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빙산의 일각(1)
게이트를 통과한 강도연은 즉시 숨을 멈추었다. 차가운 물이 즉시 몸을 휘감았다.
어차피 자체적으로 몇 시간, 동력기관으로 호흡을 대체하면 우주공간 같은 곳에서도 수백시간 이상을 숨 쉬지 않고 버틸 수 있으니 상관은 없다.
이브가 게이트를 연곳은 바로 바닷속 대륙붕 한가운데였다. 게이트를 적진 한복판에 열면 순간 화력이 집중되어 손실이 늘어나고, 거기다 적들이 함선은 물론 소형 위성들까지 띄워 지상을 낱낱이 스캔하고 감시하는 덕에 대규모로 병력을 은밀히 움직이려면 이 방법 뿐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강도연을 선두로 백여개의 게이트에서 군단병들이 뒤따라 나오기 시작했다.
어둑한 바닷물 속 수십만에 달하는 군단병들이 줄지어 수면으로 향하는 모습에, 제아무리 거대한 수중생물이라도 감히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물론 군단병들이 그렇게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와도 일방통행으로 설정된 게이트는 물을 반대편으로 쏟아내지는 않았다.
'직접 판단해봐. 충분하겠지?'
'그래.'
이브는 미리 수면 위로, 더 나아가 허공으로 날려보낸 독수리형 정찰병의 극대화된 눈으로 주변을 정찰하고 그것을 강도연과 공유했다.
가장 가까이 보이는 해변가에도 도시가 하나 세워져 있다.
과거 군단의 공격에 피해 받지 않고 온전히 살아남은 도시이자 지금은 이곳 대륙 동부에서 현지인들의 중요한 거점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덕분에 반군연합은 함선에서 장비를 내려 저곳을 요새화 하길 시도하고, 결국 성공했다.
큼직한 석성과 여기저기 설치된 기계식 병기들의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 이질감을 불러 일으켰다.
'시간 끌 이유가 없어.'
강도연은 지금의 전력이라면 그곳을 공략하는데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날개를 펼친 채, 차가운 바닷물을 가로지른 그녀의 머리가 달빛이 아른거리는 수면에 스르륵 나타났다.
호흡이 필요한 다른 군단병들도 둥둥 떠서 얼굴만 내놓았다. 어차피 적들이 실시간으로 움직이게 하는 인공지능 위성도 이정도는 잡아내지 못한다.
대규모의 군세가, 수면과 수중에서 천천히 해안가로 향했다.
'솔직히 이정도면 나 혼자서도 가능하지 않을까?'
군단의 전 병력이 거의 해안가에 도달했을 때.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으로 처음으로 해안가를 밟은 강도연이 가면 속에서 눈을 번득였다.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한 새로운 심장들이 몸 속에서, 팔다리에서, 날개에서 가슴에서 은은히 빛나기 시작했다.
그 폭발적인 힘을 느낀 그녀는 두근거리는 감정을 애써 다스리고 단숨에 하늘로 치솟았다.
기존보다 몇배는 강해진 출력이었다.
'놈들이 알아챘다.'
그때 흥분한 강도연에게 이브가 정보를 전달했다.
상대측도 방심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눈에 띄는 행동을 하자마자, 그것을 알아차리고 경보를 울리며 대비 태세에 들어갔다.
"먼저 가서 휘저어 놓을게."
병력들이 해안가에 상륙하는 사이 강도연은 단신으로 단숨에 도심을 향해 날아갔다. 놀라서 허둥거리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도 보였다.
"적! 적이다! 모두 움직여!"
"이런 미친...왜 하필 여기로!"
저 먼 하늘 위의 감시 위성이 강한 에너지 반응과 함께 움직임을 포착하고 신호를 보낸 즉시, 이 어둑한 한밤중에도 도시 전체에 비상령이 떨어졌다.
평소엔 경계하거나 영 어색해 하는 파견된 반군연합 사람들과 현지인들도 이 순간 만큼은 한마음 한뜻으로 똘똘 뭉쳐 움직였다.
