 괴물들은 전체에 비하면 극히 일부일 뿐.
"큭...무슨 괴물들이 광선을 쏴!"
전투기 조종사는 가까스로 적의 공격을 피하며 분통을 터트렸다.
검붉은 에너지 광선을 뿜어낸건 땅을 기어다니는 거대한 도마뱀.
용종의 형태를 본딴 이 지룡은 다시 한번, 목을 쭉 뺀뒤 입을 열고 심장에서 끌어올린 에너지를 입에 달린 기관을 통해 광선의 형태로 전투기를 향해 발사했다.
저주로 형상력을 다룰 수 없던 퇴화용종의 한계를 군단과의 결합을 통해 가뿐하게 뛰어넘은 것이다.
"지원 바람! 지원..."
감히 예상치 못한 군단의 대공 공격에 동료들을 모두 잃고 홀로 고군분투하던 그 전투기는 광선에 적중당해 날개의 일부분만 남기고 폭발해 사라졌다.
다시 입을 닫은 지룡의 곁을 단단한 근육과 갑주로 무장한 4발 짐승들이 떼지어 몰려갔다.
비록 작은 소도시지만 도시에 주둔한 연합군은 사활을 걸고 총탄과 마법을 퍼부으며 저항했다.
"너, 너무 많아..."
성벽에 서서 손에 든 소총으로 마구 사격하던 한 이등병이 움찔거렸다. 화력이 부족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뻔했다. 지금 비행종 소수와 함께 도심에 쳐들어와 난동을 부리는 상위종 하나가 기사들의 이목을 끌며 그나마 있는 고화력 장비들의 어그로를 모조리 잡아먹고 있으니까.
덕분에 성벽은 반토막난 화력으로 현지 일반인들에게 무기까지 쥐어주며 싸워야 했다.
마치 계획된 움직임이라는 듯 딱딱 맞아 떨어지는 아귀에 모두가 놀랐지만 지금은 다시 대응할 시간조차 없었다.
"끝이 없어요! 어, 어쩌죠?!"
아차하는 사이에 어느새 성 코앞까지 다가온 검은 물결에, 그의 곁에서 자기 몸만한 총을 성벽에 거치하고 방아쇠를 당기던 현지인 소년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나도, 나도 몰라.'
얼굴이 창백해진 그는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물론 현지인 소년에게 급한대로 총쏘는 법을 가르친건 본인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역시 원래는 군인이 아니라 연구 및 탐색을 주력으로 하던 함상에서 잡무를 보던 일개 직원이었을 뿐이다.
우주벌레로 분류되는 괴생명체들과 전투경험이 있는 베테랑 군인들 조차도 서로 병종과 임무를 나눠 마치 한몸처럼 움직이는, 철저히 조직된 고지능 고화력의 '군대'와 맞선 적은 없었다.
"일단 명령이 있을 때까지 계속 쏴! 계속...톰?"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유일한 선택지는 방아쇠를 당기느냐 당기지 않느냐 뿐.
그는 그사이 쏘아진 커다란 독가시에 머리 전체가 관통당해 쓰러진 소년의 시체를 보고 말을 잃었다.
"으아..으아아!"
하지만 그 두가지 선택지의 결말은 결국 똑같았다.
동족의 시체도 가차없이 짓밟고 끝도 없이 몰려오는 괴물들. 놈들에게 망설임 따위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놈들은 총탄에 맞아 진득한 피를 흘리면서도, 신체 일부가 떨어져나가거나 타버려도 물리적으로 움직일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기어왔다.
이것은 그들이 강도연을 비롯한 상위종들의 활약에 미처 놓쳐버린 군단의 근본이기도 했다. 진화, 결합을 통해 생산된, 다양한 병종들이 몰아치는 끝없는 물량과 정교한 집단전술에 무자비한 살육까지.
"크학.."
성벽을 땅처럼 기어 올라온 거대한 거미가 배가 터지며 사방에 산성독을 흩뿌리는 동시에 자신의 몸이 터져나가는 순간에도 앞발을 들어 그의 몸을 관통했다.
거미의 시체가 굴러떨어지고, 그 앞발이 핏물과 함게 쑥 뽑혀나간 배를 부여잡은 그는 성벽 뒷쪽으로 굴러 떨어졌다.
동료들이 기어이 성벽을 타넘은 괴물들에 의해 학살당하고 있었다.
유일한 방어선이 뚫렸으니 끝이다. 이제 도시에는 오직 살육만이 있을 것이다.
"흐..하하..하핫!"
그러나 그렇게 한 건물 옥상에 떨어진 그는 흐려지는 시야속에서도 이내 미친놈처럼 웃기 시작했다.
저 먼 하늘에서, 구름이 갈라지고 마침내 그토록 부르짖던 함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급히 파견된 가장 가까운 호위함이지만 상관 없었다.
저 함선의 화력이면 이 도시 앞에 가득한 적들을 단숨에 쓸어버리는게 가능하니까.
'처리해. 놈들이 고작 한척이 아닌, 함대를 몰고 올 때까지.'
다만 그는, 마치 함선을 기다렸다는 듯 위장을 풀고 스르륵 나타나는 4장의 검은 날개를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