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새로운 카테고리(10)
"아아. 드디어."
"아직 도착도 안했고, 분석하는데 시간도 필요해. 무엇보다 계획대로 진행될거라는 보장도 없잖아."
건조한 공기와 함께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군단의 둥지, 그리고 신목 뿐인 군단의 본성 레드리움.
오랜만에 이곳으로 복귀한 강도연이 잔뜩 흥분한 레이나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그토록 고대하던 순간 아닙니까.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어쨌든 지난 시간 저희는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번데기 상태에서 벗어나, 그동안 축적시킨 에너지를 폭발시킬 때입니다."
"성장하지 못하다니, 둥지를 이렇게나 엄청 넓혔는데."
레이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강도연이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용종을 절멸시킨 군단은 완벽히 세상의 주인이 되었다.
들도, 산도, 심지어 하천과 바다의 수면마저도 군단의 둥지가 뒤덮어갔다. 이 행성이 가진 모든 형태의 에너지를 흡수하고 그 대가로 확장시킨 둥지는 사실상 이 행성 전체를 덮어 버리기 직전이었다.
"그건 성장이 아닙니다! 단순한 덩치 불리기에 불과하며, 저희에겐 살아남기 위한 필수적인 행위일 뿐입니다. 진정한 성장이란 당신이 두번째 날개를 꺼냈을 때처럼 수준 자체를 한단계 끌어올리는 것이죠."
레이나가 강도연을, 정확히는 강도연의 날개를 가리켰다.
움찔한 그녀가 슬쩍 자신의 날개를 흘끔거렸다.
지금 그녀의 등에서 돋아난 날개는 두 쌍, 총 4장.
최근 계속된 전투를 치루던 와중 필요성을 느끼고 스스로 뽑아내어 활용하는 것 중 하나였다.
"이건 그냥 보다 효율적인 전투를 위해..."
"동기야 어찌 되었든 진화에 성공하고 적응하는데 성공했다면 그것이 성장입니다. 마치 지금, 저희가 저 우주의 적들을 상대하기 위해 진화하고 있는 것 처럼."
레이나가 의식을 확장했다. 지금 이브가 실시간으로 제공해주는 정보는, 레이나도 강도연도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볼 수 없는 아름다운 푸른 숲, 새파란 하늘을 유영하는 거대한 돛새치 무리.
레이나야 마치 연어를 노리는 곰의 눈으로 보고 있을 뿐이지만 강도연은 달랐다.
'판타지다.'
하늘을 나는 거대한 물고기, 그 임팩트 만큼은 지금까지 봐 온 그 어떤 것보다 판타지스러웠다.
"두분께서 저곳에서 그토록 노력하시어 마침내, 기회가 왔습니다."
레이나는 그 돛새치들 중 한마리가 증발하듯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히죽 웃었다. 그 거대한 물고기가 나타난건 다름인 바로 이곳.
셀카를 찍는 척, 대놓고 사진을 찍은 이브는 휴대폰을 신우에게 다시 건넸다.
"시작하자. 나는 이녀석이, 우리 함대의 주 재료로 충분히 쓸 수 있을거라 생각하거든."
동시에 '이곳의' 이브가 둥지와 신목을 짓뭉개고 땅위에서 퍼덕이는 그 거대한 돛새치의 위를 짓밟고 나타났다.
이브는 손에 든 불타오르는 검을 그대로 찍어내려, 돛새치의 숨통을 끊어버렸다.
그 검기가 돛새치의 몸은 물론 둥지, 심지어 그 밑 땅까지 부수고 파고들 정도.
에너지를 둥지에서까지 끌어온 인간의 몸일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위력이었다.
"돛새치를 얻은 것과는 별개로 새로운 세상의 좌표를 얻으셨습니다. 그곳은, 어찌합니까? 그곳은 지구도 아니니 굳이 먹지 않을 이유가..."
"아니, 물론 새로운 곳을 먹어치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한곳에 집중해. 목적을 이뤘으니 그곳에선 조용히 철수할거야."
조각난 돛새치의 몸이 통째로 둥지 밑으로 가라앉는 사이.
이브는 레이나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저쪽에선 신우와 함께 차분히 구경을 마치고 다시 지구로 복귀하는 중이었다.
사실 객관적으로 봐도 그리 오래 걸린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껏 채 1년도 살아오지 않은 이브에게는 최근의 웅크림이 너무나, 너무나 오랜 기다림이었다.
"그러니까 절대, 절대 실패할 수 없어. 단 하나의 변수도 놓치지 않을거야."
"느껴집니다. 이해합니다. 승리를 위해서 반드시..!"
이브의 감정에 동화된 레이나가 격한 반응을 보였다.
레이나보다는 영향이 덜한 강도연도 감정이 동요하는걸 막을 순 없었다.
"이제 함선의 설계에 들어간다."
산산히 조각낸 돛새치의 분해가 끝나고 그 내부를 낱낱이 분석하는것도 끝났다.
이브는 집중도를 살짝 더 올렸다. 새로운 병종, 그것도 처음 만드는 km급 대형 병종을 설계하는 일이니 보다 치밀한 계산이 필요했다.
"확실히 참고가 될 자료가 있으니 편하군요."
그 보조를 맡은 레이나가 무언가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 자료의 정체는 연맹의 연구원 피레스가 읽어내렸던, 함선 설계도를 포함한 군사 기밀 자료들. 이브는 피레스의 눈을 통해 본 그것들을 사진찍듯 통째로 외운 상태였다.
만약 맨땅에 헤딩하듯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처음부터 설계에 들어갔다면 분명 시행착오를 수도 없이 겪었겠지만 지금 이브에게는 이렇게 참고할 자료가 차고 넘쳤다.