"마법사들 위치로...사수들은 어서 자리로 가서 장비 잡아!"
현장지휘관을 맡은 반군연합의 한 장교가 갈라지는 목소리를 한채 확성 장비를 들고 절박하게 소리쳤다.
그 자존심 높은 마법사들도 아무말 하지 않고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애초에 단 한번이라도 실전을 겪어 봤다면, 조금의 방심도 해선 안된다는걸 피와 살과 뼈로 겪었다는 뜻이니까.
그만큼 그동안 군단이 벌여온 국지전은 그들에겐 피를 말리는 극도의 스트레스였다.
"뭔가? 대체 뭐지?! 그, 그냥 평범한 1급 3형이나 1급 5형이라고 하게!"
성벽 한쪽에 자리 잡은 중년의 마법사 하나가 마침 곁에서 광선포의 조종간을 잡은 말단 병사에게 덜덜 떨며 소리쳤다.
그는 이미 실전을 한번 겪어 본 사람이었다. 그때 가까스로 적을 쫒아내긴 했지만, 그 막강한 화력을 끝끝내 파고들어 단칼에 사람들을 베어 넘기던 괴물은 아직도 그의 꿈에 나와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저, 저도 잘 모릅니다 그냥 실제 상황이라는 것 밖에는..."
광선포의 조종간을 잡은 병사의 손도 덜덜 떨리고 있었다.
실전이 처음이었던 이 병사는 기민하게 움직이면서도 잔뜩 두려움에 빠진 주변 분위기에 평소 이상으로 당황한 상태였다.
"다들 잘 들으시오. 놈들은 보나마나 소수일 것이오. 그러니 버티기만 하면 되오. 그러니 잊지 마시오. 놈들은 이제 우리 모두의 원수요."
뒷편에서, 서둘러 자리를 잡은 총지휘관의 살짝 떨리는 목소리가 확성마법을 통해 또렷히 들렸다.
총지휘관은 한때 마법사 학회 스타스에서 부학회장까지 지냈던 세인이라는 남성 마법사.
그 곁에는 현재 이 도시에 주둔중인 반군연합 부대의 지휘관도 있었다.
"놈들에게 분노하여 스스로 군에 자원한 이들도 있소. 반면 놈들과의 싸움을 피하고 싶은 자들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 밤에는 우리 모두 하나가 되어 싸워야 하오."
"...역시 말은 참 잘하시는군."
두려워 하는 사람들을 달래는 세인의 말을 듣던 그는 지팡이를 땅에 툭툭거리며 억지로 웃어보였다.
조종간을 잡고 있던 병사도 그를 보며 얼결에 웃었다.
"아직 어려보이는데 이름이 어떻게 되시오. 난 즈벤이라 하는데."
"전 그냥 파울이라 부르시죠. 상등병 파울입니다."
"그래 파울, 다음에 보면 아는척이라도 하지. 아니면 그냥 이따가 술이나 한잔 할텐가?"
두 사람은 이번 만남을 계기로 통성명을 나누었다. 이렇게 아무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솔직히 가능성 없는건 아니다. 적들이 단순한 1급들이라면...'
그럼에도 여전히 손을 떨던 즈벤은 속으로도 계속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실전을 겪어봤기에 안다.
적은 공포 그 자체였지만, 분명 대적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다.
"저기다! 하늘 위! 저건..."
'아.'
그러나 누군가의 외침에 달이 휘영청 떠 있는 하늘을 바라봤을 때. 그리고 그 달을 등지고 떠 있는 2쌍의 날개를 보았을 때.
그는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추정등급 8형 이상. 도시 하나의 수비군을 궤멸시킨 지난번 전장에서 또 한번의 성장을 이루었다는 최흉최강 적.
결국 두려워하다못한 일부 사람들이 검은 날개의 천사님이라며 올려 부를 정도의 공포.
그녀에 대한 증언은 최악 뿐이었다.
그녀와 싸우고 살아남은 군인이나 마법사는 단 하나도 없었다. 이런 증언이 존재할 수 있는건, 그녀가 비무장 무저항의 민간인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이유가 전부였다.
"쏴!"
"항복! 항복입니다! 무기 버렸습니다!"
그 압도적인 공포에 사람들의 반응이 둘로 갈렸다.
패닉에 빠져 반사적으로 내려진 사격명령에 맞춰 마법과 광선포를 쏘아내는 이들과, 재빨리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는 이들.
물론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자신에게 쏘아진 모든 공격을 검붉은 베리어로 막아낸 그녀가 날개를 활짝 펼치고, 그곳에서 빛나는 동력기관들을 공명시켰다.
"피해...모두 도망쳐!"
누군가 절박히 외쳤지만 등을 돌려 도망치는 것보다 쏘아진 거대한 섬광이 성벽을 덮치는게 더 빨랐다.
현장에 있던 즈벤은 그것에 휩쓸린 자신의 몸이 증발하는 것도,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채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길은 뚫었다.'
최소 수백의 사람들과, 마치 누군가 퍼먹은 아이스크림마냥 통째로 사라진 성벽의 잔해에 내려 앉은 강도연이 전방을 보며 본격적인 전투를 각오했다.
"버틴다. 함선의 지원이 올때까지!"
철컹거리는 소음과 함께 강화외골격을 장비한 한무리의 기사들이 묵직한 대검을 빼들고 거리를 가로질렀다.
목표는 하늘에서 내려 앉은 강도연. 싸울거면 오히려 지금이 기회였다.
"단장! 전술은..."
"하던대로, 하던대로 간다!"
선두에서 달리던 단장은 악을 쓰듯 소리친 뒤 이를 악물었다.
서로 힘을 합치기로 결정한, 아니 힘을 합칠 수밖에 없었던 반군연합과 현지인들이 가장 공을 들인건 바로 서로에게 생소한 소수 기동전이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 중요 인력들을 살해하고 장비를 파괴하는 적들을 전담하기 위해 만들게 된 시스템.
지금 뛰어가는 현지의 기사들이 그 주축이었고, 그동안 강제로 쌓은 경험과 데이터는 그들의 대응능력을 극한으로 상승시켰다.
"쳐라!"
기사들이 진형을 갖추고 덤벼들면 마법사들이 그 몸에 강화 주문을 걸어주었다.
강도연은 사방에서 몰아치는 그들에게 맞서 4개의 날개를 자유자재로 휘둘렀다.
"안 돼!"
"늦었어. 찔러!"
그 과정에서 미처 대응하지 못한 기사 셋이 단숨에 몸이 반으로 갈리며 사망했다.
이를 악문 단장은 그 희생을 기회삼아 검을 찔러넣었다.
"큭..."
그러나 강도연은 자신의 베리어를 부순, 푸른 마력이 빛나는 그 검을 마찬가지로 검붉게 빛나는 맨손으로 잡아챘다.
검은 꿈쩍도 안했다. 단장은 그 순간 절대 좁힐 수 없는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직감했다.
"끄아악! 그냥 쏴버려!"
검을 우그러뜨린 강도연이 뾰족히 세운 손을 그의 흉갑에 찔러 넣어 관통했다.
피를 토한 단장은 오히려 자신의 심장을 부순 그 손을 붙잡고 절규하듯 소리쳤다.
그 즉시 포격이 이어졌다. 광선포, 대구경 철갑탄, 레일건 등등.
기동성이 뛰어난 소형의 적을 기사들이 붙잡아두고 고화력의 병기로 처리한다는게 그들의 하나뿐인 전략이었다.
"...설마."
자욱한 먼지와 연기에 현장에 있던 기사들도, 다른 병력들도 지휘관들도 그 찰나의 순간에 숨을 멈추고 현장을 지켜보았다.
단장의 희생덕인지 운좋게 모든 화력을 집중해 전부 명중시키는데 성공했다.
"아아..."
그러나, 강력한 풍압이 그 모든 먼지와 연기를 날려보내고 날개가 펼쳐지자 곧 모두가 절망했다.
'이제 지휘관을 처리해.'
이미 한층 출력을 강화한 강도연은 외갑에 난 상처들을 재생시키며 단숨에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