"처음이니 우선은 당장 상대해야 할 적들의 규격에 맞춰 조금씩 우위를 잡을 수 있게 만들지."
첩자를 심어둔 연맹의 정보만 아는게 아니다. 그동안 꾸준히 현지를 점령해서 세력화 하려는 반군연합의 제 7 함대와 지상에서 끝없이 국지전을 벌여왔다.
그 과정에서 소리소문 없이 납치당한 여러 요인들, 그들은 단순히 잡아먹히거나 살해당한게 아니라 고문당하며 정보를 뱉어내고 죽었다.
그렇게 얻은 내부 정보, 연맹에서 얻은 정보를 적절히 조합한 이브는 지금 당장 빠르게 양산할 수 있으면서도, 체급으로도 밀리지 않는, 동시에 자신만의 새로운 함대전을 펼칠 수 있는 병종을 설계했다.
다만 설계한대로 만들기 위해서는 특별한 둥지가 필요했다. 지금처럼 알에서 태어나는 방식으로는 절대 만들 수 없으니까.
"그래서 시간이 약간 필요해. 하지만 난 이 시간동안 아무것도 안할 생각은 없어."
"그럼 뭘 해야 하지?"
"싸움이 길어지면 놈들의 지원이 도착하든, 도망치든 귀찮아질 확률이 커. 그러니 너는 지상군을 이끌고 본격적인 전쟁을 걸어."
이브는 강도연에게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그동안은 기동성 좋은 상위종 몇 마리만 데리고 국지전만 펼쳤다.
그 목적은 적들이 경계심을 끌어올리게 만들어 자원과 심력을 소모하게 하고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
하지만 어디까지나 소규모 국지전일 뿐이었다.
혹시라도 적들이 지나치게 버거워 해 본성에 지원을 요청하지 않도록, 그저 계속해서 경계해야 하는 위험한 짐승무리 딱 그정도 포지션을 유지하면서.
"놈들의 함대를 끌어내. 그러면 우리가 그렇게 모여든 놈들의 함선을 그대로, 한번에 잡아먹을거니까."
"알겠어."
이제는 기존의 전략을 버렸다. 상대가 당황할 만큼의 전력을 단숨에 투입해서, 전력을 끌어내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걸 위해 네게도 새로운 칼을 줄게."
그리고 이브는 본격적인 성장과 활동에 앞서 강도연에게도 보다 강해진 병력들을 딸려주었다.
"당연한 이치지만, 우리가 인간놈들을 분석하는 것 처럼 그놈들도 우리에 대해 분석해. 그 머저리들이 우리만큼 철저하게 분석하진 못해도, 적어도 몸에 자리한 동력기관을 기준으로 급을 나누는 지능 정도는 있으니."
이브가 기꺼이 차용해 사용하기 시작한 1급 3형, 3급 6형등의 분류법은 사실 자체적으로 개발한 분류법은 아니었다.
애초에 군단 그 자체인 이브에게 병종을 구분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상대하는 입장에선 각각의 특성과 능력을 가진 적을 분류하고, 분석하여 그에 맞는 대응법을 발달시키는건 기본중의 기본이었다.
"내부에 내제된 동력기관을 급으로, 장착한 총 동력기관의 숫자를 형으로...지금껏 상위종의 주축이 된 것들은 모두 검과 꼬리를 쓰는 1급 5형과 스태프, 창을 쓰는 1급 3형. 하지만 더, 더 강해져야 해."
이브는 상위종 병력의 숫자를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 그 질을 대폭 상승시켰다.
우선 심장을 대체하는 특수한 동력기관을 강도연처럼 4개를 한묶음으로 마련하고, 팔다리 모두에 동력기관을 박아넣어 화력을 극대화시켰다.
그동안 상대하던 인간들에게 함선이 아닌 이상 대응할 수 없는 힘과 기동력을 보여주며 공포 그 자체가 되어, 절망을 부르는 날개를 넘어 이명 자체가 죽음의 천사가 되어버린 강도연의 경우 현재 4급 12형.
"으극..."
"그리고 군단장, 넌 이제부터 6급 15형이야. 세밀하게 신경써야 하는 소형이라 출력은 대형의 반의 반도 안 되면서 소모되는 에너지는 지금 설계하는 함선형 병종 5마리 분량이야. 싫어?"
"아니, 아니야. 좋아. 더, 더 강해질 수 있어."
강도연은 둥지와 자신의 몸에 연결되어 에너지를 퍼붓는 그 충격에 이를 악물고 견뎌내었다.
그녀가 성장하면 성장하는 만큼 이브는 계속해서 한계까지 에너지를 투자해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 누구보다 고화력 고성능의 동력기관 6개를 품게 된 심장을 부여잡은 강도연이 한쪽 무릎을 꿇고 헐떡였다.
어느새 가슴팍의 외갑 한가운데도 검붉게 반짝이는 보석이 나타나 있었다.
"이제 출격해. 병력 총합 20만이면 적절한 숫자겠지."
이브가 판단한 이번 작전의 적정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지금 동원 가능한 병력에선 티도 안날 극히 일부일 뿐.
하지만 그동안 소수의 기동대만 상대하며 무의식에 군단의 전력을 얕보고 있을 이들의 명치에 치명타를 날리기엔 충분한 숫자였다.
"그들의 데이터에 기록된, 우리라는 종은 이제 완전히 새로운 분류(category)에 들어가야할걸."
이브가 게이트를 열었다. 단숨에 열린 게이트만 백여개가 넘었다.
게이트의 가장 큰 단점은 바로 크기를 키울수록 그 면적과 유지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것.
하지만 지금은 그 에너지, 행성 단위로 쏟아부을 수 있었다.